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74화 (74/296)

EP 13 - 국제적 헌터 시점 (1)

“......많은 피를 흘린 끝에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녀는 담담하게 연단에 올랐다.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조의弔意를 표하고 있다.

“떠난 이들은 돌아오지 않겠지만, 적어도 더 이상 떠나보내지는 않겠습니다.”

진지한 목소리를 들어보는 건 처음이라서 살짝 어색했지만, 처연하고 애처로워서 나름대로의 좋은 울림이 있었다.

홍선아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오직 그녀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침묵이 어색해질 즈음, 마지막 말과 함께 연설이 끝났다.

“그게 남은 이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인협회超人協會의 출범이었다.

* * *

“휴우...! 어땠어요?”

기자들과의 질의를 마친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게 다가왔다.

“음...”

문득. 내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적의 모습이 떠올랐다.

웃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미묘한 무표정, 조금 과하게 활기찬 몸짓과 태도, 머리카락 끝을 단풍처럼 물들인 붉은 마력.

한참 대화하며 웃고 떠들다가도, 그녀가 침묵하면 뭔지 모를 공허함이 느껴지곤 했다. 홍선아의 근본적인 외로움은 이쯤되면 저절로 느껴지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뀌었다.

이전보다 피곤한 기색이 살짝 심해졌고, 더 이상 굳이 경박한 태도로 자신을 포장하려 들지 않았으며,

“단발이 꽤 잘 어울리십니다.”

“으음! 정치하는 분이라 립서비스가 출중하시네!”

등허리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은 이제 목덜미를 겨우 덮고 있었다. 붉은 마력 때문인지 그녀의 머릿결은 아직도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건물을 나와 걸으며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었다.

“마력적성 높은 사람이 신체형질이 바뀐다던데. 홍선아 씨 머리카락이 그거 아닙니까?”

“으음...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재능이 있는 편인가?”

“아뇨, 재능이 아니라, 적성이요.”

나도 나름 천화란과 함께 많은 시간동안 연구를 같이한 사람이었기에, 이 방면으로는 꽤나 박식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마력의 활용은 무궁무진하다.

A타입은 그저 신체를 강화시키거나 변화시키는 선이었지만, B타입 능력자들에게서 특히 그런 특성이 두드러졌다.

불꽃을 만들고, 번개를 내뿜고, 얼음을 던지고, 땅을 울린다.

수많은 각성자가 다양한 능력을 사용하지만, 각성자가 한 가지 능력만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천화란은 물컵에 물도 채우고, 사람 치료도 하고, 마력을 분자 단위로 조절해서 포션도 만들었다. 이는 그녀가 마력을 세밀하게 다루는 데 능하고, 그에 필요한 기반지식이 풍부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천화란은 마력을 쓸 때마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분자 단위로 치밀하게 계산한다. 그냥 그런 느낌이다.

반면, 마력을 그저 숨 쉬듯 느끼는 감지윤의 경우도 있고, 마력을 표출하면 무조건 불꽃만 튀어나오는 홍선아같은 경우도 있다.

내가 세 사람과 모두 접촉해봐서 잘 안다. 각자가 마력을 느끼는 방식이 달랐고, 쓰는 방식도 달랐다.

“그러니까 저는 마력 다양하게 못 쓰는 무식한 각성자라는 거죠?”

“제가 홍선아 씨에게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마력쓰면 불꽃만 튀어나오는 노빠꾸 외길인생이라는-”

“제발 지랄 좀 그만하시라니까요.”

마침 커다란 리무진이 다가왔다. GS 그룹에서 보낸 차량이었다. 홍선아는 협회장이었지만 여전히 GS 아이기스의 길드장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뒷문을 열어주며 그녀에게 말했다.

“같이 있으면 기 빨리는 것 같으니까. 빨리 가세요.”

“내일 봐용.”

“좀 가라니까.”

내가 지팡이 손잡이로 쿡 쿡 찌르자 홍선아는 활짝 웃으며 차에 올랐다.

“아, 참!”

돌아서려던 찰나, 그녀에게 팔뚝을 붙잡혔다.

“우리 치유사들한테 들었는데요.”

“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래요!”

*

“무슨 생각 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요즘 홍선아가 말한 ‘좋은 소식’ 때문에 자꾸 기분이 뒤숭숭하다. 유재경 기획재정부 장관이 가볍게 묻자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래.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탕수육 소스를 집어들었다.

“부을까요?”

“무슨 사회주의자들이나 할법한 짓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경제관료가 할법한 말이었다.

결국 소스는 반만 부었다. 유재경 기획재정부 장관은 나무젓가락을 뜯어 테이블에 돌렸다. 짜장면 짬뽕 냄새가 진동했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 짜장면 소스를 야무지게 비벼서 내게 건넸고, 국무조정실장이 짬뽕을 그릇에 덜어 돌렸다.

이 중국집 테이블에 차관급 이하는 없었다. 대한민국 경제를 좌우하는 테크노크라트들의 대가리가 여기 모여 있었다.

“어이구, 유 장관님 신세 피셨습니다?”

“왜요. 배 아픕니까?”

“아프죠 그럼!”

“저, 저, 저, 동기 출세했다고 배꼽잡고 드러눕는 것 좀 보십쇼. 그냥.”

“박실장님도 장관급이잖아요.”

“국무조정실장이랑 기재부 장관이랑 급이 같습니까?”

“이야아. 은근히 아부하시네. 벌써부터 그림 그려요?”

“우리 유장관님 국무총리 되시면 실장님이 장관 하시면 되겠다!”

물론 다 같이 사이좋은 기획재정부 출신 식구들이라서 그리 서먹하지는 않았다. 옛날이었으면 파벌 나뉘어서 겐세이를 쳤겠지만, 고위층 자리가 남아도는 지금에는 여유롭게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양반들이다.

그래서 그런가 다들 화기애애하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오히려 나만 여기서 친구가 없었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건 유재경 장관뿐이다. 이 점잖은 양반은 한국 경제관료 패거리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말없이 미소지으며 침묵을 지키던 그가 근엄하게 수다를 중재시켰다.

“거, 참. 의원님도 계신데 체신머리없게 굴지들 좀 마세요. 다 큰 아저씨들이 무슨 동창회 온 것도 아니고......”

“이것도 동창회라면 동창회 아니겠습니까?”

“회의나 합시다.”

유재경 장관은 언뜻 점잖게 젓가락을 집어들고 짬뽕을 먹기 시작했지만, 옆에서 봤을 때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보아, 권력의 맛을 한껏 향유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가볍게 웃었다.

“여기서 장관님들 여럿 나오실 것 같은데. 야당의원 앞에서 이러셔도 괜찮은 겁니까?”

청문회와 국정감사라는 게 존재하는 이상, 내각 관료들에게 야당 국회의원은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상전上典이었다.

그러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다들 여유롭게 웃으며 넘어갔다. 내가 재단 굴리던 시절에 안면을 대충이나마 트고 지낸 사람들이었으니까.

무엇보다, 국민당 대표 김조인은 이 사람들의 할애비 격 경제관료였다. 선후배가 밀어주고 끌어줘야 사람이 큰다는 상식이 통하는 나라인지라,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았다.

“그나저나 김 대표님은 무탈하십니까? 워낙 연세가 있으신 분이라...”

“국회의원치고는 그리 연로하신 편도 아닙니다. 정정하세요.”

“다행입니다. 저 예전에 정책조정국 있던 시절에...”

높으신 분들 대화가 그렇듯, 한참동안 신변잡기가 이어진 끝에서야 본론이 나왔다.

“저어, 의원님. 이번에 GS그룹에서 마석시세 흔들지 않았습니까?”

“흔들었다기보다는 살짝 놓친 거죠. 고삐를.”

“일부로 놓친 거면 흔든 겁니다.”

이게 바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였다.

대한민국 경제관료들의 가장 큰 골칫덩이가 바로 GS그룹이었고, 이들이 GS그룹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나였으니까.

원래 국회의원은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로비스트였다.

“GS그룹이 사실상 마력공급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이상, 그게 국가경제 안정성에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데...”

“하하...”

“천금순 사장님이 워낙 공격적인 성품 아닙니까. 우리야 많이 곤란하다만 참 재기발랄한 분이십니다.”

그들은 내게 GS그룹의 속사정을 물었다.

"천사장이 이번에 미국이랑 큰 거 했다면서요?"

"미국은 중재자고 사실상 일본이랑 한 거죠."

"7함대가 일본에 대피한 게 몇 달 째입니까. 일본은 지금 미국 꼭두각시에요. 예전에 핵폭탄 가지고 양아치 놨을 때만 봐도 그렇고..."

해석 : 미국이랑 외교관계를 알아야 틀 수 있는 건이었는데, 천사장이 한미관계를 어떻게 파악했을까요?

금융위, 산업은행, 심지어 공정거래위원회까지 움직여도 제어할 수 없는 게 천금순이라는 망아지였으니까.

“적이 적을 안다고. 요즘 하루종일 천금순 사장만 마크하고 있으니 이젠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그, 뭐냐. 그 사람은, 자본주의가 낳은, 으으음, 아아주, 최고의...”

“씹새끼?”

“그래! 씹...! 아니, 뭐요!?”

내가 작정하고 그녀에게 재단에서 관리하던 마석들을 떠넘긴 이후로, 그녀는 고비풀린 망아지처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교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말래도 멀쩡한 회사 망가뜨리면서 풋질을 하지 않나. R&D를 하랬더니 산업스파이를 뿌리지 않나......”

“그 친구가 망가뜨린 회사가 벌써 네 개입니다.”

GS그룹에 대한 다양한 견제방법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현실성 없는 짓들 뿐이었다. GS의 내부정보를 묻는 질문에는 적당히 대답하고, 말도 안 되는 의견은 적당히 수긍하며 시간을 떼우던 찰나.

“이번에 삼성에서 2세대 변환기술 개발했다고 하던데요.”

쓸만한 정보가 들어왔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듣는 소린데요...?”

“이재용이한테 직접 들은 소리니까 반쯤 확실합니다.”

변환기술이라 함은, 마석을 전기로 바꾸는 기술이다.

나는 본격적으로 입을 털기 시작했다.

“속지 마세요. 한 달 전에도 저한테 와서 똑같은 소리하고 갔습니다. 일식집에 불러내서 넌지시 했던 말이지요?”

“아, 예......”

“시중에 마석이 잘 안 풀려서 최대한 물량 확보하려고 막 던지는 거에요. 일단 받아놓고 개발하겠다 이거지.”

“한 달이면 신기술 나올법도 한데. 왜요.”

“우리나라 마석연구는 전부 국가가 감독하고 있는데. 무슨 정부도 모르는 신기술을 개발합니까.”

“아아, 그쪽에서 새로 개발한 연구소가 하나 있어요. 지리산 쪽에.”

“거기 직원들 중 2할은 국정원 요원입니다. 제가 박아넣은거라 잘 압니다. 신기술이 나왔으면 위쪽에서 내려왔지, 아래에서 올라오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당당하게 자신했다.

“그냥 지금처럼 GS한테 맡기시는 게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그나마 나을 겁니다.”

*

국회의원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로비스트다.

동시에, 가장 강력한 산업스파이이기도 했다.

“몸 좀 사리셔야 하겠습니다. 천사장님. 관료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그, 그런가요...?”

“삼성이랑 손잡고 조만간 밟으려는 모양샙니다. 그쪽에서 비밀리에 운용하던 지하 연구소가 있나본데, 2세대를 자칭할 정도로 변환기술이 발전했다고 합디다.”

천금순은 시무룩하게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 양주를 홀짝였다. 그리고 겉옷과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고마워요...”

“칼 갈고 있으니까 뒤통수 조심하세요. 일단 임시방편으로 막아놨는데 그리 오래는 못 갈 것 같고......”

“감사해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으음! 좋은 소식은 좋은대로, 나쁜 소식은 나쁜대로, 돈이 되니까요...!”

대체 평소에 뭔 짓을 하고 다니는지는 경제에 대해 무지해서 잘 몰랐지만, 나이 지긋한 관료들 입에서 쌍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범상한 짓거리는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요즘도 유재경 장관님이랑 싸웁니까?”

“딱히 싸운 적은 없어요...”

“그러면요?”

“그 아저씨가 남 비즈니스를 방해하는 거지!”

역시, 깊이 엮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일부러 천금순과 거리를 두고 있는 편이었다. 가뜩이나 수명도 깎였는데 스트레스까지 더 받으면 어쩌려고.

“......아무튼. 초인협회 출범했는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세요!”

산업스파이짓 한번에 초인협회에 대충 40억원이 꽂힐테니 그리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이 정도면 홍선아를 위한 개업선물로는 충분하겠지.

“후우...”

이제 슬슬 허리까지 쑤시는 걸 보니 갈 때가 된 모양이다.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찰나,

핸드폰이 진동했다.

- 여보세요? 한승문 의원님 맞으시죠!

“아, 예.”

부모님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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