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 - 짐을 짊어진 이들 (11)
난세가 끝났다.
후일, 초상사회超常社會의 태동기라 불리울 시대가 막을 내렸다.
찬란한 업적에는 온갖 미사어구가 달라붙었고, 1천만이라는 숫자는 공허한 상식으로 남았다.
혼란의 종식은 영웅들의 몫이었으니,
치세의 개막은 위정자들의 몫이었다.
* * *
죽음에는 큰 힘이 담긴다.
상실이라는 것에 담긴 에너지는 강렬하고, 국민이 그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국가는 변화한다.
그게 정치가들의 몫이었다.
허나, 미국은 그 에너지를 정치적 내전에 사용했다. 대선이 겹쳐 있었기 때문이다. 공화당과 민주당 후보 두 명이 나라를 분열시켰고, 그로인해 수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결국 퇴물 취급받던 기존 대통령이 관례를 깨고 3선에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는 실로 막대했다.
미국은 중부 대평원을 상실했다. 한때 서부 황야라고 불리던 지역이었다.
이에, 남한 내부에서 남북분리가 일어났던 것처럼, 동서분리가 일어나 지상군의 양면전선이 구성되었다.
하필이면 대선 기간이었고, 감염형 개체로 인한 좀비 아포칼립스를 둘러싼 정치적 문제가 지상군의 적극적인 공세를 막아버린 탓이었다.
공식적으로는 3천만 사망자라 발표하고 있으나, 실상은 7천만 이상이 사망했다. 좀비를 포함한 숫자다. 백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반면, 러시아는 정치적 혼란을 겪지 않았다.
러시아의 독재자는 빠르게 결단했다. 이에, 러시아는 시베리아 대평원 일대를 상실했다.
아니, 포기했다.
인구 대부분이 서부에 살고 있었기에,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일찌감치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하고서 나머지 영토를 버렸다.
1천 500만 명이 죽었으나, 모든 학자들은 가장 합리적이고 최소한의 희생이었다고 입을 모아 칭송했다.
허나, 인구는 적어도, 막대한 군대가 배치되어 있던 동북아시아의 극동 군관구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중앙정부에게 버림받은 국민들을 모으며 통제에서 벗어났다.
물론 자국민 방어를 위한 소극적 쿠데타였고, 화해와 양보 분위기를 조성하며 수습 국면을 맞이했으나, 돌발사태로 인해 독재자가 사망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수많은 인구와 적은 군대를 보유한 서부 중앙정부,
적은 인구와 수많은 군대를 보유한 동부 군관구.
시베리아의 대평원에 명분과 이념, 그리고 버림받은 국민들의 원한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중국은 3억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반동’이 7번 일어났고, 모두 극도로 잔인하게 진압되었으며, 그들은 여전히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고 있다. 물론,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본은 섬나라인 특성상 육군이 적었다. 이에 국방이 헌터들에게 맡겨지자 야쿠자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이밀었다. 중앙정부과 지방 헌터세력 사이의 갈등이 치열하다. 3천만이 죽었다는 건 정치세력에게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유럽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고, 국경 구분이 사실상 무의미하게 괴수가 퍼져나갔기에, 자연스레 전략전술이 유명무실해지고 인간과 괴수의 난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난전에서는 정규군보다 헌터들이 더 효과적이었다. 적군만 골라 죽인다는 점에서. 어지러운 세상 속에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하며, 유럽은 헌터 중심 사회로 거듭나고 있었다. 물론 난전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사상자의 규모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는 제 3세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랍, 중앙아메리카, 남미, 서남아시아 내전지역.
군부와 마약 카르텔, 종교 극단주의 집단, 반군 등이 자연스럽게 헌터와 결탁하자, 제 3 세계는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했다. 원래부터 하던 거 눈치 안보고 하게 된 셈이었다. 사망자를 집계할 공식 기구조차 없었지만, 적어도 억 단위로 올라간다는 건 분명했다.
그렇기에.
사회 인프라를 유지하고,
양질의 생활수준을 보장하며,
여전히 35만 명 규모의 정예병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괴수의 위협에서도 더 안전해진,
대한민국은.
- 저, 원옥분은, 대통령이라는 역사의 부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이 자리에서 당당히 말씀드리는 바이며, 이에, 차기 대선에 출마하여......
‘선거운동’이라는 아주 사치스러운 정치활동이 가능했다.
*
“우와아!”
홍선아가 TV에 나온 원옥분의 대선 출마선언을 보고서, 깁스 사이로 튀어나온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감탄했다.
“엄청 세게 말하네요?”
“신기합니까?”
“으음. 조금?”
원옥분은 ‘역사의 부름’까지 운운하며 패기넘치는 출마선언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것도 충청 방어선의 최전선에서 말이다.
실제로 저 기자회견의 배경에는 아직 불타고 있는 도시가 매연을 내뿜고 있다. 아주 노골적인 이미지 메이킹이었다. 스트롱맨 전략이다.
“홍선아 씨가 혼수상태 빠져있는 동안, 원옥분 대행이 지지율 과반수를 찍었어요.”
“으잉?”
“북한을 조졌거든.”
각성 촉진제가 그렇게 풀렸는데, 국군 측 초인들이 서울을 지원하지 않았던 이유가 밝혀졌다.
초인부대.
차재균의 궁극적 목적이었던 그 조직을, 원옥분이 기어코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끈질긴 협상력으로 미국의 묵인을 받아내고, 중국의 협조를 얻어낸 끝에,
원옥분은 그 마지막까지 날카롭게 벼려낸 단검을 북한의 뒤통수에 거침없이 박았다.
“핵무기 털었어요.”
“......와우.”
홍선아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고, 이는 실제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낸 업적이었다.
“정황상 중국 도움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재주도 좋지.”
어차피 핵무기 위치야 국정원 대북공작라인에서 항상 파악하고 있었지만, 가서 그걸 또 들고오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나도 뭐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어요. 입을 꾹 다물더라고. 반응 보니까 내막이 더 있는 것 같긴 한데, 적어도 언론에는 그리 보도가 됐고......”
원옥분은 대단한 위업을 세운 것이다. 정치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덕.
“국민들 자존심을 세워줬어.”
지지율에 가장 크게 와닿는 요소였다. 국위선양. 그리고 실질적 안전.
-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국군은 더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그 어떠한 수단도 불사할 것을...
원옥분은 그 어느 때보다 굳세고 강건한 모습으로 연설을 이어갔지만, 어쩐지 내 눈에는 히죽거리는 것 같았다.
지금이 그녀의 최고 전성기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대선 직전에 전성기를 맞은 정치인이 어떤 루트를 탈지는 뻔했다.
TV 소리를 듣던 나는, 사과를 예쁘게 깎아서, 온 몸에 깁스를 둘둘 감고 있는 홍선아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아 해보세요.”
“아앙.”
“쩝. 원래 정치는 일정수준 이상은 포용 못해요. 온건파 지지율 확장 포기하고 지지층 굳히기 들어갔다고 봐야지. 자기도 이제 지가 다음 대통령이라는 거 아는 거야.”
북한도 이제 불쌍하게 되었다. 개성 방면으로 괴수들이 올라갔고, 핵무장이 해제되며 대외 억제력이 상실되었으니.
이제 그들은 우리 공군지원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예전에는 핵폭탄으로 같이 뒈지기 싫으면 공습 보내라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제발 살려달라고 공습을 정중히 요청하는 식이다.
“......”
입맛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괴수를 북쪽으로 밀어내자는 내 또라이같은 작전은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실제로도 그리 되어 괴수들이 북한의 후방을 유린하고 있었으니까.
대규모 탈북이 다시금 발생했다. 우리가 유도했던 결과였고, 이번에는 인민군도 제지하지 않았다.
우리는 강원도에 탈북자들을 무제한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리고 해상로를 통해 ‘남한’ 사람만 충청 방어선에 후송하고 있는 형국이다.
탈북민들은 휴전선은 넘을 수 있었으나, 충청 방어선 이남으로는 내려오지 못했다.
괴수를 막는 방어선은, 이제 사람을 막고 있다.
그들이 남한의 보호를 받는 인민임은 분명했으나, 투표권도 받지 못했고, 사실상 2등 시민으로 인정될 뿐이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국토에서, 그들은 새 터전을 꾸려갈 것이다. 소형 게이트와 괴수들이 도사리는 험난한 강원도의 산맥에서 말이다.
“이게 우리가 만든 세상이에요.”
“으음... 적어도 망하지는 않았네요.”
“그렇죠.”
나는 홍선아를 바라보았다. 홍선아 또한 우물거리던 사과를 삼키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정치인은 습관적으로 은은하게 웃고 있었고, 정신병자는 차마 울지 못해 웃고 있었으니, 둘 중 누구도 웃는 사람은 없었으나 기실 웃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슬슬 동이 틀 것 같은 기미가 보였다. 검은 하늘이 조금씩 파랗게 변했다. 새벽의 어스름이다.
TV 속 원옥분의 당당한 연설과, 아나운서가 노래하는 희망찬 미래. 병실 히터 돌아가는 소리. 간호사들 카트 끌고 다니는 소리.
우리는 한참동안 시끄러운 침묵 속에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홍선아는 어떨는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나는, 그녀의 눈빛 속에서,
아직, 불꽃이 식지 않았음을 느꼈다.
“선아 씨, 다리는 괜찮나요?”
“포션이 효과가 좋더라구요.”
그녀는 아직 꺾이지 않았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러면 우리 어디 좀 갔다 올까요?”
“어머, 여기서 그 말이 나와? 상남자네...?”
“지랄 좀 하지 마시고요.”
“빠꾸 없는 데이트 신청 아니었나요? 순간 설렜는데.”
나는 넥타이를 주섬거리며 툭 내뱉었다.
“맞으니까 옷 입어요.”
*
한참동안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지리산 국립공원 인근의 경치좋은 공터였다.
나는 의족을 절뚝이며 이 붕대로 칭칭 감긴 짐덩어리를 휠체어에 실었다.
“읏차!”
“저기요. 사람 옮기면서 무거운 티 좀 내지 말아주실래요.”
그녀는 쉴 새 없이 조잘거렸으나, 나는 묵묵히 절뚝거리며 휠체어를 몰았다. 언뜻 휠체어가 내 지팡이 역할을 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한참동안 공기 좋은 잔디밭을 걸었다. 새벽하늘은 조금씩 밝아져왔고, 숲으로 둘러싸인 이 텅 빈 공간에는 의미모를 신성함마저 감돌았다.
“으음! 공기 조오오타! 여기 뭐하는 데에요?”
“새로 지을 현충원입니다.”
“......”
홍선아가 순식간에 침묵했고, 나는 지리산 중턱에서 내려다보는, 아침안개로 둘러싸인 도시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어 멀리에.
검은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홍선아는 불안해 보였다.
“......여기는 왜 온 거에요?”
“고백하려고요.”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는 얼핏 평소와 같아 보였지만, 파르르 떨리는 손은 무릎을 덮어놓은 담요를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장난치지 말구.”
“장난 아닙니다.”
나는 그녀의 망설임을 무시하고서, 휠체어를 검은 비석 앞으로 끌고 갔다.
비석까지 가는 길에,
“헌터와 군이 서로 돕지 않았습니다.”
나는 초연히 고백을 시작했다.
“초인들의 입장을 대표할 단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초인과 국군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줘야 합니다.”
마침내 우리는 검은 비석 앞에 도착했다.
홍선아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휠체어에 앉아 비석에 손을 뻗었다.
비석에 맺힌 새벽이슬이 흘러내렸다. 언뜻, 눈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손은 검은 대리석에 박힌 이름들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입은 조용히 망자들의 이름을 읊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백했다.
“선아 씨, 새로 만들어질 협회의 협회장이 되어 주십시오.”
그녀는 항상 짓던 애매한 무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웃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냉담함이다.
그리고는 생긋 웃어보였다.
어느 때보다 환하게.
“자격이 없네요.”
“어째서입니까?”
홍선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비석을 쓰다듬었다.
"제가 버린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있어요.”
“홍선아 씨 의사는 상관 없습니다."
우리는 짐을 지고 있다.
피와, 눈물과, 목숨으로 된 짐이다.
절대로 내려놓을 수 없다.
“김춘식 길드장을 따르던 모든 생존자들이, 차기 협회장으로 홍선아 씨를 지목했습니다.”
가만히 앉아 비석을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나는 더 설명하지 않았고, 그녀 또한 더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겨우 회복된 다리를 부들거리며 일어나, 휘청거리며 걸어가 비석을 껴안았다.
그리고, 차마 서 있지 못해 무릎을 끓었다.
숨도 못 쉬고 웃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미친 듯이 웃었다.
나는 뒤돌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새벽이 끝났다.
아침이더라.
햇살이 검은 비석을 비추는데,
그 앞에 한 영웅이 쓰러져 울었으며,
문득 바람이 참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겨울은 그렇게 끝났다.
세상은 다시금 각자의 몫이 되었고.
영웅들의 시대 또한 저물었다.
허나,
짐 진 자들에게 주어진 여로는 끝나지 않았고,
항상 그렇듯,
영웅은 조용히 땅 밑에서 그들을 지탱했다.
김춘식金春植.
David. S. Kim.
‘1978 - 2025’
So justice is far from us,
and righteousness does not reach us.
We look for light, but all is darkness.
for brightness,
but we walk in deep shadows. Isaiah 59 : 9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광명을 갈구하나,
짙은 어둠 속을 걸어감으로.
이사야 59 : 9
EP 12
짐을 짊어진 이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