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 - 짐을 짊어진 이들 (7)
설진운은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검도劍道 2단을 딴 건 부모님 학원 물려받고 취업걱정 덜려고 했던 거지, 무슨 검술 천재 같은 게 아니었다. 다만, 움직이는 생물에게 무기를 휘두르는 데 조금 익숙할 뿐이었다.
항상 묵묵히 상황을 관조하게 된 건, 무슨 판단의 천재나 그런 게 아니라, 게이트 첫 날 여동생의 시체를 돌무더기에 묻고서 남들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냉정해졌을 뿐이었다.
살짝 현실에서 붕 떴다고 해야 할까.
현실이 현실같지가 않아서 괜히 바뀌는 게 싫어서였을까.
세상 바뀐 줄도 모르고 설치는 일진들이나, 능력 얻고서 좆대가리 함부로 놀리는 부류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싶지 않을 정도의 의분義憤 정도는 가지고 있을 뿐이었고,
능력 닿는 선에서 살릴 수 있으면 살리는 게 맞다는 상식 정도는 가지고 있을 뿐이었으며, 이대로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평소와 같았다.
다만, 세상이 강요하는 인간의 기준이 살짝 낮아졌기에.
그는 이제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 * *
여도연은 29세의 날백수다.
전직 격투기 선수라는 건 그쪽 업계 아니면 요즘 세상에 먹히지 않는 스펙이었고, 동생 빽으로 받아낸 7급 국회공무원은 직업이라고 내밀기가 부끄러웠다.
여자 격투기 선수라봐야 비키니 입고 연기하는 과격 뮤지컬 선수라는 인식 때문에 경호원을 하기도 힘들었고, 꿈 찾겠다고 대학을 때려쳤기 때문에 29살 먹고도 가진 게 고등학교 졸업장 뿐이었다.
이력서가 까일수록 그녀는 그녀가 사회적 쓰레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평생동안 반항했던 자기 어머니의 고리타분하고 신경질적인 대리만족적 목조르기가, 어쩌면 옳았을 수도 있다는 게 비참했다.
어느 순간 자기 사촌동생의 승승장구에 몰입해서 대리만족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머니나 본인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에 자괴감이 들었고.
평생동안 쫓았던 꿈이 무너져 내리고, 그걸 박살낸 게 본인의 의지였다는 것에 지독한 무력함과 패배감을 느꼈다.
성공했다면 언젠가 자기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라도 만들어졌겠지만, 그녀는 결국 꿈만 쫓다가 인생 조진 평범한 조연들 중 하나였다.
그녀가 헌터라는 업業에 중독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은 다들 인정받기를 원하니까.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
게이트가 열린 이후로, 여도연은 괴물을 잡고 사람을 살리면서 본인의 실존적 가치를 다시금 세상에 되새기려는 사람이 되었다.
변소정 변호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웅놀이에 빠졌다.
그렇기 때문에,
“아아, 아직 이해가 안되나 보구나? 공간은 유한한데 괴수는 무한대야. 근데 의정부 사태 이후로 괴수 생산량이 늘어났어. 그래서 내가 지금껏 조사한 통계로 예측한 공간이 가득 차는 게 얼마 안 남았다는 거지.”
“......”
“괴수가 마력에 이끌리잖아. 사실 의정부 마력에 유도된 괴수가 튀어나온 것에 불과한 거지, 이번 게 서울 게이트 폭주는 아니라고 보거든? 이게 폭주였으면 나라는 진작 망했어요. 1km짜리 게이트 너머에 얼마나 큰 공간이 있겠냐고.”
여도연이나, 설진운이나,
이 멸망의 예언을 듣고도 가만히 넘어갈 인종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아직 지고있는 짐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들은 도박사에게 받은 백신을 각자의 감염자들에게 전달해야 했다.
허나.
“드, 드디어 찾았구만 기래!”
마침 백두혈통 가지고 개수작부리다 한승문에게 인생의 쓴맛을 단단히 본 리철진이, 순간이동으로 간신히 여도연을 찾아와서 도움을 청한 순간,
사건의 결론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내, 내래 어찌나 동무들을 애써 찾아 해맸는디 모르갔시요..!”
“......철진? 대체 무슨 일-”
“동무레 아우가 우리를 죽으라고 북으로 밀어 제끼고 있다우!”
“......우리 엄마 아빠는 어쩌고 여기까지 왔어?”
“한승문인지 뭔지 개뼉따꾸 같은 노땅 새끼가 데려갔다야! 고저 동무레 아우라고 하디 않았소! 내 간곡히 부탁드리오! 제발 가서 한 말씀만 해주시라요!”
“우리 엄마아빠 지금 어쨌냐고! 이 새끼야!”
“한승문이가 데려가서 치료한다 했소!”
“...! 백신! 백신 찾았대!?”
“있디! 그짝에서 진즉 확보한 상태였으니 지금쯤 병원으로 이동하였을 기야! 대관절 남한 정치국장 새끼들이, 우리 10만 동포를 간악한 리용수놈 아구리에 처넣을라 기라는 상황이야! 려도연 동무! 부디 한 번만...!”
서울 게이트 토벌대가 결성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리철진은 서울이고 나발이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리철진은 백두혈통을 구출하기 위해 지금 상황을 이용하고자 했고,
그게 바로.
“씨발! 씨발! 씨바아아알!”
여도연과 헌터들이 63빌딩 옥상에서 사선死線을 넘나들고 있는 이유였다.
“공중지원 온대매!”
“언니 동생이 한승문이라면서요!”
“나도 몰라 썅!”
“쌤! 뒤에!”
“끄아악!”
본래 그들의 계획에는 한국군의 공중지원이 있었다. 서울 게이트 폭주에 대한 사안을 정부에 전달하면, 필히 지원이 올 것이고, 한승문이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문제는 통신병 역할이 리철진이었다.
본디, 서울 게이트를 방어한다면 10만 탈북자의 처우가 좋아질 것이라는 양측의 합의가 있었으나, 리철진은 10만 명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 1명 때문에 이러는 거였고, 이걸 누구한테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리철진은 그들을 배신했다.
허나, 코앞에서 괴물이 흉악한 아가리를 들이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추측해내지 못했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헌터들은 그저 괴수들에게서 살아남는 데 급급했다.
물론 그들이 생각도 없이 서울 게이트 닫겠다고 덤벼든 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아주 구체적인 작전이 존재했다.
1. 설진운과 도박사를 필두로 한 1조가 여왕괴수를 게이트 밖으로 끌어낸다. 다수의 근접계와 소수의 염동력자로 구성된 팀이다.
2. 여도연을 필두로 한 2조가, 공군과 함께 여왕괴수의 재생력을 넘는 포격을 가한다. 대부분이 몸 약한 원거리 공격수들이다. 나머지는 호위.
3. 마석을 흡수한다.
투명인간을 이용한 사전 정찰,
설진운이 도려낼 여왕의 부위,
여왕의 재생력을 고려한 질량 계산,
설진운 측 염동력자들이 이동시킬 수 있는 질량,
내부 괴수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바깥쪽 헌터들이 가하는 충격량,
공격수 헌터들을 지킬 방어진형,
공군에 전달한 공습시간,
효과적으로 포격하기 위한 각성자들의 공격순서까지.
계획은 철저했고, 대비 플랜도 다양했다.
그저, 여도연과 설진운은 리철진을 믿었으나,
북한 고위 간부 집안이었던 리철진의 연기력은 목숨을 걸고 쌓아낸 기예技藝에 가까웠고. 리철진에게는 백두혈통 김성아가 더 소중했기에.
남한이 아수라장에 빠진 틈을 타 10만 탈북자와 백두혈통을 구출할 계획이 있었기에,
그래서 리철진은 아주 구체적으로 그들을 속였기에.
“헬기가 지원해준다며! 다 협의된 사항 아니었어? 공군 참모총장이랑 얘기했대매!”
“왜 안 와아아아!”
“닥치고 기어올라오는 새끼나 막아! 두영이 어디갔어!?”
“아, 아까 떨어졌어!”
공군의 지원을 받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여, 1조가 간신히 여왕괴수를 토막내서 게이트 밖으로 밀어냈을 무렵에는,
“......젠장.”
2조는 이미 절반 이상이 희생당한 후였다.
오른팔 피부가 녹아 없어지고 근육이 드러난 채로, 설진운은 힐러 세 명을 옆에 달고서 터덜터덜 복귀했다.
설진운은 가만히 서서 이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익숙했기에 시선은 더더욱 냉정했다.
“......”
어두운 밤. 아니, 시퍼런 밤.
서울의 밤하늘은 게이트 불빛으로 번쩍였고, 언뜻 파랗게 보이는 살덩어리들이 떨어지며 금세 괴수로 변해 미쳐 날뛰었다.
6명이 죽어가며 토막내서 끌어낸 여왕괴수는, 순식간에 재생해서 본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고.
하늘에는 공군은커녕 날개달린 괴수들이 제각각 이빨을 드러내며 피륙을 묻힌 채 호시탐탐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탈북자들은 그세 어디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발치에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여학생의 상반신이 굴러다녔다.
머리카락이 피로 물들어있다.
분명, 학교에 고립된 채로 새해가 지났으나, 해맑게 웃으며 20살 기념 셀프 졸업식이랍시고 옷을 주워 입었기에, 교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사실 제작년에 짝꿍이었을 때 살짝 설레기도 했던 친구였다. 성격도 털털하고, 마음씨도 좋고.
젠장. 죽고 나서야 그 사람 장점이 떠오르는 건 아무리 지인이 많이 죽어도 변하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건 참으로 익숙해지기가 힘들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
반쯤 으스러진 쇠파이프를 든 설진운은 행여 주변에 들릴까 입모양으로 욕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다. 1km짜리 게이트가 하늘에 있었다.
속에서 괴수가 나온다. 좆같다.
인간은 게이트 아래서 참으로 무력하다.
“......후우!”
소년이, 아니. 청년이 웃었다.
설진운은 반년간 콩가루 조직을 이끈 리더다. 스무 살이었고, 사실상 고등학생이었다.
하지만, 생존이라는 결과가 말해주듯이.
그에게는,
왜 절반밖에 남지 않았느냐. 이제 어쩔거냐. 공군이 왜 안 왔느냐. 여도연 니 동생이 한승문 의원이라고 하지 않았냐.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냐.
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인내심이 있었고,
아무런 질문도 없이 이 상황이 리철진의 배신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단숨에 눈치챌만한 판단력이 있었으며,
제기랄! 리철진 네이놈! 이라고 분노를 표출하기보다는,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라는 말부터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재능이 있었다.
그래. 이건 재능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우리가 이깁니다!”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 구하고 훈장도 받고! 예!? 가족들도 지키고! 자, 자! 일어나세요!”
여기서 다 죽는다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웃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무력武力도 조금 있었다.
비록 방금 전에 망가진 피부가 겨우 회복되어, 쇠파이프를 겨우 붙잡고 있는 것도 힘들었지만.
마음같아서야 다 좆됐다며 땅바닥을 치며 누구 시체라도 붙잡고 엉엉 울고 싶었지만.
그는 마력을 끌어올려 쇠파이프에 검기劍氣를 씌웠다.
설진운이 떨리는 손으로 검을 바로잡았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
가로등만한 마검魔劍이 빛났다.
이윽고, 푸른 섬광閃光이 괴수 두 마리를 베었다.
사람들의 눈동자에,
푸른 빛이 맴돈다.
그 순간 게이트에서 괴수 스물 네 마리가 추가로 떨어졌으나, 사람들은 설진운의 찬란한 마검에 현혹되어 그를 지켜보지 못했다.
설진운은 그들을 속였다. 부상자들이 앞장서서 싸우는 설진운을 믿고, 전투 속에 판단력을 상실한 채로 리더의 뒤를 따라 돌격했다. 그 능력을 대체로 ‘리더십’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 또한 마음 속으로는 이미 글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설진운은 너무도 찬란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소년의 눈빛 속 불꽃이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번져나갔다.
푸른빛이었다.
보통 그걸 ‘희망’이라고 부른다.
또한,
“밀어붙여요! 재생할 틈도 주지 마!”
어깨에 지고 있는 게 너무 무거워서 깔려 죽을 것 같은데,
“됐어! 다 됐어! 조금만 더!”
차마 그것 때문에 넘어지지 못하고 꾸역꾸역 기어가서,
“여기서...! 여기서 막아냅니다!”
안 될 거 알면서도 대가리부터 들이박는 또라이 새끼를.
“살아서 돌아갑시다!”
세상은 ‘영웅’이라 불렀다.
그리고,
“......야, 씨팔.”
세상에 그런 사람은 혼자가 아니었다.
“상황 재밌게 돌아가네.”
외팔이 서양인 하나가 담배 하나 꼬나물고 저벅저벅 걸어왔다.
“예전에, 동대문에 소드마스터 고딩이 하나 있다는 소문을 들었었는데. 너였냐?”
“......누구세요?”
“얘들아. 오길 잘했다. 그치?”
25인의 헌터가 데이비드 김의 뒤를 따랐다.
“귀 좋은 놈, 아까 쟤네 뭐라고 하던?”
“하늘에 저거 잡으면 된대요.”
“데이비드 김 저 미친 새끼... 100원짜리 앞면 나왔다고 서울을 들어오냐.”
“팀장님도 따라왔잖아요.”
“닥쳐.”
동전 하나로 목숨 하나 초개처럼 내던지는 멍청이들.
죽어도 같이 죽는다고 허허실실 웃으며 사지로 향할 수 있는 호구들.
가족들 모두 잃고 원한만 남은 외골수들.
돈보다 괴수잡는 게 좋다고 남은 바보들.
남들이 기겁할 짓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이들.
그게 바로 초인超人이었고.
“야, 니들 저거 잡을 계획은 있냐?”
지금이 바로 영웅들의 시대였다.
“베서.”
“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