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 - 짐을 짊어진 이들 (6)
소중한 건 잃고 나서야 귀하다 느끼고, 실수는 일어나고 나서야 잘못됐다 느낀다.
변소정은 팔다리가 청테이프로 묶인 채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여도연은 조심스레 어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를 가지고서, 그렇게 일생동안 진절머리 날 정도로 ‘있는 척’에 집착하던 변소정 변호사는, 게걸스럽게 딸의 손가락을 콱 물어뜯었다.
어찌나 세게 물어뜯었는지 턱 근육이 벌벌 떨린다. 그러나 오히려 손가락이 강철처럼 단단했다. 까드득.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여도연은 울먹이며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물지, 마.”
“크륵! 크르르륵...!”
“물지...! 물지 말라고...! 이빨 다치잖아...!”
여도연은 그저 다 원망스러웠다.
침을 질질 흘리며 제 손을 물어뜯는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의 검게 물든 눈동자도.
옆에서 바닥을 기며 으르렁거리는 그녀의 아버지도,
어머니가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지만 상처 하나 나지 않는 자신의 손가락도.
“아, 아으으...!”
뭇내 한스러워서 여도연은 비참하게 비명질렀다.
“흐아악 ! 아아아악 !”
한참 머리를 쥐어뜯던 그때,
“......누나.”
남양주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설진운이 조심스레 여도연을 불렀다. 여도연은 반쯤 넋나간 눈빛으로 소년을 돌아보았다.
“......마지막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 하실래요?”
* * *
한승문 일행이 막 흑산양을 퇴치했을 적.
“......디금 뭐라 그러셨소?”
남양주 캠프는 크게 3가지 세력으로 분류됐다.
“제가 동대문 캠프 꾸리던 시절에 만난 분이 계세요. 우리랑 같이 탈출하자 그래도 연구할 게 남았다며 서울에 남으셨던 분인데......”
“핵심만 말하시오.”
“괴수화한 사람을 돌려놓는 걸 봤어요.”
“......뭐요?”
“감염자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등학생 검사劍士, 설진운을 필두로 한 서울 탈출자 모임.
“그래서 어이 하겠다는 거요?”
“갈 건데요.”
“간신히 무리가 수습된 형국이오! 이 와듕에 서울로 도로 들어간다는 건 절대로 아이 될 일이라고 보오!”
순간이동 능력자, 리철진을 필두로 한 북한 탈북자 모임.
“......미안한데, 난 간다.”
그리고 혼자 ‘세력’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여도연.
“......같이 가달라고는 말 안 할게. 부모님만 좀 지켜줘. 어디 지하실에 가둬놓든, 뭘 하든-”
“그건 당연한 소리디. 문뎨는 동지들이 살아 돌아오디 않을 것 같아 그러오.”
“도연이 누나도 그렇고, 저희들도 그렇고, 잃은 사람이 좀 많아서...”
설진운이 머리를 긁적이며 확답했다.
“갈 건데요.”
리철진이 설진운과 여도연에게 호통쳤다.
“서울 가운데는 디금 아수라장이오! 내래 쓰는 축지법도 고저 함께 쓸라며이 한 사람 뿐이 아니 되는데. 도통 서울까정 어이 가실 심산이시오!”
설진운이 답했다.
“걸어서요.”
*
설진운은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게이트가 열리기 전까지는.
그는 최초 각성자 중 하나였고, 학교에서 가장 먼저 각성하는 바람에 교장을 제치고(정확히는 교장의 사망으로 인해) 수백명의 인원을 통솔했다.
반년동안 수백명은 수십명으로 줄어들었지만, 중요한 건, 설진운이 서울 한복판에서 반년동안 생존하면서 수십명이나 살렸다는 것이었다. 말 지지리도 안 듣는 학생들과, 학생에게 반발감을 가진 선생들을 데리고 말이다.
그래서 설진운은 이제 막 20살이 된 사람치고는 사람을 참 많이 상대했다.
물리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그러나, 게이트 열리고 한 달쯤 되었을 때 만난 이 양반은, 설진운이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기괴한 사람이었다.
물리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설진운이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또라이같았다.
“이거 또라이 새끼들이네!”
하얀 가운을 걸친 사람이 히죽 웃으며 오른쪽 뺨에 달린 입을 벌렁거렸다.
뱀같은 혓바닥이 낼름 쇄골까지 내려갔다 도로 들어갔다.
“아하학...! 야! 설진운이! 아저씨가 임마, 예전에 탈출한 실험체 하나 사람으로 돌려놨다고, 뭔, 생판 처음보는 좀비까지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냐?”
“네.”
“잘 아네. 새끼. 뉴런이 좀 싱싱해?”
그는 차재균 자살 뉴스를 듣고 서울로 도망친 사람이었다. 즉, 차재균이 죽었다는 사실에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한 사람이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생체실험에 참여한 연구원이었다.
이름은 도서준 이었으나, 하필 석사도 학사도 아닌 박사였기 때문에 다들 도박사라고 불렀다.
“옛다. 백신.”
따라서 역병종양의 치료법 또한 알고 있었다. 여도연은 멍하니 손 위에 올려진 분무기 형태의 백신을 쳐다보았다.
“......”
“아가씨, 왜, 불만있어?”
“......”
마지막 남은 희망을 가지고 안 될 걸 알면서도 걸어왔는데 45초도 안 돼서 사건이 해결되니 어안이 벙벙한 심정이라 말이 없던 것이었으나, 여도연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농담도 못 하나? 뭘 그리 째려봐?”
“......감사합니다.”
“어우, 씨, 예절은 바르네. 유어 웰컴 인마.”
“......”
“내가 그 뭐냐, 내 몸땡이 가지고 장난치다 주둥이가 뺨따구에 달려서 말이 많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안면근육 안 움직이면 신경이 자꾸 눌려서 머리가 많이 아야 해요. 내가 참 슬프게도 혼자 있어도 아가리를 털으면서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고. 그러니까 거슬린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지 말아줄래?”
“......네.”
“어우 씨 너 왜 눈깔을 그렇게 떠? 야! 진운이! 이 아가씨 데리고 언능 집에 돌아가! 니네 친구들도 데리고!”
설진운이 문득 물었다.
“......아저씨, 서울 탈출 안 해요?”
“내가 왜 서울을 나가? 이미 반쯤 괴수인데. 그리고 또 내가 죄가 좀 많아서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도 좀 그래요 임마. 그래도 나 공무원이었다? 알아? 나 뒤 봐주던 양반이 뒈져서 문제지. 아직 살아있으려나? 혹시 장 뭐시기 과장이라고 알아? 그래. 니가 설마 국정원을 알겠냐. 아무튼 서울 안 나가.”
“연구 아직 덜 끝나서 그래요?”
“아니? 연구는 진작 끝났지.”
여도연이 가볍게 물었다.
“무슨 연구였는데요?”
그 말이 화근이었다.
“게이트 닫는 법.”
*
“보면 각성자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안에 존나 커다란 새끼가 하나 있는데. 나는 여왕이라고 불러. 생긴 건 게이트마다 제각각이기는 한데. 아무튼 그 새끼가 괴수를 낳아요. 정확히는 괴수의 원형이 되는 살덩어리를 낳아. 그 새끼만 잡아 조지면 게이트를 닫을 수 있다 이 말이야.”
그들은 근처에 있던 소형 게이트로 실험했다.
“......저거 건물 아니에요?”
“살덩어리로 된 건물같아 보여도 말이지? 저거 자체가 커다란 생물이야. 화염병 던지니까 네 발로 벌떡 일어나서 도망치더라고.”
“직접 해봤어요?”
“해봤으니까 알겠지?”
“화염병은 어떻게 들고 오셨는데요?”
“식도에 넣어서.”
“......”
“으에엑. 이거 봐라. 나 상판떼기 갈아엎은 이후로 입에 팔꿈치까지 넣을 수 있다?”
설진운이 여왕괴수를 잘근잘근 썰었고, 여도연이 다져버렸으며, 설진운 패거리가 온갖 공격을 쏟아 부었다.
끊임없이 재생하는 바람에 몇 시간이 소요된 일이었지만, 설진운이 칼 끝으로 여왕괴수의 마석을 흡수하는 기염을 토했고, 도박사가 자신의 발명품을 수류탄처럼 허공에 던져넣으니,
“자, 봐라. 요래요래 해서. 게이트 안쪽 공간에 마석반응이 없어지거든? 여기가 마력으로 유지되는 공간이라 핵심 축이 무조건 필요한데, 그러니 자동으로 핵을 만들기 위해 마석이 허공에서 생성되고, 그거 중심으로 또 여왕괴수가 또 나온단 말야. 근데, 여기 축에다가 가짜로 만든 미끼를 하나 던져놓으면, 이게 또 불순물 취급을 받아요. 그니까 마석생성에 가라치는 꼬라지가 되는 바람에 좌표축에 빵꾸가 난다고. 그러면 한쪽이 일그러지겠지? 그냥 막 공간 좌표가 어그러진다? 자연스럽게 공간이 망가지면 내부가 갈갈이되니까, 양쪽을 연결하는 통로의 인풋과 아웃풋 좌표가 삐꾸가 나고, 그러면 당연히.....”
게이트가 사라졌다.
“짠!”
*
“그러니까, 결국 게이트 너머에 있는 건 개별 여왕괴수의 집이고. 여왕이 자식새끼 낳다가 집이 꽉 차면 문으로 내보내는 게 괴수 튀어나오는 거고. 집구석이 좁아 터져가지고 에라이 씨팔 이놈에 집구석 나가야겠다 싶어서 애새끼들 줄줄이 튀어나오는 게 게이트 폭주라고.”
도박사는 볼에 달린 입을 크게 벌려 햇반과 스팸을 집어넣었다.
“위장 속에서 비비니까 개꿀맛이네. 암튼, 여왕괴수 안 뒤지면 게이트에서 괴수는 무한정 기어나오고. 그거 냅두다 보면 주기적으로 게이트 폭주가 발생하는겨.”
“......”
“흐음. 게이트 안쪽 동네는 나도 잘 모르겄어야. 걔네들도 어쨌든 개빡대가리 짐승 밥버러지 새끼들처럼 보여도 차원이동 기술 가지고 있는 거니까. 뭔가 더 있지 않을까? 아니면 별 거 없을 수도 있고!”
입을 안 움직이면 신경이 눌려서 머리가 아프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도박사는 설진운과 여도연이 떠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혓바닥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게이트 연구나 더 할 테니까 잘들 돌아가셔. 요즘 몸이 점점 괴수 세포로 잠식되는 게 느껴지는 것 같기는 한데. 건강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고! 서울에 있는 초대형 게이트가 슬슬 폭주할 기미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연구할 건 많아요!”
질린 표정으로 도박사의 연구실을 빠져나가던 설진운이 우뚝 굳어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 방금 뭐라고 그랬어요?”
설진운은 게이트 사태 직후 반년동안 캠프를 이끌었다.
물론 초능력자들만 데리고서 서울을 탈출하는 건 쉬웠지만, 그가 동대문 캠프를 지켜냈던 건 민간인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설진운이 초능력자들만 데리고 남양주 방향으로 탈출했던 건, 서울 중앙에서부터 미칠 듯이 밀려드는 괴수들 때문이었다.
서울 포위망이 붕괴했을 때였다.
지킬 사람이 없어진 그들은 망설임없이 탈출을 감행했다.
즉, 그들이 여기 있는 게 바로 그 의정부 사태 때의 서울 게이트 폭주 때문이었기에.
그리고 서울 게이트 폭주로 인해 반년간 지켜오던 민간인들을 모두 잃어버렸기에.
그 민간인들이 바로 생사고락을 함께한 선생님과 친구들이었기에.
“으응?”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설진운은 도박사의 말을 흘려넘길 수 없었다.
원래 성격이 오지랖이 조금 심한 탓이기도 했다.
“어? 연구할 게 많이 남았다는 거? 아니면 서울 게이트 폭주가 코앞이라는 거? 아니면 내가 점점 괴수로 변하고 있다는 거?”
“두번째 거요.”
“아아. 그, 뭐냐. 내가 서울게이트에서 괴수 튀어나오는 걸 주기적으로 관찰을 했어요. 근데 이번에 의정부에 흑산양 튀어나온 이후로. 시간당 괴수 출현량이 조금씩 올라가더니, 요 전번에 폭주했을 때 이후로는 그래프가 떡상을 했드라고. 내 생각에는 여왕괴수가 한 단계 진화한 것 같아.”
“......뭐요?”
“으음. 내 이론상으로는 게이트 속 공간이 더 확장하지는 않어. 쥐좆만한 게이트로 충분히 실험해본 거니까 틀리지는 않았을 거야. 근데 괴수 크기도 커지고, 빈도도 더 잦아져. 근데 예상 누적량이 내 공식대로 계산한 공간 포화치에 가까워진단 말이-”
“그게 대체 뭔 소리에요?”
“서울 게이트 조만간 또 폭주한다고. 한 2주 쯤 뒤에? 아니아니! 지금까지 그거는 폭주라고 부를만한 게 아니지!”
“......”
“으음. 내 이론이 맞다면, 괴수 한 마리가 5 제곱미터 씩 차지한다 쳐도, 한반도 두 개랑 반의 반 정도가 괴수로 가득 찰만한 분량이 터져나올 예정이야.”
“......그, 뭔, 아니, 그, 확실합니까?”
“과학자의 이론에 정답은 없어.”
“......”
“근데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이론 중에 틀린 것도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