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67화 (67/296)

EP 12 - 짐을 짊어진 이들 (5)

충청 방어선의 설계자이자, 원옥분에게 줄을 대어 윗대가리를 전부 회쳐버린 실리주의자.

김두식 사령관은 절절히 생각했다.

이 나라의 국민들은 참으로 가여운 사람들이라고.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라는 게 고루한 말이라는 건 알아! 그래도 사람 먼저 살려야지!”

반년간의 평화에 취해 국방과 권력을 맞바꾼 국방부 장관은 총알받이가 필요했다.

“왜 우리 목숨을 맡겨놓기라도 하신 것처럼 말씀하시죠?”

“홍선아 사장...!”

“본사 헌터들의 파견협약에는 분명히 거부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웅은 더 이상 영웅이 되기를 거부했다.

허나.

“80만이야! 80만 명!”

영웅이든 악당이든 상관 없었다. 장관은 영웅이 아니라 총알받이가 필요했던 거였으니까.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모두가 귀중한 생명이란 말일세! 우리가 이렇게 떠드는 동안에도 괴수들이...!”

이기주의자가 박애주의자로 둔갑하고, 영웅마저도 세상을 저버렸기에.

이理가 아닌 이利만이 존재하고. 의義가 지고 의疑만 남은 세상이기에.

이 나라의 국민은 참으로 불쌍한-

“한국을 구할 방법이 있습니다!”

* * *

‘젠장......’

유재경 장관은 아직 권력에 적응이 덜 된 대통령 계승서열의 3인자였다. 아니, 국무총리가 공석이니 엄밀히 따지면 2인자였다.

어쨌든 그의 마인드는 아직 겸손한 고공단 ‘가’급 1급 공무원에 불과했기에,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지금 이 자리가 아직도 비현실적이었다.

약 26명에 달하는 이들의 화상통신.

정치가, 장관, 기업가, 관료, 군인들이 주요 채널에서 열띤 토의를 이어갔다. 토론에서 나온 결과는 즉각적으로 현장에 명령되었다.

천금순 사장이 외국에서 빌려온 컨테이너선들이 행안부 차관을 거쳐 해경청장의 해양관제로 들어가고, 즉각 유현종 사단장 라인에 보고되어 7만 명의 피난민이 다른 항구로 이송되었다.

미국을 상대로 땡깡부려 미사일을 받아낸 외교부의 성과가, 곧장 한미연합사에 보고되어 수도권의 주요  괴수 밀집구역에 폭격이 감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재계 2위 SG 컴퍼니 회장의 사망은, 당사當社 부회장과 금융위원장과의 이면계약이 체결되며 어둠 속에 묻혔다.

권한과 담당을 초월한 연계가 이루어지는 수많은 지하벙커.

충무시설忠武施設.

이곳이 대한민국의 두뇌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국가의 중추신경은 한 사람의 발언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원옥분 권한대행이 귀를 못 믿겠다는 듯 되물었다.

“......한승문 의원, 지금 뭐라 그랬습니까?”

“괴수를 북쪽으로 싹 밀어버리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절름발이 의원이 마이크에 대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나이가 40세 이상이었다면 대통령이 됐을 게 확실한 인물이었기에 아무도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젊은 정치인은 커다란 화면 앞에 서서, 꼿꼿하게 고개를 치들었다.

“북부 국군이 궤멸 위협에 빠졌고. 수도권 남부에 고립된 80만 국민이 학살당하기 직전입니다. 게다가 이대로 괴수가 무한정 쏟아지다가 충청 방어선이 무너지면 그날로 나라가 씹창이-”

“짧게 말하세요.”

“이게 다 괴수가 사방으로 퍼져서 그런 거 아닙니까?”

“그렇죠.”

“괴수의 방향을 조절하지요. 충청 방어선의 반대 방향, 북쪽으로 밀어버립시다.”

원옥분 권한대행의 표정에 순간이지만 얼빠진 기색이 스쳤다.

유재경 장관은 속으로 ‘저 새끼 또 지랄’이라는 감상을 품으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진중해보였다.

옆에서 주욱 입 다물고 눈치만 살피던 양판석 의원이 진땀을 빼며 귓속말로 한승문을 만류했지만, 저 미친놈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미친놈은 그럴듯한 표정으로 미친 소리를 지껄였다. 적어도 유재경 장관이 보기에는 그랬다.

“괴수는 고작 1km밖에 안 되는 구멍에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산을 퍼다가 벽을 만들든, 괴수에게 겁을 줘서 쫓아내든, 커다란 참호를 만들어버리든, 네이팜으로 불을 지르든, 괴수의 확산 방향을 조절할 수 있는 건 지금 뿐입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한승문 의원이 왜 안되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왜 안 됩니까?”

“아니 지금 장난-”

“제가 감지윤 양과 함께 서울로 가겠습니다.”

국제사회가 인정한 전략병기 급 초능력자.

2시간동안 심학산 흙을 퍼다 한강 상류를 막아버린 초능력자 감지윤,

의 능력이 두배가 된다면 어떤 결과를 일으킬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모두의 머리에 단 한 마디가 스쳤다.

‘혹시.’

모두가 순간 혹한 표정으로 한승문을 바라보고, 좌중의 입에서 감탄이 새어나오기도 전에.

“미쳤습니까!?”

오직 단 한 사람,

한참 필사의 후퇴작전을 벌이고 있을 북부 국군의 대표로 나온 유현종 사단장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일어났다.

“북부에는 방어선이 없다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그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악을 질렀다.

“3시간! 아니, 이제는 2시간 40분 후에 괴수 도달하면 다 뒈지게 생겼는데, 무, 뭐요!? 괴수를 싹 다 북쪽으로 밀어!?”

유현종 사단장이 발악했다.

“하, 한승문 의원님이 그런 사람인줄은 몰랐습니다! 어, 어떻게 그런...!”

“유현종 소장님.”

“우리보고 다 죽으란 소립니까!?”

한승문이 평온하게 미소지었다.

“방어선이 없어서 3시간 내로 도망 못치면 다 죽는다는 소리 아닙니까?”

“알면서 그럽니까!?”

“......으음.”

사람좋게 미소지은 한승문은 절뚝이며 걸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턱, 하고 한승문이 유현종의 어깨 견장에 손을 올리자,

탁! 하고 유현종이 얼빠진 얼굴로 한승문의 손을 쳐냈다.

스킨십을 거절당한 한승문이 미소지었다.

“이게 다 유 소장님을 믿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왜 갑자기 친한 척입니까?”

“3시간 내로 도망 못치면 다 죽는 게임에, 괴수 숫자는 관계가 없죠.”

타임어택이잖아요.

한승문은 옅게 눈웃음치며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유현종 사단장님이 의정부 후퇴작전을 지휘하시면서 보여주셨던 그 리더십을 저는 아직-”

“개, 개소리 집어치세요!”

“저는 유소장님의 지휘력을, 아니. 유현종이라는 불세출의 야전사령관을 믿습니다.”

유현종과 실랑이하던 한승문이 뒤돌아 허공에 지팡이를 휘적이며 말했다. 원옥분에게 말하려면 모니터와 마이크에 대고 말해야 했으나,

그는 지금 좌중을 설득하고 있었다.

“강원도에 600만. 수도권 남부에 80만. 충청 방어선 이남에 3500만 국민이 있습니다. 괴수를 북쪽으로 밉시다. 공군과 함께, 감지윤 양과 함께, 제가 서울로 가겠습니다.”

“하, 한승문 의...! 야! 야 임마!”

유현종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승문을 잡으려 들었지만.

“여러분, 생각해보십쇼. 괴수는 국적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괴수들이 경기도 북부로 간다면, 굳이 태백산맥을 넘어 강원도로 가겠습니까?”

“스톱! 스토오오옵! 이 어린놈에 새끼가 지금...!”

이미 늦었다.

한승문이 주먹 쥔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괴수를 북한으로 밀어버리자! 이 말입니다!”

유현종이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았다.

그를 지켜보던 유재경 장관도 크게 다른 감상은 아니었다.

그의 56년 인생에 저런 미친새끼는 처음이었다.

자기 딸이랑 동갑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유재경 기획재정부 장관이 평생토록 한승문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이건 선동이 아니다.

철저하게 계산된 정치공학政治工學에 가까웠다.

사실 둘 다 비슷한 뜻이긴 하다.

허나, 선동은 감정에 호도하는 것이고, 정치는 이해관계를 계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회의원에게 그건 일상이었다.

주한미군 사령관이 통역사를 통해 말했다.

그는 후퇴작전의 총책임자인 유현종에게 7함대의 공군지원을 약속했다. 즉, 이거 받고 까라는대로 까라는 소리다. 평택에 주둔하는 미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판단이었다. 김두식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경기도 북부를 완전히 버린다면, 괴수는 강원도가 아니라 북한 방향으로 퍼져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에게는 충청 방어선의 수호가 급선무였다. 이에 침묵으로 동의했다.

국방부 장관에게 작전의 성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성공한다면 책임이 덜어지는 것이었고, 실패한다면 특급 욕받이가 생기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내각 관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한 걸음 물러서 간접적으로 지지했다.

유현종은 마지막으로 발악했다.

“부, 북한과 전쟁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핵폭탄이라도 날아온다면 책임지실 겁니까!?”

허나, 애석하게도.

원옥분이 대선 시작하기 전에 북한을 조지려고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세상에 고작 열 명도 되지 않았지만,

“합시다.”

“대, 대행님...!?”

한승문은 그 중 한 명이자, 핵심 관계자였다.

“......”

그리고 이게 다 남동생이 누나 살리려고 하는 짓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양판석 뿐이었다.

*

한승문과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 뭐냐. 1km짜리 구멍에서 쏟아져 나온다던데. 그것만 어떻게 하면 해결되는 거 아닌가?”

“입구 막자고요?”

“Yep.”

데이비드 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꼬았다.

그는 인천의 으슥한 굴다리 밑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음침한 얼굴의 정찰팀장이 교복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괴수들 지금 이리로 몰려온다는데요.”

“어차피 여기 몬스터랜드 아니었나?”

“소형 게이트에서는 소형이 나오고. 1km짜리 게이트에서는 큰 게 나오겠죠?”

“그렇군.”

데이비드 김은 다 닳아버린 담배를 침과 함께 퉤 뱉었다. 이라크에서부터 이어져 온 몹쓸 습관이었다.

그는 좌중을 돌아보았다. 25인에 달하는, 아니.

이제는 25인밖에 남지 않은 길드 헌터들 전원이 모여 있었다.

홍선아가 떠나고 새롭게 2팀장이 된 김한빛,

의 사망으로 인해 새로 2팀장이 된 박정구가 구수하게 내뱉었다.

“시방 다 조지면 되는 거 아녀?”

“아니,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아저씨.”

“논둑 터져서 물새면 그거만 틀어막으면 되는 기지. 뭣이 중헌디.”

지원 1팀 서정아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우리가 그 앞에서 틀어막는다고 게이트가 닫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뭐.”

“언제 닫힐지도 모르는데 25명이서 1km를 커버하자는 건, 그냥 죽을 때까지 괴수 잡다가 죽자는-”

“니이는...! 야, 이, 씨뻘놈아. 진작 홍선아 안 따라가고 뭐 해쓰어? 으이!? 담도 없는 게 허구헌날 징징대면서 빌빌거려 싸!?”

해석 : 젊은놈이 위험한 데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가라.

“아저씨! 구박 좀 하지 마요! 성질 뻗쳐서 진짜!”

“미안!”

서정아의 울상에 바닥이 얼어버리자, 박정구는 잽싸게 사과하고 뒤로 물러났다.

공격조 에이스이자 압구정 원년멤버인 정복례 여사가 쇠파이프로 어깨를 두들기며 시큰둥하게 툭 내뱉었다.

“여기 목숨 아까운 양반들 있나?”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피식 웃었다.

“나는 우리 똥강아지 괴수밥 된 이후로 잠을 못 자는데. 괴수 잡으러 가자는 데 누가 불만이에요? 난 아직도 기억나. 그, 목동 파리공원에서 손주 손 꼭 붙잡고 도망쳤는데, 공원 입구 나서고 보니까 글쎄 손목만 남아있는-”

음침한 인상의 정찰팀장이 신경질적으로 말을 끊었다.

“아, 씨, 할머니. 그거 대체 몇 번째에요? 지겹다 이제.”

“개쌔끼......”

“아니, 슬픈 건 알겠는데. 여기서 괴수한테 가족 안 잃은 사람이 있냐고요. 나도 우리 엄마아빠 물려가는 거 지켜본 사람이에요.”

교복 차림의 정찰팀장이 음침한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좌중을 흩었다.

“여기서 부양가족 1인 이상 남아있는 사람 손 들어봐요. 이거 봐. 없잖아. 복례 할머니 마음도 이해는 하는데. 굳이 서울 들어가는 건 다른 문제라니-”

소총을 맨 여중생이 조심스레 좌중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저... 저는 아직 엄마 살아있는데요!”

“닥쳐. 나도 동생 하나 살았어.”

군필여중생은 시무룩하게 좌중 속으로 도로 들어갔다. 정찰팀장이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교복 넥타이를 매만졌다.

“아무튼. 최선을 다해 괴수를 잡느냐랑, 목숨을 바쳐 괴수를 잡느냐는, 다른 문제라니까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가족 죄다 잃었다고 괴수 잡는다는 핑계로 자살하지는 말자는 거에요. 나 할머니 죽으면 많이 슬플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정찰팀장이 말하는 도중에 정복례 여사가 쇠파이프를 으스러뜨렸지만, 마지막 말에 찡했는지 눈시울을 붉히며 기세를 꺾었다.

지켜보던 김춘식이 히죽 웃었다.

“여사님, 또 울어? 갱년기야?”

“노년기, 이 새끼야...”

“내가 보기엔 갱년기야. 아무튼. 서울 가고 싶은 사람 손 들어봐.”

대충 절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둘, 넷, 여섯, 여덟, 열, 둘, 넷, 다섯... 가기 싫은 사람 손 들어봐.”

나머지 절반이 손을 들었다.

데이비드 김은 잠시 고민하다가, 안주머니에서 100원을 꺼냈다.

그는 히죽 웃으며 동전을 집어 들고서 이리저리 흔들어 보였다.

“자, 앞면 나오면 우리 서울 가는 겁니-”

- 크아아아아아아 !

벽력霹靂같은 괴성이 천지에 진동했다.

콘크리트 조각이 굴다리 밑으로 후두둑 쏟아져내렸다.

지진에 비견되는 충격이었다.

“......뭐여, 씨벌.”

“야, 야, 다리 위로 가봅시다.”

“예엠병, 조옺됐네......”

“불길한데요......”

헌터들이 다리 위로 올라가 서울의 상공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게이트에서, 무언가가 내려오고.

아니. 강제로 끌어내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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