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 - 짐을 짊어진 이들 (3)
안개 냄새가 나서,
옛날 생각이 났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이모부네 집 놀러갔을 때마다.
새벽에 어른들과 함께 집근처 방파제에 나가 낚싯대를 걸어놓고, 꾸벅꾸벅 졸다 눈을 뜨면 바다안개가 세상에 가득했다.
지금도 그렇다.
눈을 뜨니 호숫가에 하얀 구름이 그윽하다.
나는 폐부에 들어찬 물안개를 내쉬며 주변을 살폈다. 앞에는 낚싯대가 있고, 위에는 하늘이 있고, 옆에는 양판석이
“깼나?”
내게 말을 걸었다.
* * *
나는 익숙한 의자에 앉아 있다. 보좌관 시절 매번 들고 다니던 양판석의 낚시의자였다.
당황스런 나머지 이런저런 생각이 스쳤다.
먼저, 내가 왜 여기 있을까 하고 의문이 들었다. 여기는 천금순을 처음 만났던 양판석의 비밀 낚시터였다.
발치에 치인 소주병을 보니 어렴풋 기억이 났다. 나는 어젯밤 이곳에서 술을 먹었다. 양판석과 함께.
한 번 기억 속의 안개를 걷어내니 다음 기억을 찾아내는 건 쉬웠다. 잠시 심호흡을 하니 차가운 새벽안개가 밀려들어온다.
“......킁.”
콧물을 삼키자 양판석이 핀잔을 주었다.
“내 적당히 퍼마시라고 하지 않았나.”
“......저, 밖에서 잤습니까?”
“콧물 줄줄 흘리는 거 보면 모르나? 아직 날씨 안 풀렸다고 몇 번을 말했거늘...”
나는 여도연이 중학교 입학선물로 건네줬던 손수건을 꺼내 코밑을 닦아냈다. 살짝 민망해서 웃었다.
“양판석 의원님은 어디서...?”
양판석이 시큰둥하게 턱짓한 곳에 캠핑카가 있었다.
“나는 편히 주무셨으니 자네 몸 걱정이나 하게. 어젯밤에 그렇게 몸 아프다 징징거려 놓고서리.....”
그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고, 나는 순식간에 밀려드는 기억의 파도에 휘말렸다.
첫째.
어젯밤 유리관 속 이모와 이모부를 보다 문득 울적해져 베란다로 나왔다. 밤하늘 구름 속 달을 보며 청승맞게 훌쩍이다 담배피러 나온 양판석에게 딱 걸렸다.
둘째.
방으로 처들어온 그에게 수북히 놓여있는 항우울제&수면제 세트를 딱 걸렸다. 병원에서 살고 있는 점을 이용해 처방도 없이 주워다 처먹던 것들이었다.
셋째.
양판석은 크게 호통까지 치며 나를 나무랐다. 심지어 그가 집어던진 약통에 얻어맞기도 했다. 텅 비어있던 것들이라 아프지는 않았다.
넷째.
양판석이 반쯤 약에 취해있던 나를 데리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손수 캠핑카를 몰고 여기 낚시터로 나를 데려왔다.
다섯째.
우리는 소주를 깠고, 나는 술에 취해 별별 소리를 다 털어놓았다. 양판석이 정치판에서 수십년간 쌓아온 알코올 취조법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 털어놨다.
일찍 죽기 싫다던가.
누나 보고 싶다던가.
정치하기 싫다던가.
“......”
곱씹을수록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를 숙이니 콧물이 흘러내려서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분명 얼굴이 새빨개졌을 것이었다.
“세상 힘들지?”
양판석은 무심히 중얼거렸다.
“숨 쉴 때마다 머리 아프고, 의사도 별 말이 없는데, 집구석 돌아오면 잠도 안 와서 약이나 퍼먹을 게야.”
정곡이었다.
양판석은 나지막히 읊조렸다.
“항우울제라는 게, 의사가 잠복기까지 조정해서 세밀하게다가 여러 약의 조화를 이루어야 효과가 있는 건데. 그렇게 마구잡이로 퍼먹으면 크게 탈나요 이 사람아.”
“......”
“마오이를 씨리보다 먼저 퍼먹으니까 두통이 생기고, 티씨에이가 수면제인것도 모르고 처먹었으니 피곤하지.”
양판석이 진절머리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나는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그는 항우울제에 대해 줄줄 꿰고 있었다. 혹시 양판석도 이런 경험이 있나 싶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가 없어 입을 열지 못하고 입술만 우물거렸다.
허나 양판석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서 내 의중에 대답했다.
“막내.”
소름이 돋았다.
당황스런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양판석의 막내아들은 양판석 의원실의 철저한 금기였다. 그와 8년을 함께했다던 수석 보좌관도 막내아들에 관련된 언급만 나오면 입을 다물었었다.
수십년 전에 자살한 사람이었으니까.
왜 자살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양판석은 자기 자식들에게 부모 취급을 못 받았다.
그저, 자살한 막내아들과 관계가 있으려니 하고 짐작만 할 뿐. 굳이 알려고 든 적은 없었다. 그저 옆에 붙어다니며 은연중에 알게 된 것들이었을 뿐이다.
즉, 그가 막내아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거론한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양판석은 잠시 무언가 말하려다, 끝내 말을 삼키고서 중얼거렸다. 도박판에서 인생을 팔아버린 사람이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듯한 말투였다.
“......몸에 안 좋아.”
“......예.”
우리는 한참동안 호숫가에 쪼그려앉아 침묵을 지켰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기에 세상은 어둑한 푸른색이다.
양판석이 낚싯대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툭 내뱉었다,
“자네. 지금 헛돌고 있어.”
“......예?”
“내란죄 때문에 법정 섰을 때. 내가 대법관들 안 움직였으면, 자네 정치인생 끝났던 거 아니었나?”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자네 원래 계획이었지? 나라 정상으로 돌려놓고서 손 털고 뒷방가는 거.”
“......”
“어차피 얼마 살지도 못할 거. 기깔나게 애국 한 번 때리고 정치판 나가겠다는 거 아니었나?”
양판석은 내 심중을 비수처럼 쿡쿡 찔렀다. 어조는 평이했으나 언뜻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네 의욕은 거기가 끝이었던 게야. 지금도 별 생각 없지 않나. 김조인이랑 청중엽이랑 국민당 반으로 갈라 처먹는 거 보고도 손가락만 빨고 있으니.”
그는 거세게 항의했고, 나도 곱게 답하지만은 않았다.
“그럼 뭘 어쩝니까. 이제와서 헌법 뜯어고쳐서 대선이라도 나갈까요?”
“가능성 없는 소리는 아니지. 자네는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고 있는 거야.”
양판석은 생판 남일이라는 듯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늙은이처럼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닌가.”
“......뭐, 제가 양 의원님보다 일찍 늙어죽을 신세라서.”
“걸어다니는 시체군.”
“아니, 그럼 저보고 뭐 어쩌라는 겁니까?”
쯧쯔. 양판석은 혀를 차며 나를 째려봤다.
“한참 전에 말했잖나. 살라고. 우리한테는 그것도 벅차다고.”
정확하게 지금 이 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렴풋 떠올랐으나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뭐, 이렇게 말하지만 자네 하는 거 보고 나도 생각이 조금 바뀌긴 했어.”
방년 62세의 노인이 피식 웃었다.
“살려고 살아봤자 대체 무슨 소용이겠나.”
그는 인자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민주, 아니. 국방당에 남을 거야.”
내가 있는 국민당으로 오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아직까지 탈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만은, 직접 들으니 살짝 섭섭했다.
하기야 탈당이라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양판석 본인부터가 민주당 인사들과 거미줄처럼 엮여있는 사람이었고, 그가 관리하는 시의원, 시장, 도의원, 원외위원장들만 한 트럭이 넘어갔다.
직접 봐서 안다. 양판석이 전라도 광주라는 지역과 얼마나 긴밀하게 엮여 있는지. 가끔 호남 맹주라는 표현도 심심찮게 등장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광주는 민주당 그 자체였으니까. 자연스레 민주당의 후신인 국방당에 합류하겠지. 라고 생각했다.
허나.
예상치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1년 뒤에는 국회의원 직을 사퇴할 걸세.”
“뭐요!?”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빙그레 웃었다.
“뭘 그리 놀라나?”
“아, 아니, 그...!”
“내년에 지방선거야 이 사람아.”
앙상한 노인은 떡두꺼비처럼 웃으며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전라남도 도지사에 도전할 걸세.”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리였다. 물론 일개 국회의원보다야 도지사가 훨씬 나았지만, 양판석은 ‘일개’ 국회의원이 결코 아니었다.
계파를 이끄는 보스였고, 집권여당 당대표 직전까지 가본 사람이다. 그가 국회에 남는다면 민주당계 의원들의 기둥뿌리가 될 수 있음은 분명했다.
“대체, 왜...?”
양판석은 묵묵히 호숫가를 바라보았다.
“영남은 부울경에 이미 인구가 포화됐고, 태백산맥 때문에 실제 사용 가능한 토지가 적네. 그에 반해 호남은 광주 빼고는 사실상 빈 땅이야. 대부분이 평지이기도 하고.”
구부정한 자세로 낚싯대를 잡은 양판석은 지정학地政學에 대해 논했다.
“경북과 충청권에 괴수 방어선이 깔린 지금, 가장 커다란 도都가 전남일세. 인구포화상태인 부울경과는 달리 피난민 수용에 대한 정치적 반발도 비교적 적고, 광주라는 거점도시를 둘러싸고 있기도 해. 무엇보다, 곧 국가전략사업으로 채택될 농업이 중심인 곳이기도 하지.”
물안개 속 호숫가에서,
“괴수에 대한 공포는 국민을 남쪽으로 밀어넣을 게야.”
초로의 노인이 미래를 내다보았다.
“4천만 국민, 그 중 천만 이상이 전라남도에 모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네.”
그제서야 깨달았다.
노회한 정객政客은 호수 따위가 아니라, 호수에 비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구는 곧 표야.”
정치인이 말했다.
“인구는 산업이 되고, 산업은 곧 성과가 되네. 전라남도의 폭발적인 발전이 도지사의 성과로 포장될 수 있다면.”
낚시꾼이 말했다.
“내가, 국방당에 남아, 한승문 의원과 협력하는 온건파의 거두로 남는다면.
하여, 새로운 양당제에서 완벽한 중도를 표방할 수 있다면.
이에, 양당의 지지층을 끌어안을 수 있다면.”
잠룡潛龍이 말했다.
“4년 뒤 대통령은 누구겠나?”
*
[국민당의 지지율이 지금 80% 가량이어도. 나는 이번 총선이 5대 5로 끝나리라 예상하네. 만약 변수가 생긴다면 국민당이 우세를 점한 6대 4. 그 이상으로 기울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가만히 잠자리에 누워. 양판석이 남긴 말들을 천천히 곱씹었다.
[자네도 북한 쪽 공작에 관여한만큼 알겠지. 어차피 이번 대통령은 원옥분이야. 그래서 지금 국민당 대권주자 경쟁에 손을 놔버린 것 아닌가?]
머리가 복잡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네. 국민당의 당권을 잡게. 청중엽이랑 김조인이를 풀어두지 마. 결국 자네 목을 조를 인간들이야.]
오늘은 약이 필요 없었다.
[이미 서거한 유재광 전 대통령 쪽 사람들도 스멀스멀 기어나오고 있고. 낙선한 다음 집구석에 박혀있던 원외위원장들이 국방당에 기웃거리기 시작했어.
방심하지 말게. 낙선을 했다는 건 공천을 받아서 출마를 했다는 소리고. 즉, 그 지역에서 충분히 먹힐만한 경쟁력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소리야. 전직 국회의원만 근 200명이라고.
그 치들이 성공하는 방법은 국민당을 고꾸라뜨리는 건데. 그러면 누구를 가장 먼저 물고 늘어지겠나?]
양판석은 나를 도발했다.
[힘든 시절 다 지나갔는데. 퍼져버려서 헛돌고 있는 꼴을 도저히 못 봐주겠어서 하는 말이네. 춘부장께서들도 차도가 있으시다고 하지 않았나. 도연이 그 처자도 어디가서 쉽게 죽을 사람도 아니고. 자네가 그렇게 약으로 하루하루 버티는 건 가족들도 바라지 않을 게야.]
그는 내게.
[......정 모르겠으면 나 청와대 들어가는 거나 돕게.]
60대 노인도 이렇게 사는데, 너는 왜 약이나 퍼먹으면서 그러고 있냐고 물어본 거다.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라고. 곧 죽는데.
시한부 인생의 딜레마다.
세상 뭐 같은데, 살 날도 얼마 안 남았지, 이리저리 치이고 구르기나 하지, 가족은 드러누웠지.
......개같은 세상 정리한다고 줄 그어봐야 파도 밀려오면 없어지고. 악당놈 때려잡아봐야 악당인지 아닌지 뒤늦게 헷갈리고, 어느새 내가 악당짓을 하고 앉았고.
만, 몇 가지는 명확했다.
나는 양판석과 대화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꺾였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길을 잃었다는 것도.
더 이상 내 인생에 열정이 없다는 것도.
나는 꿈이 아니라 관성과 의무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도.
근데.
노력도 노력 나름이고, 정의도 정의 나름이지, 쌔빠지게 고생해봤자 모래성인데 나보고 어쩌라는 소리인가.
......물론, 감지윤처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걔는 어려서 뭣 모르고 달려든 것 아닌가.
나는 그렇게 굳건한 초인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초등학생보다 못하다는 걸 시인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힘든 건 힘든거고 개같은 건 개같은 거지.
......다만. 양판석과 대화하고서.
나는 오랜만에 내일 할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삶, 숨만 쉬다가 가고 싶진 않았으니까.
호정이랑 일호한테 국회의원 출마할 준비하라고 말해주고, 피채원이랑 장원장 일자리도 새로 알아봐주고. 오랜만에 지윤이도-
ㅡ !
전화가 왔다.
벨소리를 들어보니 김두식이다.
“여보세-”
[서울 게이트가 폭주했습니다..]
“으에?”
[정확히는 폭주 비스무리한건데. 자세한 건 모릅니다. 저도 보고 받자마자 연락드리는거라.]
나는 얼빠진 반응을 내놓았고, 김두식은 침착하고 빠르게 또박또박 설명했다.
“뭔...?”
[아직 사태가 명확히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여의도에 거대괴수가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을 중심으로 대규모 웨이브가 시작되었고, 충청 방어선이 활성화되었지만, 명확한 전선이 구성되지 않은 북부가 그대로 위협에 노출된 상황입니다.
특히, 강원도 쪽에는 국군이 거의 배치되어 있지 않아, 서울에서 퍼져나간 괴수들이 강원도 북부와 경상북도 방면으로 퍼져나갈 가능성이 보입니다.
이에, 대규모 군사행동을 요하는 바, 긴급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지금쯤이면 병원 옥상에 헬기가 도착했을 겁니다. 빨리 오십쇼.]
머리가 하얘졌다. 나는 전화기를 어깨에 끼고서 넥타이를 졸라맸다.
[여의도 한복판에서 거대괴수를 소탕하고 있는 일련의 헌터 집단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게이트 폭주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여도연 씨도 거기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