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64화 (64/296)

EP 12 - 짐을 짊어진 이들 (2)

4월 첫째 주 수요일.

합동선거가 다가왔다.

수많은 자리가 다시 채워질 것이다. 국회의원 300명, 시장, 시의원, 그리고 대통령.

더 이상 나랏일이 지금처럼 밀실정치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고, 거대양당의 상호견제 속에서 행정부가 활성화될 것이다.

군부는 더 이상 야전사령관에게 의지하지 않을 것이고, 경제 또한 지지율 먹고 싶은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든 되겠지 뭐.

즉.

......이제 내가 다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 * *

전당대회는 말 그대로 당黨의 총회다.

보통은 당 지도부를 선출하고, 대선 직전에는 대선후보도 뽑는다.

당대표의 권한은 시기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보통 총선 직전 당대표가 공천권(국회의원을 어디에 출마시킬지 결정하는 권한)을 쥐고 있기 때문에 가장 강력했다.

4월 첫째 주 수요일에 합동보궐선거가 개시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늘 3월 3일에 뽑힌 당대표는 국민당에서 어지간한 건 다 해처먹을 수 있었다.

앞으로 10일동안 진행될 대선후보 경선에서 누굴 밀어준다던지, 전국에 출마시킬 국회의원들을 결정한다던지.

본래는 참 치열한 경쟁이 예상됐었다.

제주지사 청중엽, 경제관료 김조인, 서울부시장 우정환.

하지만 우정환이가 눈치없이 신나게 노래 틀어놓고 선거운동하다 맛이 가버리고, 지자체장이 선출직 당직을 맡을 수 없다는 법률 덕분에.

“김조인 전 의원께서 국민당의 첫 대표로 선출되셨습니다!”

김조인은 평화롭게 손을 흔들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는 5공 시절부터 경제 외길만 걸은 굳건한 테크노크라트였다.

현 기획재정부 유재경 장관이, 저 양반 재정경제부 장관하던 시절에 공무원시험 붙었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저 할아버지가 얼마나 고인 사람인지에 대해 짐작 가능했다.

- 와아아아아 !!

멍하니 딴생각하고 있다가 갑작스런 함성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단상으로 올라가던 김조인 대표가 딴 길로 새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국민당이 사실상 내 개인플레이로 모인 집단이었고, 강성强性으로 올라갈수록 한승문 팬클럽에 가깝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내 악수를 받아주지 않고 팔을 벌려 나를 껴안았다.

커다란 전광판에 우리가 포옹하는 게 띄워졌다.

이 할아버지랑 직접 만난 게 지금이 두 번째라는 걸 감안한다면 상당히 웃기는 짓거리였다.

*

4월 첫째 주가 선거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이 참혹한 시기에 권력놀음에 빠져 국민을 우롱했습니다! 한승문 의원의 규탄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대한민국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겁니다, 여러분!”

대선 후보등록이 선거일 24일 전,

의원 후보등록이 20일 전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대선후보 경선과 공천관리위원회 구성이 이루어져야 할 타이밍은 바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고, 혁신과 국방은 국민의 선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에! 국민당 대선후보를 선출하기 위해 경선을, 지금부터 실시하겠습니다!”

지금이었다.

김조인 대표는 나이답지 않은 쩌렁쩌렁한 고함으로 7일간의 대선후보 경선을 선포했다.

물론 요식행위였다. 후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1번. 제주도지사 청중엽.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땅, 새로운 행정수도의 도지사이자, 중국통 외교 전문가, 그리고 전경련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다.

기존 재벌들과 그들의 대기업 본사가 제주도로 이전했고, 다른 지자체장들과는 다르게, 제주도 자치경찰에 한해 대통령령에 준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게 제주도지사였기 때문이다.

오직 제주도만이 기초단체장을 선거가 아니라 도지사의 임명으로 뽑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도는 청중엽의 나와바리다.

심지어 이게 당대표 선거가 아니라 다르게 대선후보 경선이라서, 청중엽은 도지사 직을 유지하고서 경선에 참여할 수 있었다.

2번. 강원도 경제부지사 박성필.

강원도는 경제 조진 곳으로 유명한 지자체였고, 살면서 이 사람 이름은 오늘 처음 들어봤다.

3번. 자영업자 신수광.

마찬가지로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수도권 난민캠프 대표라더라. 시흥에서 마트하던 40대 아저씨였다.

“......”

후보들의 면면만 봐도 김조인과 청중엽 사이에 ‘모종의 합의’가 오갔음은 분명했다. 나는 대선후보를 할테니 너는 당대표를 해먹거라. 뭐, 그런 종류의 것 말이다.

물론 특수한 사태라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대로였다면 피튀기는 전쟁이 벌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내부총질, 언론폭로, 프레임 조성.

어떻게 지금의 상황이 성사되었을까.

당대표와 대선후보는 어느정도 ‘급’이 되는 사람이 해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는 그 정도 ‘급’이 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거물 정치인이 없다.

물론 시대가 영웅을 낳긴 했다.

충청 방어선의 김두식 사령관, 북부의 유현종 사단장, GS 그룹 천금순 사장, 조금 부끄럽지만 나까지.

사람들이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당장 지역을 막고 있는 사단장이나 PMC 길드장만 해도 그 지역에서는 영웅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 중에 정치인은 없었다. 나 빼고.

정치인의 고갈이다.

의원도 선수가 차야 뭘 해먹는데, 남아있는 국회의원이 4명이란다.

심지어 그 중 한 명은 병원에서 의식불명이고, 다른 한 명은 내가 터뜨린 녹취록 때문에 정치적 생명이 다한 상황이었다.

사실 지금 국회의원이 나랑 양판석 빼고 없었다

“공천관리위원장은, 정선국 교수께서 힘을 빌려주시기로 했습니다!”

정선국 교수의 표정이 썩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보통 같았으면 굴러다니는 원외위원장 하나 잡아다가 박거나, 경합지역에서 기탁금 더 내는 쪽을 박아주면 됐는데, 이번에는 진짜 첩첩산중이다.

새로운 사람을 찾아서 박아야 한다.

즉, 중앙정계에 뉴페이스들이 대거 등용될 것이다.

말 그대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

“형, 괜찮아요?”

전당대회가 끝나고 차에 오르자마자 양일호의 걱정 세례를 받았다.

괜찮다고 했다간 거짓말인 게 들킬 게 뻔했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이호정이 툭 내뱉었다.

“조금이 아닌 것 같던데요. 가만히 서 계셔도 비틀거리던 거 보니까."

"......"

"당분간 일정 조정할까요?"

"......그럴 수가 있겠냐. 총선이 코앞인데."

이호정과 이야기하고 있으니 양일호가 자연스레 엑셀을 밟았다. 차가 매끄럽게 움직이며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차는 병원으로 가는 중이다. 부모님이 입원중인 곳.

“......밤 좀 그만 새세요.”

“너같으면 푹 자겠니.”

“의원님 맨날 걸을 때 살짝 비틀거리는 거 알아요?”

“몰라.”

나는 침울하게 중얼거리며, ‘자리를 빛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근시일 내로 다시 뵈었으면 하네요. 번창하세요 ^^’ 라는 문자를 천금순에게 보냈다.

“......재계 5위한테 번창하라고 그러면 좀 웃기냐?”

“피식 웃을 것 같은데요. 고깃집 개업인사도 아니고.”

“이미 보냈다.”

그렇게 시덥잖은 소리로 마음을 달래며 나는 잠시 눈을 붙였다.

“......좀만 잔다.”

“네. 도착하면 깨울게요.”

삶이 참 고되다.

그, 뭐냐. 설명하려도 해봐도 말하는 게 입이 아플 정도로 기운이 없다. 어디서 누가 튀어나와 칼을 박을지도 모르겠고.

내가 길드를 둘로 쪼개버린 탓에 혹사에 시달리며 죽어나가고 있을 김춘식네 헌터들에게도 미안했고, 내가 뿌린 각성제 맞고 수명 깎이며 하루살이 인생 스타트한 사람들에게도 미안했다.

누가 튀어나와 뒤통수를 때릴까 불안했고, 당장 내일 아침에 기자들이 들이닥쳐 테러조작과 합당조작에 대해 물어볼까 불안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또 게이트가 열릴까 무서웠고, 지금 충청도 상공에서 비행괴수들과 싸우고 있을 감지윤이 잘못되기라도 할까봐 무서웠다.

어딘가에 있을 여도연이 걱정됐고, 입원해있는 우리 부모님이 탈출해 흑산양의 검은 역병을 퍼뜨릴까 두려웠다.

애시당초 역병 감염자가 강원도 속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불법이었다.

그리고, 또, 한 입으로 두 말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진절머리났고,

“......아, 의원님. 채원이한테 문자왔는데, 고아원에 개성 쪽 사람들이 찾아왔다는데요.”

“뭐라디?”

“우리 아이들 어디로 빼돌렸냐고 따졌답니다.”

나도 이제 ‘그런’ 부류가 되었다는 사실이 힘들었고,

“그래서 어떻게 했다니?”

“기다리고 있던 홍선아랑 군대 쪽 능력자들이 싹 다 체포했다네요. 리철진만 빼고.”

‘그런’ 부류가 ‘그렇게’밖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다는 사실이, 뭇내 슬펐다.

“얼굴 좀 보자고 전해라.”

*

우리는 백두혈통이 포함된 45인의 탈북민 아이들을 빼돌렸다. 아마 지금쯤이면 경상북도 어딘가의 야산 지하벙커에 있을 것이었다.

당연히 개성 반란군 쪽에서는 고아원을 찾아와 거세게 항의했고, 그것까지 예측하고 있던 우리는 그들을 체포했다.

그러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할 수 있는 리철진을 데려와 협상 테이블에 앉혀놓는 건.

“오랜만입니다, 리철진 씨.”

“......알고 있었던 게요?”

손쉬운 일이었다.

“뭘 말입니까?”

“......”

나는 생글생글 미소지으며 취조실 책상을 손톱으로 톡 톡 건드렸다.

“백두혈통이요?”

“이 쌍간나...!”

리철진이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소년을 타일렀다.

“우선, 대한민국 정부는 개성 반란군의 생존권 추구를 존중하고, 가능하다면 당신들과 상호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바램이 있습니다. 그러니 솔직하게 서로의 저의를-”

“동포를 납치하여 겁박하는 거이 협력이네!?”

리철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락바락 대들었다.

“10살도 안 된 아새끼들을 다가 끌고가 놓고서리 어디 감히 협력을 논하오!”

“애들을 많이 아끼시는가 봅니다.”

“옹호으 문뎨가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도리요!”

“한 명 숨기려고 44명을 위기로 내모는 게 도리라고 부르기는 힘들죠. 일단 진정하세요.”

나는 리철진에게 말했다.

“우리는 김성아 양이 김일성의 방계 증손녀이자, 마지막 남은 백두혈통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

“......추측이라는 말은 남한에서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뜻의 관용표현이니 묵비권을 행사하셔도 좋을 게 없을 겁니다.”

리철진이 푹 고개를 숙였다. 울분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동지들을 리용수에게 팔아 넘길 생각이오?”

“그쪽은 우리가 김성아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남한이 왜 이렇게 나오나 싶을 뿐이지, 명확한 정보를 쥐고 있지는 않겠지요. 리용수 국무위원장도 아마-”

“망발 지껄이디 말라!”

리철진이 내 말을 끊고 따져물었다. 피곤한데 다혈질이랑 이야기하고 있으니 기분이 조금 상했으나, 애써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일하는 중이었으니까.

“그 반동 역적놈이 어찌 국무위원장이요!”

“아, 네. 김씨 일가에 충성 바치고 계신 건 알겠는데-”

“공화국으 엄밀한 적통은 분명...!”

“그만합시다. 좀.”

나는 담담히 손가락질했다. 지들이 왕족인 줄 알아.

“사실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다 권력 사수를 위한 프로파간다라고. 그쪽 대충 보니까 지배계급이었던 것 같은데. 선동하는 쪽이 거꾸로 세뇌당하면 안 되죠.”

“......파편적으로 인정하갔어. 헌데. 들어보시오. 남조선 동지들이 리용수 놈을 공화국의 수뇌로 생각하는 건 절대로 아니 될 일이오. 10만 인민을 권력의 희생양으로 바치는 놈을 온 인민의 어버이로 어이 생각하갔소?”

“그래서 지금 북한의 통치자가 누굽니까?”

“사람으로서의 도리는 지켜야 마땅-”

“김씨는 도리 지켰습니까?”

드디어 리철진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녀석의 사상적 특징을 조심스레 종이에 사각사각 받아적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대충 3가지 맥락의 구두계약을 제시했다. 취조실 밖에서는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북한 왕족이 누군지는 그만 얘기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우리 정부는 개성 방면 탈북자들이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남한의 영토를 휘젓고 다니는 것이, 우리 국민들에게 어쩌면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1. 순간이동으로 우리 땅 헤집고 다니지 마라.

“그렇다고 리용수 군사정권의 요구대로 10만 탈북자들을 북송하는 것 또한 인도주의 원칙에 어긋나고. 통일을 지향하고, 북측 국민들 또한 남한 정부의 관할로 정의되어 있는 게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만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민통선 이북에 탈북자들을 수용하여 보호하기로 했습니다.”

2. 우리가 지정한 보호구역에서 살아라.

“우리 정부는, 10만 탈북민들의 차후 안전과 생존을 도모할 방향을 찾기 위해, 외교적, 군사적 대응방안을 적극 논의하고 있으며, 상호의 공존을 위해 개성 반란의 지도부가 그에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말아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3. 판 짜는 중이니까 헛수작 부릴 생각하지 말고 말이나 들어라.

역시 북한에서 배울만큼 배운 놈인만큼,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못알아먹지는 않은 모양이다.

“......!”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바들바들 떨지는 않을 테니까.

리철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꼭...! 꼭, 이렇게까디 해야만 하갔소...?”

“백두혈통 데리고 남의 땅에 침투해놓고서 억울한 척 하시면 안 됩니다. 잘못하면 당신들 때문에 핵폭탄 날아와요.”

“물론, 물론 백배천배로 사죄하갔소. 다만, 고, 고저, 우리들에게도 생존이 걸린 문뎨인데. 민통선 이북이면 인민군이 언제 처들어와도 이상하디 않을 거리 아니오?”

“남한도 인구포화상태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우리 사회 속에서 흩어지면, 국가보안 문제나 외교적으로나, 우리 국민들에게 심각한 위협을 가져옵니다.”

“...! 내, 내래! 내래 한승문 의원 동지의 고저, 부모의 은인 아니오! 태백산맥 이남. 적어도 리용수 놈으 손길이 닿디 않는 곳으로 우리를 이주시켜 주시오!”

“그건 제가 아니라 그쪽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달렸습니다. 저는 국회의 의원이고, 실권자들은 정부의 관료들이라.”

“얻디 사람으 도리를 모르시오!”

이거 웃기는 새끼네.

“천안함에 어뢰쏘고, 연평도 민간인 쏴죽이는 게 사람새끼 도리면 내가 말을 안 합니다.”

“......뭐요?”

나는 태연한 목소리로 녀석을 자극했다.

아무래도 같이 일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였다.

“아, 댁은 모르시겠구나. 그래요. 아무튼, 니들은 잘 모르는 민주주의 입장에서 봤을 때. 리용수나 그쪽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거에요. 우리가 왜 당신들 편이라고 생각합니까?”

“......”

“물론, 우리 부모님 모시고 계시던 거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공직자잖아요. 저도 다른 양반들이 시키는대로 하는 겁니다.”

“......”

“저 여기서 나름 중요한 사람입니다? 저 잘못되면 나라 뒤집어지는데 제가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정부가 그쪽에게 말하는 간접적인 존중이에요.”

내가 중요한 사람이기는 했다.

“......”

리철진이가 나를 순간이동으로 납치해서. 우리 정부와 협상한다면 썩 효과가 있을 정도로 말이다.

리철진은 사시나무처럼 떨며 부릅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손만 뻗으면 되었다. 녀석은 수갑으로 묶여 있지 않았으니까.

몸을 던져 나를 잡아챈 다음, 함께 순간이동하면 나를 납치할 수 있었다.

나는 잠시 녀석이 나를 납치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알갔소.”

이 어린 녀석은 나름대로 참을성이 있는 놈이었나 보다.

나는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여기까지네요. 다음에 들어올 사람에게는 조금 더 침착하게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알갔소.”

대답에 영혼이 없었다.

나는 인사하지 않고 취조실을 나왔다.

녀석의 참을성이 스스로의 목숨을 살렸다.

철컥.

취조실 밖으로 나와 문을 닫으니, 창문에 붙어있던 저격수 네 명이 자세를 잡고 있었다.

덤으로 GS 아이기스 쪽 초능력자 두 명이 내 안전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경찰특공대 베테랑 협상가가 취조실로 들어갔고, 나는 국정원의 경호를 받으며 지하 벙커에서 빠져나갔다.

툭. 툭.

어두운 계단에 지팡이 짚는 소리만 울려퍼졌다.

*

여도연의 소식이 들려온 건 다음날 저녁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