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43화 (43/296)

EP 8 - 재벌집 막내손녀 (6)

한 달이 지났다.

어둑한 집무실 안.

나는 꺼진 TV 앞에 묵묵히 앉아 있다.

눈을 감고.

천천히 회상에 잠긴다.

‘일단... 천목그룹을 지킬 거에요...’

‘중공업 지분을 방어하겠다는 소립니까?’

‘아뇨... 죄다 까부숴야죠...’

* * *

‘지금 세상이... 어지러운 것 같아도 나름 평화롭단 말이에요.’

‘지금 세상이 평화로워 보이십니까?’

‘후계자들 죽어서 눈 먼 지분들이 휴짓조각처럼 둥둥 떠다니는데. 아무도 그걸 안 먹잖아요...? 쫄보들......’

반 년동안 고심해서 짜놓은 바둑판 위에 누군가 엉뚱한 기물器物을 올렸다.

퀸이다.

‘참 재미있는 게 고요한 얼음호수 같아도... 사실 살얼음판 밑에 물뱀들이 들끓는단 말이에요.’

‘......돌 던질 겁니까?’

천금순은 비트코인처럼 널뛰기하는 주식 시장에 돈을 풀었다.

아주. 아주. 아주. 많이.

‘퇴물 취급 받으면서 애들 까까랑 치킨이나 팔았는데, 반도체고 금융이고 다 주저앉은 상황이라 제가 제일 부자가 됐거든요...? 물론 지폐가 휴지보다 싸긴 하지만, 그건 주식도 마찬가지잖아요...’

천금순은 치킨 게임을 반복했다.

갑자기 뛰어든 미친개가 어마어마한 총알을 풀면서 안 그래도 예민해진 주식을 사재기하니, 주가가 미칠 듯이 뛰어올랐다.

물론 경영권까지 뺏어올 수는 없었다.

그네들도 호구는 아니니까.

다만, 천금순에게 공격당한 기업들은, 그녀 때문에 폭등한 주식을,

그녀보다 더 많이 사서 방어해야 했던 바람에 큰 손실을 입었고,

천금순은 항상 꼭대기에서 절반을 팔아버리고 도망쳤다.

자연스레 방어를 위해 산 주식들도 휴지가 되곤 했다.

천금순은 이 개짓거리를 네 번 반복했다.

‘이, 이거 시장교란 아닙니까!’

‘자세히는 확인된 바 없습니다.’

‘장난쳐요? 미친년 하나가 칼 물고 날뛰는데, 나라에서 그걸 막아줘야 할 거 아니야!’ 수많은 재벌들의 항의가 뒤따랐다.

평소 같았으면 수많은 실국장들이 나서서 진즉에 공정위를 움직이든, 산업은행에서 구조조정 권고를 해서 주가를 매다꽂아버리든 했겠지만.

‘나라가 이 모양인데 주식쟁이 하나 잡을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무, 무, 뭐요!?’

그 사람들 이미 다 죽었다.

‘경제사범은 차후 검거될 겁니다. 다만 지금은 인력을 그쪽에 할애할 시간이 없습니다.’

‘지분 다 털리게 생겼는데 그게 뭔 개소리야!’

‘여튼 유감입니다. 조속히 해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지요.’

‘야! 유재경이! 니 나한테 이럴 수 있-’

‘......’

‘......이래도 되는 겁니까? 한의원님?’

‘vip랑 협의된 사항이니. 유장관님은 크게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여튼 재벌한테 갑질하니 기분은 좋습니다. 그래요.’

금융위원회. 정확히는 금융위원회의 인사권자인 기재부 장관은 재벌들의 요청을 가볍게 묵살했다.

심지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박아넣은 재계출신 금융위원이 거하게 기자회견을 벌이기도 했지만, 보도지침으로 인해 TV에 방송되지도 못하고 SNS에서 조회수 2,136명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내가 원옥분과 쇼부를 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창 언론과 기싸움을 벌이는 중이었으며, 아직까진 통제권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한 의원 요즘 재미있게 놀더라?’

‘죄송합니다, 대행님.’

‘장난친 거면 혼나요.’

‘장난은 아닙니다.’

‘말해봐요.’

‘슬슬 게이트 정국이 수습되고 있으니 언론들이 꿈틀대고 있지 않습니까. 상당히 예절없이 군다고 들었습니다.’

‘근데요.’

‘누구 지시를 받았겠습니까?’

‘......’

‘물론 언론사마다 모시는 기업이 다르니 하나로 특정할 수도 없고. 전경련의 조직적인 로비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는 노릇이라. 명백한 범인을 찾기가 애매합니다.’

‘그래서요?’

‘이 시점에서 실력행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펜대를 부러뜨리지 말고, 쩐주를 쥐어 짜자?’

‘그러면 알아서 눈치껏 처신하지 않겠습니까?’

‘......한 의원.’

‘네, 대행님.’

‘못보던 사이에 과격해졌네. 뒤에 있는 거 누구야?’

‘천금순이라고. 재벌 하나가 재미있게 놀길래 손 좀 보태주는 중입니다.’

‘나랑 동년배야?’

‘저랑 동갑입니다.’

‘......흠. 대충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어요. 귀엽게 노네. 나중에 한 번 데려와요.’

‘감사합니다, 대행님.’

결국, 천목투자개발 실장 한 명의 ‘개인적 일탈’ 때문에 그가 징역 6개월을 선고받는 선에서 일은 마무리되었다. 당연히 신년 특별사면 내정자였다.

즉, 천금순은 멀쩡했다. 재벌들이 그걸 보았다.

서열에서 한참 떨어진 찌그레기 하나가 분수도 모르고 미쳐 날뛰었는데, 멀쩡하게 입에 고깃덩이 물고 걸어나가는 걸 확인했다.

마침내 살얼음판이 깨지고,

구렁이들이 동면에서 깨어났다.

더 이상 인人의 장막이 그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동시에, 그들을 제약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다.

물론, 그들이 이제와서 정부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누군가에게 복종하고 의탁하려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인종이 아니었다.

- BBC치킨이 코코너스 통신을 인수했습니다. 이로서 지난 16일간 대기업 간의 적대적 인수합병이 일곱 번째로 성공했습니다.

- 다만, 이번 사례 또한 기업의 전문성과 관계없는 투기성 인수라는 점, 그리고 일시적 주가 폭락을 틈탄 물량공세였다는 점에서. 세간은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 과자 팔던 회사가 반도체 기업을 인수하고 있어요! 사업 규모건, 기술력이건, 그런 거 다 신경 안 쓰고 있다 이겁니다!

- 코스피 지수가 급등락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가격제한폭과 사이드카에도 불구하고 막을 수 없는 막대한 자금이 동시다발적으로 유입되었다는 분석입니다.

- 코코너스 통신 박주철 전 대표이사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유서에는 가족과 회사에 대한 사죄가 담겨있었습니다.

- 양판석 의원의 시장봉쇄안에 전경련이 일제히 반발을 표했습니다. 정부의 과도한 시장개입은 그 어떤 경우에도 허용할 수 없다는 뜻을 표명했습니다.

- 이미 열 두 번째 서킷브레이크가 발생했지만, '투기 광풍'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개미 투자자들 또한 장에 뛰어드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재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비자금을 투입했다는 추측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난세亂世가 시작되었다.

군웅할거의 시대다.

6차 왕자의 난, 범 유성 가家 내전. 등등.

언론은 온갖 수식어를 붙여가며 쩐의 전쟁을 중계했다. 고래 싸움에 경제가 피바다가 된다는 점에서 국민 여론도 극악에 치달았다.

허나 어쩌겠는가.

평생 사주 뒤만 닦아주다 말년에 한직으로 쫓겨난 늙은 사냥개 본부장.

진즉 형제들에게 밀려 쫓겨난 왕자.

재벌들이 모두 죽어버린 바람에 세 살짜리 후손을 옹립시켜 회사를 먹으려는 CEO.

세상을 어지럽힌 다음 그 속에 숨어 본색을 드러낸 재벌집 막내손녀.

간사한 영웅들에게는 오직 난세만이 살아갈 세상이었다.

빌딩숲에 몸을 숨겼던 온갖 야수들이 뛰쳐나와 서로의 숨통을 끊기 시작했다.

사냥꾼과 사냥감의 구분은 오직 하나다.

돈.

아무리 실적이 좋았건, 규모가 거대했건, 지금 쥐고 있는 실탄이 없으면 죽어나갔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대부분이 빚져서 장사하는 나라였다. 빚으로 회사 하나 만들어서 사업하고. 그 회사 담보로 빚져서 새로운 회사를 만들고. 그런 기업일수록 거대했다.

그리고 쉽게 죽었다.

먹이사슬이 완벽하게 박살났고, 천목그룹 순환출자도 개박살이 났다.

허나 천금순은 천목그룹을 지켜냈다.

천목그룹의 사주회사인 천목중공업은 배 만드는 회사다. 덩치가 크고 굼떠서 공격에 취약하다. 즉.

*

“자금 유동성이 극단적으로 떨어져요...”

으슥한 소머리 국밥집 구석.

“투기자본을 못 막고 해체될 거에요...”

천금순은 술에 취해 풀린 눈으로 헤롱대며 중얼거렸다.

“그때, SKY TREE MALL 사장이 도산 선언을 하면, 순환출자가 제가 설정한 지점에서 완벽하게 끊겨요. 백화점이 소유한 유통쪽 2%가 흩어지면서, 유통이 해운 소유가 되거든요...

동시에 천목해운이 알짜배기 회사를 거느린 지주회사 형식으로 그룹 하나가 재탄생할 거에요...

내부 지분률 51%. 단독회계 기준 부채비율 20%. 이정도면 마지노 선이죠...

아! 단단하다는 뜻이에요...”

천금순은 기본적으로 목소리가 일정 데시벨 이상으로 안 올라가는 사람이었다.

“저, 설계 잘해놓지 않았나요...? 반 년만에 세운 계획이라고는 믿을 수 없죠? 그죠? 고마워요...”

그래서 항상 말하는 게 귀에 잘 안 들어왔다.

시무룩하고.

더듬거리고.

산만하고.

작은, 목소리.

허나, 이 조용한 밤거리의 어둑한 국밥집에 앉아.

그림자 진 그녀의 얼굴에서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담담히 내리깔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제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피바람이 부는 동안, 저는 강북 고아원에 수백억을 기부하고, 창고에 있는 대부분의 식량을 뿌릴 거에요. 물가가 하늘에 닿았는데 먹을 걸 받으면, 사람들 기분이 어떻겠어요...? 그리고 투기로 얻은 수익 대부분을 한국은행에 맡길 예정이에요...”

사근사근한 말투.

살짝 느린 어조.

“그 즈음에 정부가 나서서 말하는 거죠.”

그리고 폭력적인 본질.

“시장을 교란하는 경제사범들을 단속하기 위해, 앞으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겠다...”

그녀 입에서 튀어나오는 단어 하나 하나가 고막을 뚫고 뇌리에 쑤셔 박히는 것 같았다.

온 몸에서 피가 빠지는 것 같다. 반년간 공들여 짜놓은 바둑판 위에 기물器物이 올라왔다.

이거 미친년이다.

어느새 양복을 벗어던진 그녀는, 와이셔츠 차림으로 복분자 두 병을 비워냈다.

“이 판국에 빨갱이 소리 내뱉을 양반은 없을 거구...

시장은 서로가 살점을 뜯어 제 몸에 붙이던 상황에서 고정되어버릴 텐데......”

순하게 처진 눈썹과,

음침한 다크써클 사이,

그 눈동자에 형용할 수 없는 살기가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럼, 어지간한 기업은 다 반병신 됐다는 소리잖아요?”

불타는 야망으로 칼을 빼들 재벌과.

그들을 압박해 언론을 틀어쥐려는 원옥분.

때문에 불어올 피바람.

으로 고통받는 국민.

에게 표를 받기 위해 나설 정치권.

의 부탁을 받고 경제를 통제할 정부.

덕분에 왕좌에 오를.

천금순.

회장.

“그 시점에서 제가 쥘 기업은 크게 4 라인이에요. 제철, 에너지, 식품, 건설...”

강철. 식량. 발전소. 건설.

전쟁으로 이득을 보는 산업들.

그녀는 전쟁용 기업을 계획했다.

“애국하기 딱 좋네요.”

“......”

“돈독에 눈이 오른 병신들 사이에. 국민들한테 밥도 풀고. 국고도 채우고. 국책사업 따오기도 좋은. 이렇게 견실하고 착한 기업이 있는데...”

“......”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으신가요?”

계산기 두드려 보니 대충 1년 내로 6위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중얼거리면서, 천금순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그녀가 잔을 비웠고,

나는 그녀의 술잔을 채웠다.

“잘 들었습니다.”

“으음... 더 감상 없나요? 나름 열심히 짠 계획인데......”

그녀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러니까.”

술잔에 술이 넘쳐 식탁을 타고 바닥까지 흘러내렸다.

“그룹 하나 먹겠다고 우리나라 경제를 파탄내겠다는 거 아닙니까.”

나는 복분자 병이 텅 비어버린 다음에야 술병을 내려놓았다. 밀실 안은 침묵과 달큰한 술냄새로 가득했다.

천금순은 전부 흘러버리고 겨우 남은 작은 술잔마저도 들이켰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으음...?”

그녀는 당연한 일이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는 듯, 한참동안 골똘히 상념에 빠졌다.

그리고 손에 묻은 술도 아깝다는 듯 찔끔찔끔 핥으며 태연히 웃어보였다.

“가족들은 저를 저로 안 봤어요. 저도 저만의 인생이 있다고요...  어떻게 사랑하는 딸을 사업 수단으로밖에 볼 수 없지요? 너무 분해서 복수를-”

“헛소리는 이제 그만하시고.”

“사실 제가 아버지 혼외자에요. 어머니한테 맞고 자랐지요.”

“입만 열면 아주......”

“저를 어릴 적부터 많이 아껴주셨던 우리 할아버지, 사실 요양원이 아니라 관짝에 있어요. 아버지가 호흡기를 떼는 걸 문틈으로 지켜봤지요...”

“어쩌라고요.”

“안 통하네. 이거...”

그녀는 침음성을 내며 다시금 고민했다.

“그래.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요.”

낼름. 그녀가 손등에 묻은 술을 핥았다.

“금순이가 뭐야, 금순이가... 결국 저는 돈 들어오는 여자애라는 거 아니에요. 부적이야...?”

“가족들이 싫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렇죠. 덕분에 금수저 물었으면 만족해야죠. 요즘 세상에.

근데 집안에 금붕어들밖에 없더라구... 어떻게 사람이 붕어를 엄마라고 불러요...?”

“......”

“마석이 새로운 에너지원이 된단다.

사업을 핑계로 마석을 무더기로 사들인 다음에. 비싸게 되팔자...

금순아... 꼬셔와라...”

“......”

“저야 뭐... 평소 사람 꼬시는 건 잘 했는데. 이번에는 그럴 생각이 안 들더라구요...”

“......”

“어디서 찌라시 하나 들어왔다고 호들갑 떨면서 딸까지 팔아버리려는 거 보니까 영 답답하기도 하구우...

나라는 카드를 그렇게까지밖에 못 쓰나...? 여기서 정략혼을...?”

“......”

“그리고, 한승문 재단 연구소가 반년동안 돌아갔는데 그걸 모를 수가 있나...?

일본에서 마석 대량수입하고 있는 거 보니까, 승문 씨가 이미 한참 사재기하는 중이던데. 그 치들은 왜 이리...

아휴...

이 얘기는 그만할게요......

기 빠진다......”

“......어떻게, 그걸,”

“바닷길은 제 손바닥 위에요...... 아무튼, 미쳤다고 그걸 건드리려는지 이해가 안 됐단 말야...”

“이봐요 천금순 씨.”

“예...?”

“내가 왜 미친년이랑 사업을 해야 합니까?”

“아... 됐다......”

천금순이 해맑게 웃으며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술이 말라붙어서 그런가 끈적끈적했다.

“고마워요...!” 그녀가 씨익 웃었다. 처진 눈썹 덕분에 항상 인상이 순하고 어리숙해 보였지만.

지금만큼은 이 미소가 소름끼쳤다.

손을 빼고 싶었지만 술 때문에 끈적거리는 건지, 그녀가 나를 꽉 붙잡은 건지, 그도 아니면 팔에 힘이 안 들어가는 건지.

손을 뺄 수가 없다.

“녹음기 신경 안 쓰는 거 보니까... 내 손 잡아주겠다는 거, 맞죠?”

“......”

“입은 그래도 눈은 솔직하구만...... 흐아아...! 드디어 꼬셨네......”

천금순이 이겼다는 듯 활짝 웃었다.

“양판석 의원님이 그러셨어요. 내가 의원님한테 그렇게 취향일 거라며...?”

반년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짜둔 바둑판 위에 퀸이 올라왔다.

한 번에, 뒤틀린 정국을 엎어버렸다.

“자기. 지금 나 탐나죠.”

......인정하긴 싫지만.

가장 필요했던 묘수였다.

“근데, 이런 미친년이 필요한 일이면......”

문제는, 이건 양판석이 올려놓은 퀸이다.

“대체 무슨 미친짓을 꾸미고 있는 거에요...?”

즉,

내 계획이 읽혔다는 소리였다.

*

어둑한 방에 홀로 앉아 뉴스를 본다.

- 자랑스런 국군과 사냥꾼들이, 사태 초, 차재균 군부의 실책으로 인해 경기도 이남으로 퍼져나간 모든 괴수들을 처단했습니다. 김춘식 조합장은 회견에서......

뉴스 아래쪽. 자그마한 글줄들이 쉴새없이 지나갔다.

‘전 천목 사주일가. 군사기밀 유출 혐의로 입건.’

‘천목그룹 후신, GS그룹. 강북에 46억원 규모 식자재 지원.’ 금순Geum Sun일까 금순金盾Golden Shield일까. 어차피 유통기한 지나면 팔지도 못할 음식들 뿌리는 거 보면, 썩 든든한 방패는 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도장 한 번으로 지원한 46억 규모의 식자재가. 내가 평생동안 남을 도운 양보다는 더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없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어어, 한의원.]

양판석이다.

[금순이는 잘 지낸다던가?]

그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차재균이 죽었을 때부터 짐작은 했고. 확신한 건 두 달인가 됐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얼. 공명이 계를 짜는데. 유비는 없어도 조조는 있어야지.]

“덕분에 일이 쉬워졌습니다. 그런 인재는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시대가 부른 게야. 그 녀석도. 자네도.]

한참동안 이 말을 해도 되나 고민했다. 한참 말라 비틀어진 목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양 의원님.”

[......벌써 목이 많이 쉬었구만.]

“정말, 정말로 전부 알고 계신 겁니까?”

[......]

“천금순이 저한테 보내주신 거. 일종의 묵인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알아서 생각하게.]

“감사합니다.”

[......그래. 자네도 보좌관 노릇은 끝내야지.]

“......”

[......천금순이도 재벌집 막내손녀 노릇은 끝낸 모양이더만.]

EP 8

재벌집 막내손녀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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