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42화 (42/296)

EP 8 - 재벌집 막내손녀 (5)

천금순은 나를 호텔 지하 와인바로 데려갔다.

“뭐, 뭐 드실래요? 자기...?”

“이거요.”

오도독. 오도독.

럭셔리 룸에서 양복쟁이 두 명이 정중하게 마주앉아 노래방 뻥튀기를 집어먹었다.

“계약서는 잘... 읽어보셨나요...?”

“아, 예. 보긴 봤습니다.”

마석사업을 허가해주는 대신 결혼하고 애 낳는다. 나한테 떨어지는 지분률은 0.38%. 이혼을 하게 되면 그쪽에서 재산 절반을 떼어준다.

대신.

나는 공정위와 검찰을 막아주고, 그쪽에선 지역구와 언론에 치트키를 써준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계약서를 돌려줬다.

“음... 천금순 상무님. 이런 문제는 제가 아니라, 행자부나 방위사업청에 문의를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최소한 저보다 더 윗선에-”

“자, 자기보다 윗선은 없는 것 같던데요...?”

“허면... 이게 진정 회장님 뜻이라고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해석 : 느그 할애비가 이렇게 가르치든?

* * *

“먼저 제안해주신 건 감사드립니다만.”

야, 이 새끼야.

“간담상조肝膽相照라는 말을 쓰기에는 상호가 너무 조심스러운 것 같습니다.”

딜을 쳤으면, 패를 까야지.

“공직자로서 사적인 관계에 매이고 싶지도 않고, 과연 이게 국익을 위한 일인지 회의감이 듭니다.”

돈 꽂아줄 테니까 남창짓을 하라고? 할 것 같냐?

“물론 천목그룹 쪽에서도 진즉 제 사정을 능히 이해해주셨을거라 생각합니다.”

니들이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짐작했다고는 생각 안 해.

“같은 맥락에서 단순한 비즈니스가 아니라 보다 더 건설적인 관계에 대한 안목이 있으시리라고도 미루어 짐작하고 있고요.”

그러면 뭔가 더 꿍꿍이가 있다는 소린데.

"다만 서로의 이해가 닿지 않아 유감스럽다는 말을 전할 수밖에 없어 안타깝습니다."

어디 사람을 등신으로 알고 연막을 깔아?

“제가 재계의 사정에 그리 밝지 못합니다.”

그리고 내가 니들 사정을 어떻게 알아?

“그럴 여유도 없고요.”

내가 니들 심정까지 헤아려줘야 하는 사람이냐?

“다소 외람된 말씀이지만, 천목그룹 측에서도 제게 온전히 신뢰를 주시고 계신 것 같진 않습니다.”

싸가지 있게 구는 게 좋을 거야.

“국민을 위한 일이니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점,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꺼져.

"시국이니만큼 제가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뒈지기 싫으면.

천금순은 잠시 오묘한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읽기가 힘들다. 눈은 울상이고, 입은 웃고 있고, 분위기는 차갑다.

물론 내가 페이스에 휘말릴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여유롭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후우......”

말보다 한숨이 먼저 나왔

“후후후......!”

한숨이 아니라 웃음이다.

“역시... 삼고초려는 기본이다 이건가요...?”

“뭐요?”

“비싼 남자... 나쁘지 않아요...”

“무, 뭐요?”

“자기야.”

천금순이 오싹하게 웃었다.

“우, 우리 조금만 더 으슥한 데서 이야기 할까요...?”

나는 그대로 천금순네 집까지 끌려갔다.

*

“반갑습니다 한 의원님! 천목중공업에서 사장하고 있는 천승윤입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매번 TV에서나 뵀었는데 실물이 더 훤칠하신 것 같습니다! 오시는 길에 동생이 실례는 안 저질렀나 걱정이네요.”

“아, 오빠...!”

“하하하...”

천금순네 첫째오빠가 천금순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둘째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천목중공업 천승문 전무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승문 의원님.”

“반갑습니다 천승문 전무님.”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아, 영광 까지야...”

“압구정 사건, 정말 인상깊게 지켜봤습니다.”

이름이 같다고 호들갑을 떨기에는 너무 진중한 목소리였다.

나는 천금순네 부모님과 오빠들 와이프까지 인사를 끝내고서야 저녁 밥상에 앉았다.

회장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천금순이 아버지, 그러니까 부회장에게 물었다.

“저어, 회장님은 혹시...?”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요양 중이십니다. 크게 편찮으신 건 아닙니다만... 아, 일단 조촐하게 상이라도 차렸는데. 드시죠.”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

가끔 저도 모르는 오만함이 툭 툭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그 치들끼리 눈치를 주며 자제하는 듯 싶었다.

드라마보다는 덜 품위 있었고,

내 생각보다는 더 정중했다.

가면을 꽤 잘 쓰고 다니는 사람들 같다.

아무리 사람 좋은 것 같아도.

결국 딸 가지고 장사하는 치들이었으니까.

5시간 41분.

내가 그 집에서 빠져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빨리 나가고 싶어서 시간을 쟀다.

밥, 차, 과일, 커피, 심지어 몇 년산 라뚜뭐시기 와인까지 얻어먹었다. 나같은 건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비싸겠지.

생전 처음 먹는 산해진미였지만 자리가 불편해서 오히려 속이 더부룩했다. 라면 먹고 싶다. 그것도 요즘은 가격 장난 아니긴 하다만.

아주 고급스러운 다단계에 걸렸던 기분이 든다. 5시간동안 이리저리 치이고 나니 진이 다 빠진다.

시사 속 은유, 안부 속 암시, 맥락과 속담을 통한 권유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난감한 대화였다.

무서운 인간들 같으니라고.

나는 알코올에 찌든 정신으로 간신히 집구석에서 빠져나왔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반쯤 쓰러지다시피 담벼락에 몸을 기댔다.

쇠약해진 몸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나온다.

“혀, 형!”

“이, 일호야...!”

양일호가 쓰러지려는 나를 붙들었다.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차라리 뒤지라고 고사를 지내라.”

- 빵 !

“흐에잌!”

“으얏짜!”

지나가던 벤츠가 경적을 울렸다.

앞유리가 내려가며 천금순이 처진 눈으로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자, 자기야.”

“...예?”

“내가, 해장 좀 시켜 줄까요...?”

“...지금 새벽 2시인데요?”

“마, 맛집 알아요...”

“아니, 뭔...!”

“피곤하게 안 달라붙을게요... 해장만 해요...”

“흐음......”

“소머리 국밥.”

“!"

*

추울 겨울날, 뜨끈한 국물이 몸 속으로 들어왔다. 살아있어서 행복하다. 소머리 국밥에 공기밥을 푼 다음 후후 불어 크게 한 입 삼켰다.

입이 익어버릴 것 같은 뜨거움을 느끼며, 그대로 삼키자 불덩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 같다.

“아... 이거지...”

후루루룹. 후룹. 킁. 후루룹.

하얗고 시원한 국물이 들어가니 그나마 술이 깨는 것 같았다. 나는 소머리 고기의 오묘한 육향을 느끼며 물었다.

“저, 천상무님.”

“네...?”

“으슥한 데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으슥한 데 간다 해놓고 지네 집으로 데려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 조금 당황스러운 회상을 담아 그녀에게 물었다.

천금순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보통... 인적 드문 곳을 으슥하다 그러지 않나요...?”

“그렇죠.”

“지, 집에 사람 새끼가 없는데. 으슥한 곳 맞죠 뭐......”

술이 확 깨네.

해장 제대로 했다.

나는 휘둥그레 떠진 눈으로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양일호는 수저를 식탁에 떨어뜨렸다.

천금순이 스윽 손을 들자, 주인장이 알아서 복분자를 갖다줬다.

“샤, 샤따 내려줄래요···?”

“네, 상무님.”

가게 셔터가 내려갔다. 주인장은 사라졌고, 가게에 손님은 없다.

밀실이다.

그녀는 처연히 웃으며 조곤조곤 말문을 텄다.

“으, 으음... 들으셔도 상관은 없는데...”

그녀는 양일호를 흘깃 쳐다보았다.

얘가 중요한 이야기를 들어도 되는 인물이냐는 뜻이다.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양일호가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런.

덥썩,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던 양일호를 붙잡아 자리에 앉혔다. 반년동안 재단에서 시킬 일 못 시킬 일 전부 시킨 놈이다.

그리고 양일호 안주머니에 권총이 들어있는데 얘를 내보내면 쓰나. 나는 멋들어지게 대사를 쳤다.

“안 믿으면 안 쓰고. 쓴 사람은 믿습니다.”

“삼국지 좋아하시나 봐요...?”

사실 드라마 대사였다. 천금순이 살풋 웃으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저도 그거 봤거든요...”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어도. 양판석 의원님 옆에 있다 보니 이것저것 알게 된 게 많습니다.”

“하, 하긴 양판석 의원님 삼국지 엄청 좋아하시죠···”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으, 으음... 할아버지 친구분이셨어요. 양판석 의원님이...”

“아, 회장님이랑...?”

“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종종 뵀었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허면, 양판석 의원님이 우리 둘이 이어지기를 원하셨던 겁니까?”

“아뇨.”

그녀가 답했다.

“제가 원해요...”

덥썩.

그녀는 얇은 손가락으로 술잔을 잡아 한 번에 들이키고는, 배시시 웃으며 내게 술을 따랐다.

“제, 제가 승문 씨 마음을 한 번 읽어볼게요···”

비유겠지만, 순간 흠칫했다.

“드, 듣도 보도 못한 졸부들이 돈 줄테니까 몸 팔라 그러고... 정작 지들은 손패도 안 까고...”

천금순은 헤실헤실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마침 마석 가지고 엉기니까... 구, 국가전략자원으로 장난친다고 언론에 터뜨리면, 다들 완장질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불판은 금방 달궈질 테고···”

나는 건조한 눈빛으로 그녀가 건넨 술 한 잔을 받았다.

“계엄 슬슬 허술해지니까 슬슬 언론에서도 반격 시작하려고 드는데, 정치권도 슬슬 매타작할 개새끼 하나는 필요할 거구...”

나는 말없이 미소지으며 그녀의 술잔을 채웠다.

“그, 그럼, 산업은행이라앙, 공정위랑, 국세청이랑... 또이또이해서 야금야금 잘라먹으면... 그룹 하나 해체시키는 건 일도 아니겠죠...?”

천금순도 머리에 녹음기 생각은 항상 하고 다닐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었고 말이다.

근데 이렇게 나온다는 건.

“우리 천상무님, 생각보다 담이 작지는 않으십니다?”

나랑 목숨 걸고 놀아나겠다. 이거지.

“스, 승문 씨느은... 역시 제 생각만큼 무서운 사람이었네요오... 헤헤. 역시 제가 사람을 잘 봐요...”

우리는 복분자 반 병을 비웠다. 천금순은 어느새 발그레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는 말이 있어요...”

삼국지에서 조조를 평하는 말이다. 평화로운 시대엔 뛰어난 신하가 되고. 어지러운 시대에는 간사한 영웅이 된다.

다시금 그녀가 내 술잔을 채웠다.

“시대가 사람을 바꾼다 생각하세요...?”

“아뇨.”

“치세는 간웅이 뜻을 못 펴는 세상일 뿐이지. 간웅이 능신에서 만족한다고는 저도 생각 안하거든요...”

“......”

“아...! 이거 좀 오글거렸다... 에으으...”

그녀가 취기를 가시려는 듯 마른 얼굴에 세수를 했다.

천금순이 양 손으로 자기 볼을 찰싹 찰싹 때리고서 말을 이어갔다.

“흡...! 자, 이제 본론!”

천금순이 깍지 낀 두 손 위에 얼굴을 올려두고 빙그레 웃었다.

“천목그룹의 순환출자는 거미줄 형태에요... 사주회사는 천목중공업. 배 만드는 곳이요...”

나는 잽싸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순환출자라.

A회사가 B회사를 가지고.

B회사가 C회사를 가지고.

C회사가 A회사를 가진다.

재벌 가문은 오직 A 회사만 잡고 있는다.

그럼으로서 B와 C를 동시에 소유한다.

이런 게 얽히고 섥혀 거미줄에 가깝게 그룹 전체가 이어졌다는 소리였다. A회사 역할을 천목중공업이 하고 있고 말이다.

“개판이네요? IMF 때 데이고도 정신을 못 차렸네. 지주회사로 전환을 시켰어야지.”

“으음... 해처먹느라 돈이 없었어요. 아무튼... 천목중공업 지분 4%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런 게 가능한 건 정관계 재벌 장학생들이 고기방패를 해주기 때문이었다.

외국 자본도 막고. 주총 공격도 막고. 산업은행이랑 공정위에서 가끔 엎으려는 것도 막고.

문제는.

“지분 방어가 뚫렸어요.”

나라가 망했지.

당연한 수순이다. 나라가 망하면서 무형無形의 권력 방어막이 사라지고. 결국 지분을 지킬 수가 없어졌다는 거다.

A 하나만 쥐고 수십개를 휘둘렀는데, A만 뺏겨봐라.

“시, 심지어 자회사 몇 개가 고꾸라진 상황이라... 지분을 방어할 자금이 턱없이 부족해요...”

그룹 해체 직전이구만.

“천목 그룹은... 지분을 방어할 급전이 필요해요. 그리고 새로운 방어막도요.

그, 그러니까, 천목이 승문 씨에게 정말로 하고싶었던 말은, 같이 사업하자는 소리가 아니라......”

나는 그녀의 말을 이어받았다.

“좆되기 직전이라 몸 좀 대라?”

“빙고···!”

가장 재미있는 건, 천목그룹의 내부 사정이 아니었다.

“자, 자기야...”

깍지 낀 두 손 위에 올라온 얼굴이, 빙그레 미소지으며 내게 말했다.

“나아, 진짜, 쌔끈한 계획이 하나 있는데......”

쓰디쓴 미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되남...?”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