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41화 (41/296)

EP 8 - 재벌집 막내손녀 (4)

2008 세계금융위기에서 시작된

대침체Great Recession의 시대.

정치인이 연명하려면 경제를 살려야 하고, 경제를 살리려면 재벌의 곳간을 열어야 한다.

재벌의 장학금을 받으며 일하는 공무원들이 행정부와 정관계 곳곳에 박혀있다.

재벌의 돈으로 선거운동을 해서 당선되어 재벌 인맥과 결혼한 정치인들이 국회에 박혀있다.

이 촘촘한 시스템에서 개인은 그저 얇은 실에 불과하다.

거미줄. 상위 1%로 이루어진 거미줄에 엮여있는 99%의 날벌레들.

판을 짜는 건 오직 거미 뿐이다.

헌데.

거센 태풍에 거미줄이고 나발이고, 숲 전체가 뒤집어진 상황에서,

거미가 과연 왕이라 할 수 있는가?

* * *

안절부절 못하는 천금순을 간신히 돌려보내고, 안방 소파에 앉아 그녀가 건넨 계약서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후루룹. 율무차가 맛있다. 나는 찻잔을 기울이며 계약서를 천천히 넘겼다.

마석을 수출할 권리를 얻고 싶댄다.

왜냐. 우리나라에선 정부와 인가기관을 제외하곤 마석을 소유, 거래하는 게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내가 발의한 법안이다.

상법 곳곳에 땜질까지 해둬서 법꾸라지들이 빠져나갈 수도 없다. 프로페셔널 법꾸라지들한테 부탁해서 만든 법률이니 오죽 꼼꼼하겠는가.

헌데, 천목그룹은 마석 가지고 사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어쭈. 계약서가 아니라 사업 계획서다 아주.

“흐음......”

우리나라의 안정적 마석 수급. 시세차익을 노린 국가간 중개무역. 컨테이너선 경호인력 고용. 외국에 마석 농도로 사기치기. 등, 등.

온갖 복잡하고 창의적인 돈벌이 방식이 줄줄 적혀있었지만,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결국 이러했다.

‘마석은 돈이 된다. 맡겨줘라. 벌겠다.’

아무튼,

내 도움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면. 나를 데릴사위로 들여주겠다는 건데. 그러면 지역구 관리랑, 언론통제랑, 검찰이랑, 이것저것 뭐, 편해지겠지. 아주 많이.

재벌의 진짜 힘은 돈이 아니라,

돈으로 모은 사람들이니까.

자본주의의 철저한 신봉자들이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안다는 사실은 항상 아이러니다.

그런데.

과연 이 시점에서 재벌이 갑인가?

아니, 아니. 내가 재벌과 손을 잡는 게 과연 내게 이득이 되나? 가장 중요한 이미지가 상할 수도 있는데.

문제는, 이 상황이 양판석이 주도한 상황이라는 거다. 천금순은 양판석이 소개시켜준 사람이니까.

이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 벌컥 !

“야. 밥.”

나는 잽싸게 계약서를 덮었다. 여도연이 껄렁껄렁하게 엄지발가락으로 방문을 열어제꼈다.

“뭐 봤냐?”

“노크는 안해...?”

“밥.”

해석 : 먹어라

아드득. 이를 갈며 그녀를 째려보자, 여도연이 대충 턱짓했다.

“나와.”

“일으켜줘...”

“치킨 시켰는데.”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

우리는 바닥에 앉아 치킨을 뜯었다. 여도연은 항상 닭가슴살만 먹는 덕분에 같이 치킨을 먹으면 내가 다리를 먹어서 좋았다.

여도연이 젓가락으로 닭가슴살을 발라내서 냠냠거렸다.

“일찍 왔네? 낚시 간다며.”

“어, 으음......”

나는 연애상담을 받기로 했다.

“사실 낚시가 아니라 소개팅이었는데.”

“무, 뭐!?”

“소개팅이 사실 낚시였어.”

“......말이야 방구야.”

여도연은 눈을 크게 치켜뜨며 순간 흥분했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소개팅을 나갔는데 영 아닌 것 같아서 막 까버리면 주선자 체면이 상하나?”

“아무래도 그렇지.”

“근데, 주선자가 이런 여자를 생각없이 소개시켜줄만한 사람은 아니거든. 그러니까 분명 괜찮은 여자라는 건데. 왜 나는 별로지?”

“주선자랑 너랑 취향이 다른 건 아니고?”

흐음. 생존주의라.

“말 들어보니까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냐?”

“근데 왜 난 이걸 소개팅이라곤 나가본 적도 없는 사람한테 물어보고 있, 엌! 어엌! 아파! 앜!”

그녀가 내 옆구리를 발가락으로 사정없이 찔렀지만, 다행히도 수면양말을 끼고 있어서 그리 아프진 않았다.

여도연이 버럭했다.

“나 체대야 임마!”

“중퇴했잖아!”

“내가 체대 남대생들을 얼마나 많이 팔아치웠는지는 알고 그러는 거냐? 연애하고 싶은 애들은 다 나한테 찾아왔었다니까. 남자 소개시켜달라고.”

냠. 여도연이 닭가슴살을 야무지게 우물거리며 물었다.

“걔 예뻐?”

“그냥, 좀 우울하고 순둥순둥하게 생겼는데. 내가 아는 여자들 중에, 한...... 3위?”

“1, 2위는 누군데?”

“홍선아랑 호정이긴 한데. 그쪽은 차갑게 생긴 류라서 내 취향은 아니고. 그리고 순위는 차이가 나도 점수는 비슷해서.....

아무튼 10점 만점에 8점인데, 처진 눈썹이랑 우울한 표정이 잘 맞아서 0.6점 가산점. 그래서 3위.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9점 이상이 없다는 점에서 접전이라고 봐야지.”

여도연이 나를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경멸했다.

“...미친새끼.”

“뭐요.”

“......미친새끼.”

“왜, 뭐, 왜.”

“징그럽게 구체적이네. 나는 몇 윈데?”

“누난 내가 남자로 보여...?”

“납득했다.”

잠시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여도연(28. 연애중개사)이 썰을 풀기 시작했다.

“첫 눈에 반했다고 호들갑떨던 애가 2주만에 깨지고,

얘는 좀 아닌 것 같다고 한번만 더 만나본다고 하던 애가 지금 애기가 셋이거든? 살아있을는진 모르겠는데. 아무튼.”

여도연이 내게 손가락 대신 닭뼈를 흔들었다.

“사람을 한 번 보면 아냐?”

“여러 번 만나봐라?”

“제갈량도 유비 걔 좀 아닌 것 같아서 팅기다가 3번째 미팅에서 콜한 거 아니야.”

“걔네 둘 다 안좋게 죽었는데.”

“그른가......”

여도연과 나는 실없이 닭다리를 하나씩 입에 물었다.

“맛있네.”

“누나 원래 닭다리 안 먹잖어.”

“이제 운동 안하잖아. 10년만에 먹는 건데 존나 맛있네. 시벌거... 한 마리에 12만원이라 그런가.”

“어, 돈 혼자 냈어?”

“됐어 임마.”

우리는 그렇게 방바닥에 널부러져 예능이나 보며 여유로운 저녁을 보냈다.

“어, 홍선아 나왔다.”

“어디어디?”

*

정말로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게 느껴진다. 가만히 있어도 피곤하고 숨이 찬다. 근육 속을 누군가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기도 하다.

2주에 한 번씩 하던 건강검진을 한 번 더해봤는데, 의사가 나보고 툭 하면 엌 하고 죽는단다.

스트레스를 줄이고 잠을 늘리라는데 그게 쉽겠는가. 이 시국에.

지인과 의사의 만류로 재단 일을 잠시 놓기로 했으나. 요양이나 휴식은 이 상황에서 사치다.

당분간은 정치인으로서의 일정만 수행하기로 했다.

천금순 명함은 가지고 있긴 한데, 만날 시간이 안 나서 일단 미루어뒀다.

지난주 발생한 신안산 오폭사고 유족들 분향소에 국화꽃 놓아두고.

거기서 만난 행안부 장관에게 초인 범죄자 제압을 위한 인력지원 요청을 받아서 그 자리에서 전화 한 통으로 해결해주고,

오랜만에 지하국회 들려서 짜장면 먹으면서 법안 4개 발의하고.

지역구로 내려가는동안 차에서 잠시 눈 좀 붙이고.

도착하자마자 김해국제공항 재오픈 테이프 짜르고.

해양수산부에서 발표한 바다괴수 방위 시스템 설명회 강단 위쪽 내빈석에 앉아 자리를 빛내주고.

마침내 그날 저녁. 하루를 마칠 즈음.

한국대학교 동창회에 갔다.

동문끼리 으쌰으쌰 밀어주고 끌어주는 우리나라 전통 상 굉장히 중요한 행사였다.

머리가 아주 안 돌아가는 사람들은 아니었는지, 5성급 호텔에서 돈지랄 안하고 적당한 호텔을 잡은 모양이다.

이래서 배운 사람들이다.

교묘하다.

사실 겸손한 게 아니라 동창회 모임 규모가 역대 최고일 것이었다. 그래서 값싸고 커다란 곳으로 잡은 거지.

나라가 이 지랄이 났는데 인맥이라도 털어서 살 방도를 찾아야지 않겠나. 뭐라도 잡을 지푸라기를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겠지.

참 고급스러운 인력시장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누군가의 일자리가 되어주고, 누군가의 노동력이 되어주려 그곳으로 향했다.

나는 주최 측과 먼저 인사하고, 적당히 담담하고 공익적인 연설을 보탰다. 그리고 내게 배정된 자리로 돌아왔다.

무수한 악수의 요청이 뒤따랐다.

낮에 만났던 행안부 장관이랑 웃으면서 사진도 찍고, 옆에 있던 공정위 심판관리관이랑 인사도 나누고.

자기 지역구를 잃어버린 구청장은 일단 가차없이 잘라내고. 미안하지만 어디 임원이나 어중간한 공무원은 일단 사절.

죄송합니다. 교수님. 지금은 교수님 일자리를 챙겨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랑 별로 안 친했잖아요. 패스.

허수아비였다가 졸지에 도지사가 됐는데 연줄이 필요한 충청도 행정부지사에게는 쓸만한 공익사업 하나를 계약해줬다.

형들이 다 죽어서 후계자가 된 어디 재벌이랑 잠깐 얼굴도장도 찍고. 양일호랑 친한 선배라며 엉긴 어디 검사랑 명함도 나누고.

그제서야 밥을 좀 먹기 위해 뷔페에서 일단 육회부터 듬뿍 집고 돌아가던 도중.

“어, 의원님, 저기.”

내 옆에 붙어있던 양일호가 어떤 테이블을 손가락질했다.

익숙한 뒤통수다. 나는 금세 그에게 다가갔다.

“간 형은 배알도 없어? 거어, 참...”

“에헤이... 기래도... 마...”

“아무리 그래도 형수님이 형한테 그러면 안 돼! 부부도 예절이 있는 건데......”

푸짐한 배불뚝이 아저씨 하나가 쩔쩔매고 있었다. 나는 그를 몰아붙이던 이의 어깨를 뒤에서 두드렸다.

“감기자님.”

“어, 응? 으어!? 어어! 한의원님! 여긴 무슨, 아, 맞다. 한국대라셨지...!”

감기자는 먹다 체한 듯 가슴을 두드리더니 숨을 가다듬었다.

“아니, 오시면 오신다고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놀랐잖습니까!”

“어... 제가 잘못한 겁니까?”

“이번만 특별히 용서해드리겠습니다.”

쓰읍.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감기자는 넉살좋게 웃으며 옆에 있던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간 형. 인사드려. 우리 가족들 구해주신 한승문 의원님.”

배불뚝이 아저씨가 은근히 미소지으며 감기자에게 눈을 흘겼다.

“마, 고만 치대라. 내도 한으원님 보러 온 기다. 아이고마...! 반갑십니더.”

그는 내게 활짝 웃으며 명함을 건넸다.

“하! 씨이...! 대검찰청 이능수사부 간경수 부장입니다. 어르신한테 말씀은 매번 들었는데, 이리 인사가 늦어서야, 원. 죄송합니다.”

“어르신이라 하면...?”

“양판석 으원님이 제 장인어른 되십니다.”

내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양판석의 사위가 상대 후보를 정치자금법으로 기소했기 때문이었다.

“아, 그, 그, 그러면, 저 예전에 선거...!”

“아! 예!”

“저, 정치자금법, 그, 그분...?”

“예!”

나는 최대한 방긋 웃으며 두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아이고! 저야말로 진작 찾아뵀어야 했는데, 제가 경우가 너무 없었습니다.”

“아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먼저 찾아뵙는 게 도리였는데, 이제야 찾아뵙습니다.”

“진즉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사람이 워낙 덜 됐습니다. 한승문입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간검사님!”

“아이... 으원님이랑 사진 찍으가면 우리 아들이 좋아하겠네! 실례가 아니믄 사진 한 방 찍어도 되겠-”

“아! 예! 물론이죠!”

특수통 최고 에이스라서 나 보좌관 시절에도 얼굴 한 번 못 본 사람이다.

정치인이랑 재벌들 전문으로 보내버리는 저승사자라 내가 함부로 대할 인종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내 아군이지만 말이다.

중년과 청년이 찰싹 달라붙어 셀카를 찍는 걸 지켜보던 감기자가 말했다.

“......뭐야, 두 분 아는 사이셨습니까? 그리고 간 형, 장인어른이 양 의원님이었어?”

“마!”

“아니, 나한테까지 비밀로 하면 안 되지! 같이 먹은 술이 얼만데!”

“특수통에서 일하는데 장인이 으원이라고 소문나봐라!”

그치. 재벌이랑 정치인 잡아 조지는 부서에서 일하는데 장인이 의원이란다.

그런 건 아는 사람들만 알아야 효과가 있는 거지, 대놓고 밝혀지면 오히려 안 좋다.

“어, 음. 합석...?”

“아, 예! 드십시다.”

*

사법연수원 갓난애기인 양일호가 공손하게 간검사에게 술을 따랐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지금은 이능 수사부에 계신다고요?”

“아, 예! 요즘은 그, 초능력자들이 하도 사고를 많이 치가...”

대검찰청 부장이면, 지방검찰청 검사장 급이다. 양판석 의원이 빨대를 기가 막히게 잘 꽂았다.

“우리 장인어른이, 하도, 그, 의원님 만나서 밥이라도 함 대접하라고 성화를 내셔서...”

“아이고, 대접은 제가 해야죠. 그리고 나랏일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아이! 제가 압구정 일도 모를 줄 아십니까!”

나는 간검사와 함께 알콩달콩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줬다. 감기자가 작게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이거, 드라마에서 자주 봤는데. 부패한 정치인이랑-”

“시끼야! 니는 말버릇이 그기 뭐꼬!”

“간 형! 나는 그! 한의원님이랑, 어? 압구정이랑 신분당선에서, 어? 총도 쏘고, 괴수도 잡고, 어? 다 했어!”

“씨잘데기 읎는 소리하고 앉았네...”

감기자는 개구지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저, 의원님. 채원이는 잘 지냅니까?”

감기자가 피채원이 ‘귀가 좋다’고 알고있던 덕분에, 나는 무사히 피채원을 거두었다.

녀석은 내 인턴비서다.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예. 이것저것 도와주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고아원 직원들이랑 같이 애들 봐주고 있는데-”

톡. 톡.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자, 자기......”

시무룩한 그 목소리에 나는 기겁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천금순이 울상으로 미소지으며 내 어깨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제가 애프터 신청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 천 상무님.”

“왜 연락이 없어요...?”

양판석 사위랑 양판석이 소개시켜준 여자를 같은 날 같은 곳에서 만난다라.

우연이 참 재밌네. 이거.

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저 마음에 안 드셨던 건 아니죠...?”

“죄송합니다. 사는 게 바빠서...”

“괘, 괜찮아요! 제가 시간 많아요!”

양판석. 천목그룹. 천금순. 어떤 놈이 짠 시나리오인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날 쉽사리 놓아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천금순이 조심스레 미소지으며 감기자와 간검사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 실례지만 한의원님이랑 잠깐 으슥한 데로......”

“아! 예! 데려가십쇼!”

나는 못이기는 척 나를 꾹꾹 잡아당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작은 잽을 날렸다.

“세상이 참 좁습니다.”

천금순이 처연하게 웃었다.

“저는 승문씨 없으면 안 된다니까요...”

너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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