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40화 (40/296)

EP 8 - 재벌집 막내손녀 (3)

아침 8시.

눈꽃에 비친 햇살이 반짝이는 산골.

아침안개가 은은하게 깔린 하얀 호숫가.

이름모를 새소리가 들려와 산뜻한 기분이다. 아직 어둑한 세상이지만 산골짜기 너머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기분이 싱싱하다.

중국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그 절경絶境에서, 호숫가 자락에 한 노인이 앉아있었다.

그는 노스페이스 화이트라벨 델튼 자켓 BLK를 입고 기아 타이거즈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양판석은 야구에 별 관심이 없으면서도 기아 타이거즈가 광주에 연고지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구 관리 차원으로 종종 팬 행세를 하고 다니곤 했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뒤돌아보며 마스크를 내렸다. 양판석이 방긋 웃으며 입을 열자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왔나?”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맘 같아서야 부산 앞바다나 나가보고 싶었는데. 목숨이 아까워서 원......”

바다에도 괴수가 있다.

아무튼 너스레를 떨며 인사를 나누었지만 기분이 썩 깔끔하지만은 않았다. 그가 보좌관을 데려오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즉, 낚시를 하자는 게 아니라.

뭔가 비밀스럽게 할 말이 있단 소리다.

덕분에 이 첩첩산중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그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늦는군. 내 이럴 줄 알았지.”

“예?”

“흐음, 아닐세.”

그는 내게 자리를 권하며 눈웃음쳤다.

“오랜만에 이야기나 조금 하지.”

* * *

“세상이 참 혼란한데 오히려 정치권은 평화롭더군. 국회, 정부, 검찰, 여야가 힘을 합치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어.”

나는 따뜻한 믹스커피를 담은 종이컵을 홀짝였다.

“......괴수 잡는 덴 관심도 없고 땅따먹기만 하는 거 보면 조금 불안합니다.”

“으음?”

“벌써 자기들끼리 서울 재건사업 발주예정 놓으면서 시시덕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원래 없는 돈으로 돈놀이하는 게 제일 위험한 건데......”

“언론을 틀어잡고 있으니 리스크가 없어진 게지. 욕할 사람이 없으니. 그래도 나름  우리한테 피해 안 가는 선에서 귀엽게 놀고 있지 않나.”

“지켜야 할 선이 그 선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이 마당에 선이 어디있나. 괜히 적 만들지 말고 우리는 우리 앞가림이나-”

"에푸칭!“

“......”

“아, 죄송합니다. 감기라서...”

킁, 나는 멋쩍게 웃으며 낚싯대를 던졌다. 찌가 호수 위에 둥둥 떠올랐다. 나는 양판석에게 물었다.

“선거는 언제랍니까?”

현행법상으로 대통령은 60일 내로 뽑아야 했고,

비례대표는 즉시 기존 후보자로 충원해야 했으며,

국회의원 보궐선거는 내년 4월이었다.

“서울에 고립된 시민들이 투표를 못하고, 의원들 생사를 파악할 길이 없으니, 당분간 현 체제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네.”

법 조까고 우리가 계속 해먹자는 소리다.

“흐음. 대충 예상은 했습니다만. 국민들이 그걸 납득하겠,

아! 이제부터 그걸 납득시켜야겠군요.”

정치권이 단결한 이상 국민을 ‘납득’시킬 방법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우선 한국 언론의 유구한 전통인 통계의 마법을 시전할 수도 있다. 원옥분 권한대행의 지지율이 역대 최고라고 보도하면 너도나도 원옥분 지지할거다. 심리라는 게 그랬다.

아니면 만만해진 재벌 하나 잡아다가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두드려 패는 것도 괜찮다. 갑질-사이다는 언제나 먹히는 공식이니까.

이미 반쯤 호구가 된 사법부를 조지는 (원래 대법관이 선관위원장이다) 방식으로 선관위에게 총대를 씌워서 밀어버려도 되고,

혹은 양당이 싸우다 화해하는 척 연극을 해도 괜찮다.

방법은 다양했다.

“......권력이라는 게 뭉치니까 창의력만 있으면 별 짓을 다 할 수가 있군요.”

“그래서 우리네들이 지금껏 정권 잡겠다고 피튀기게 싸운 것 아닌가?”

대부분이 죽어서 해결된 상황이지만, 어쨌든 우리가 권력의 공백을 틈타 피라미드 꼭대기에 안착했다는 건 확고한 사실이었다.

양판석이 비전을 제시했다.

“앞으로 능력있고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대국을 그려 봐야지.”

윗물 수질관리 좀 하자는 소리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지 않도록.

우리가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선별된 인원만 피라미드 위쪽으로 끌어올려주자. 이 말이었다.

짜게 식은 눈으로 양판석을 바라보자, 그가 멋쩍게 웃었다.

“조금 구태스러웠나?”

“네, 조금 적폐스러우셨습니다.”

“나, 참. 뱃지 달았다고 요즘 노인한테 말이 심해졌군. 더 욕보기 전에 죽어야 하는데......”

“아, 왜 그러십니까, 죄송하게!”

양판석은 낚싯대를 붙잡고 피식 웃었다. 고요한 호숫가에 노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말일세. 뼛속까지 민주투사였어.”

양판석은 운동권 출신이었다. 사수대 수십명 데리고 다닌 오야붕이기도 했고, 늦깍이 판사로 임용되어 수차례 사법파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물론, 그 경력도, 지금의 말도,

모두 과거형이다.

그는 13년차 정치인일 뿐이다.

“이념을 떠나 삼촌이 억울하게 삼청교육대 끌려가서 맞아죽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지.”

양판석은 현대사를 줄줄 읊기 시작했다.

“헌데, 독재정권 몰아낸다고 별 짓거리를 다했는데, 정작 양김이 치고받다 노태우 당선됐을 때. 내 기분이 어땠었겠나?”

13대 대선. 민주화 세력 내분과 어부지리.

“YS가 DJ 뒤통수 까고, JP랑 노태우 손 잡았을 때는 어땠겠고? 그나마 이건 하나회 청산으로 이어졌으니 그렇다 치지.”

삼당합당. 김영삼의 배반, 혹은 묘수.

“DJ가 전두환을 용서하고 사면하겠다고 했을 때, 판사로서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던 내 기분이 어땠겠나?”

양판석은 무표정으로 한참동안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으로만 웃었다.

“자네는 이해 못하겠지. 잘 알지도 못하겠고. 당연한 거야.

어중간한 현대사는 교과서에 나오지도 않고, 사람들 머리에 남기에는 어중간하게 옛날 일이 되어버렸고. 쯧... 이제는 어디 인터넷 구석에서 정치 매니아들 싸움 주제로나 쓰이는 일들이지.

심지어는 언플할때 빼들어도 너무 옛날 일이라 별 효과도 없다네. 운동권도 노땅취급 받는 마당에, 상도동계고 동교동계고 이미 퇴물 신세니......”

그는 낚싯대를 만지작거리며 옅게 웃었다.

“하지만, 이게 내 인생이었어. 나는 항상 내 믿음과 타협하며 현실을 인정했고, 나이를 먹으면서 나를 조금씩 깎아내는 법을 익혔지. 기실 이건 정치꾼 말고도 다들 그럴 거야.”

“......”

“자넨 정치에 정답이 있다고 보나?”

나는 망설임없이 고개를 저었고, 양판석은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리고서,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말을 이어갔다.

항상 의식적으로 웃는 얼굴을 유지하던 그의 주름진 얼굴에서, 웃음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살아.”

그는 정치인의 본질이 생존이라 말했다.

“모든 정치적 발전은 생존 과정에서 발생한 포퓰리즘에 불과하네. 표를 얻기 위한 공약. 그 이상의 의미는 없어.”

그는 정치인의 직무가 허상이라 말했다.

“이념과 정의를 믿지 말게. 좌파 우파 모두 헛것이야. 세상에 절대적인 악은 있어도 절대적인 선은 없으니.”

그는 정치인의 신념이 헛것이라 말했다.

“이념과 정의에 흔들리다 갈려나간 사람을 내가 한두명 보는 줄 아나? 괜히 힘 뺄 필요 없어. 자네가 50대, 아니, 40대만 되어도,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거물이 될 게야.

젊을 때 치대다가 퍼지지 말고 길게 보게. 굳이 무언가를 이루려고 들지 마. 살아남으면 다 강해지게 되어 있어. 그게 이 나라 시스템이야.”

살기 위해 살라고 한다. 13년차 정치인이 정치인의 꿈과 의지를 부정했다.

“일단 살기 위해 발악해. 정치꾼은 다른 걸 볼 정도로 여유있는 짐승이 아니야.”

양판석이 이런 목소리로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바람에 어깨 근육이 욱신거렸다.

“......무어.”

양판석이 방긋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 하나 소개시켜주려고 부른 건데. 어째-”

부르릉. 엔진 소리와 함께 자동차 하나가 이쪽으로 올라왔다.

딱 봐도 운전 개초보다. 차량은 비틀거리다 멈췄고, 거기서 어떤 양복쟁이 여자가 내려 이쪽으로 허겁지겁 뛰어왔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양판석은 느물거리는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붓한 시간 되시게나.”

둘 다 낚싯대에 미끼를 안 꿰고 있었다는 점에서, 공허한 대화에 불과했다.

*

“......아, 저어. 한승문 씨!”

나보다도 작은 덩치의 그녀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짙은 다크써클과 좁은 어깨 때문인지 정장이 몸보다 조금 커보였다.

그녀가 작고 흐린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문을 텄다. 처진 눈썹 때문에 울상으로 보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아...”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키고서, 떨리는 손으로 나와 악수했다.

나는 걱정스레 말했다.

“......안 추우세요?”

“아, 예... 괜찮습니다...”

괜찮은 것 치고는 많이 떨고 있었다.

*

일단 그녀를 내 차로 데려왔다.

“흐아아...! 살겠다아...”

날씨가 이모양인데 겉옷도 없이 양복만 입고 있으면 쓰나. 히터를 틀어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후끈해졌다.

“이거 좀 드세요.”

“감사합니다아...”

그녀는 살풋 웃으며 내가 건넨 보온병을 받아들었다.

처진 눈썹 때문에 그냥 웃어도 쓴웃음 같다. 묘하다.

그나저나 오붓한 시간이라. 양판석이 지금 뚜쟁이 마담 역할이라도 한 건가.

문득 그녀가 나를 보며 쓰게 웃었다.

“사, 사진보다 많이 피곤해보이시네요...”

“......아, 예. 요즘 잠을 못 자서.”

“괜찮아요! 저도 불면증이라...!”

“그, 그러셨습니까?”

묘령의 여인은 오묘한 표정으로 미소지으며 나를 바라보다가, 툭 말을 던졌다.

“아, 맞다...!”

“...예?”

“자, 잠시만요, 차에 두고 온 게 있어서...”

그녀는 하이힐 두 개를 손에 걸고, 스타킹 차림으로 두꺼운 눈밭 위로 내려갔다.

“앗, 찻찻차...!”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자동차에서 서류가방을 들고 돌아왔다.

“여기요...!”

그녀는 내게 서류 한 장을 내밀며 요상한 울상으로 미소지었다.

“저랑 썸 타실래요?”

“......누구신데요?”

“천목해운 천금순 상무입니다...! 할아버지가 천목그룹 회장님이세요...”

“아, 예, 금순 씨.”

“근데 저, 그 이름 싫어해요......”

어쩌라고요.

“아, 그러면 뭐라고 불러드려야...?”

그녀가 처진 눈썹을 기울이며 눈웃음쳤다.

“순이!”

“그으, 뭐냐, 천금순 상무님은 저랑 그으......”

“썸이요.”

“......예, 이성으로서 좋은 교류를 이어가고 싶으시다는 것 같은데. 지금 주신 계약서 보면 앞쪽은 마석 거래 같은데, 어째 뒷면에도 내용이 있네요?”

그녀가 건넨 건 이면계약서였다.

“으음, 공정위랑, 검찰이랑, 이혼이랑, 뭐, 이것저것 엮여있는 내용입니다! 있다가 집에 가서 천천히 읽어 봐주세요......”

“그러니까, 저랑 결혼해서 뭔가 그, 상호간의 이익을 도모하고 싶다. 그런 취지의 정략결혼을 제안하시는 겁니까?”

“넵...!”

“싫습니다.”

*

“아, 안돼요...!”

“아! 왜 이러십니까!”

천금순이 희번뜩한 눈빛으로 내 손목을 잡아챘다.

“저, 저 돈 많아요!”

“돈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작게 손톱을 뜯으며 하나하나 제안을 건넸다.

“그러엄... 평생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해드릴게요.”

“안 믿습니다.”

“혹시 지역구 관리는 필요 없으신가요? 일자리랑 투자유치 공약 잘 뽑아드릴 수 있어요... 통영에 조선소 하나 있는데......”

“저 민주당인데 그런 거 하면 욕먹습니다.”

살짝 솔깃했네.

“그, 그, 이모님께서 예전에 억울한 피해자 소송 패소시켜서 자살시켰던 거...”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이모가 잘못하신 건 맞지만, 저는 그때 중학생이었습니다.”

“아, 아뇨! 그거 저희측 대관담당자들이 움직여서 JTN에서 터뜨리려고 했던 거 무마시켰습니다. 유족 분들께도 소정의 보상을 건네드렸고요... 입단속도 조금...”

“......그건 감사하네요. 다른 방식으로 성의 전하겠습니다.”

그녀는 울상으로 내게 말했다.

“그, 그냥 사귀어주시면 안되나요?”

“그, 천목그룹 측에서 사업을 제안하시는 거라면, 조금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연락 주십쇼. 저 그렇게 막힌 사람 아닙니다.”

“저는 사업으로 끝낼 생각 없어요!”

“예?”

“저, 저는 승문 씨 없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

......저희가 컨테이너선도 몰고, 닭도 팔고, 납도 녹이고, 정유도 하고, 책도 팔고, 이것저것 문어발로 많이 했거든요...

전형적인 대기업이죠. 재계 서열 십 몇위더라...? 아무튼 19위인가 21위인가 할 거에요. 맨날 오락가락해서...

근데 제가 서울에서 백화점 하나 운영했거든요...? 지금은 무너졌지만. 아무튼 그때 평소처럼 업무보고 있는데 게이트가 열린 거에요.

......간신히 살아서 근처 아파트 단지에 합류했죠. 네, 압구정이요. 저 압구정 캠프에 있었어요.

거기서 생전 처음으로 밥도 굶고, 씻지도 못하고, 사람 죽는 것도 많이 보고, 심지어 병까지 걸려서 이대로 죽는건가 싶었는데...

한승문 의원님이 기적을 일으켰던 거에요.

......네, 그때 이후로 많이 뵙고 싶었죠. 근데 정치인이랑 기업가라는 게,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조합은 아니잖아요.

괜히 민폐인가 싶어서 근처만 맴돌다가, 간신히 양판석 의원님이랑 연줄이 닿아서, 처음으로 이렇게 단 둘이 있게 됐네요... 헤헤...”

천금순은 배시시 웃으며 머리를 꼬았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저어, 그럼, 신분당선에도 같이 계셨던-”

“...? 예? 아, 아뇨. 저 부산 사는데?”

“......”

“근데 이게 대중들이 썩 납득할만한 시나리오가 아닌가 싶어서......

선거자금 그냥 지원해드리면 정치자금법 걸리잖아요... 그러니까 일단 결혼을 한 다음에 돈을 굴려야 하는데에...

괜히 정경유착이라고 욕 덜 먹으려면 언플하기 좋은 와꾸 하나 정도는 있어야......

아,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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