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6 - 핵폭탄급 대사건 (2)
“깁스는 언제 푼대?”
“으음?”
소파에 널부러져 있던 여도연이 감자칩을 우물거리며 심드렁하게 TV로 눈을 돌렸다. 그녀는 오른팔에 감아둔 깁스를 파닥파닥 흔들거렸다.
“이미 나았는데?”
“......그러면 붕대는 왜 감고있는 거야?”
신분당선 탈출하던 적 생각만 하면 아직도 오한이 치민다. 그녀의 오른팔은 역관절로 꺾인 상태에서 괴수에게 물려 힘줄만 남아 덜렁덜렁거렸었다.
여도연은 잠깐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아니, 그 곤죽이 났는데 힐 한번 받고 나은 게 조금 이상하잖아.”
“......그런가.”
“뭐, 그냥......”
그녀는 늘 그렇듯 대수롭잖게 웃었지만.
“정상인 코스프레 함 해보는 거지 뭐.”
살짝 슬퍼 보였다.
“누나, 나랑 어디 좀 갔다오자.”
“싫어.”
“오랜만에 어? 남매가 오붓하게 좀 걷자는데 왜 이리 까다로우세요!”
여도연은 내게 시선도 주지 않고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허스키하고 싸늘한 비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거지같은 신분당선 사흘밤낮으로 걸었으면 됐지. 이 밥팅아.”
“그러고보니 누나 내 수행비서 아니야? 의원이 가자는데 자꾸 그러네.”
“때려칠게요. 수고하세요.”
바사삭. 그녀는 후줄근하게 소파에 널부러져 감자칩을 질겅거렸다. 저거, 저, 저, 운동 때려쳤다고 나트륨 퍼먹는 것 좀 보게.
“아주 살이 토실토실해. 그치?”
여도연은 가벼운 비웃음으로 공격을 흘려넘겼다. 지도 지가 날씬한 건 아는 모양이다. 근육이 조금 사라지긴 했지만 매우 양호한 상태긴 했다.
여도연이 피곤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돌이야. 아이돌, 아주......”
“뭐?”
“어제 너랑 버섯전골 재료사러 나갔을 때 사람들 들러붙는 거 못 봤냐? 방탄이야?”
“내가 좀 생길만큼 생기긴 했는데......”
가벼운 농지거리로 흘려 넘기긴 했지만, 지금의 세상이 이 한승문이를 주목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원래 난세에 사람들이 찾는 건, 악당과 영웅이다.
나는 그 꿀보직을 둘 다 해먹었고 말이다.
사고현장에 깔짝거리다 사고친 민폐 정치인으로서 십수일동안 전국민의 욕받이가 되었다.
동시에, 기적적인 압구정 대탈출을 주도하고, 심지어 그 모든 장면이 감기자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전국적인 영웅이 되었다.
정치인이라는 생물이 좋든 나쁘든 인지도 갉아먹으면서 사는 짐승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나는 내 인생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
여도연이 슬슬 습관처럼 까칠하게 구는 걸 끝냈는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물었다.
“아, 씨이... 어디가는데?”
“등산.”
“그럼 그냥 이대로 가면 되겠네.”
여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털자 사자가 갈기를 흔드는 것 같았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아이고, 허벅지 다 나오는 반바지에 반팔 후드티를 입고 간다고?”
“어쩌라고. 더운데.”
“양복입고 나와. 양복입고......”
그녀가 해괴하다는 듯 질문했다.
“양복입고 등산을 해? 정상이냐?”
“아, 좀. 어차피 차타고 갈 거야.”
“아 어디가는데 새꺄......”
글쎄다.
“국가기밀.”
*
충청도 인근의 야산. 우리는 새까맣게 썬팅한 에쿠스를 타고 산기슭에 도착했다.
나이 지긋한 운전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착했습니다. 의원님.”
“아, 예. 감사합니다.”
밖에서 기다리던 경비병들이 차 문을 열었다.
우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차에서 나왔다. 맑은 산공기가 불어오지만 주변을 서성이는 군인들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하다.
여도연이 묵묵히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꺼냈다.
늘 그렇듯 보는 사람 무서워지는 무표정이었지만, 왼쪽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간 것을 보니 지금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군사통제구역. 출입금지. 경고문. 7452 부대.
험악한 단어들로 나열된 안내판이 매달려 있다. 여도연은 천천히 휠체어를 끌며 그 옆을 지나갔다.
“죄송합니다. 의원님 본인만 출입 가능하십니다.”
군인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뭔가,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휠체어 끌어줄 사람은 필요합니다만.”
“필요하시다면 제가-”
임기응변에 나선다.
“제가 허락 안 합니다.”
나는 삿대질하며 엄중히 경고했다.
“이 사람은 내 가족이고, 공식적인 비서고, 경호원이고, 압구정 탈출작전 당시 최전선에 섰던 초능력자에요.
게다가 나는 거동에 비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이이는 내 정무를 돕는 과정에서 기밀까지 열람할 수 있도록 허가된 사람입니다.”
“아, 그......”
“충분한 설명이 되었습니까?”
군인은 잠시 망설였다. 개인으로서 행동할 수 없는 사람의 딜레마였다.
“지금 내 휠체어를 끌어준다고 했는데. 당신은 뭔데 나랑 같이 국회에 들어가려는 겁니까? 비서관이 못 들어가는데 일개 군인이 나랑 동행한다고요?”
“아, 아니, 의원님들 말고 다른 이들의 출입은 금하라는 명령이-”
“명령입니까 법령입니까.”
나는 위풍당당하게 법적 개소리를 지껄였다.
내가 기분이 아니꼬와서 갑질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7452 부대라는 이름과, 이 근방을 둘러싼 군인들에게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개 군인이 의원한테 0급 통제구역에 같이 들어가자고 그랬다.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시다바리를 갈구고 있으니 드디어 몸통이 기어나왔다. 무궁화 세 개가 내게 다가와 짧게 경례를 올렸다.
“충성. 죄송합니다, 의원님. 장승연 대령입니다. 좌표까지 모시겠습니다.”
영관급 치고는 너무 젊다. 그리고 뭔가 양복쟁이 느낌이 난다.
게다가 7452 부대라. 양판석 의원이 정보위 역임하던 시절에 들어본 적 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4 남북공동선언을 위해 휴전선을 넘은 날이 5월 2일이라서 가끔 정보기관에서 7452부대를 사칭한다고 들었다.
물론, 널리 퍼진 속설이다.
그리고 군인은 고급시계 안 찬다. 윗사람한테 밉보일까봐.
즉,
국정원이 군복을 입고 있다.
또,
그걸 티내고 있다.
일부러.
*
“어어, 왔나?”
“아니, 들어오는 게 뭐 이리 힘듭니까?”
그가 안내한 길 끝에는 커다란 펜션 하나가 있었다. 나는 펜션 입구에서 기다리던 양판석과 인사를 나누었다.
“장대령이랑은 만나봤나?”
“군인 아니던데요.”
“자네라면 알아볼 줄 알았네.”
그는 여도연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자네도 왔군. 내 처자 덕분에 든든허이.”
“아, 그으...... 오랜만에 뵙습니다. 양의원님.”
“부끄러워하기는. 여기 1층 냉장고에 치킨도 몇 마리 있으니 렌지에 돌려서 먹게나. 나는 한의원이랑 어디 좀 다녀올테니......”
여도연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펜션 1층에 남았고 우리는 지하실로 들어갔다. 가정집처럼 보이던 인테리어가 삭막한 콘크리트로 바뀌었다.
우리는 한참동안 걸었다. 노인과 장애인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절뚝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국회의사당을 탈출하던 적 생각이 났다. 양판석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옛날 생각나는군.”
“아직 한 달도 안 됐습니다.”
“허! 한 달도 못돼서 세상이 이 꼴이 나다니......”
원형 계단은 아주 깊게 파여 있었다. 양판석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화당 일곱, 민주당 다섯이야. 우리까지 포함해서.”
“거기서 탈출한 사람이 12명 뿐이라는 겁니까?”
“그야 모르지. 누구 더 살아있을 수도 있는 일이고 말일세.”
물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대체 다들 어디 숨어있었답니까?”
“숨어있던 게 아니야.”
양판석이 내 귀에 속삭였다.
“전부, 우리보다 일찍 구출된 사람들이네.”
“!”
“...차재균에게 잡혀있었던 게지.”
*
“자아, 다 도착했네.”
“......굉장히, 크군요.”
국가기밀 0급에 해당하는 전쟁용 지하 국회의사당은 웅장한 크기를 자랑했다. 300인의 의석이 반원으로 위엄있게 배치되어 있다.
비록 지하 벙커를 겸하는 곳인지라 천장도 낮고 기둥도 여럿 있지만, 그럼에도 지하에 이정도 시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다.
이 거대한 강당을 사용할 사람이 고작 12명 뿐이라니. 아이러니다.
수많은 공석空席 가운데 가장 앞줄에 사람들이 앉아있다. 양판석이 인자한 목소리로 인기척을 내었다.
“우리 왔습니다.”
“으음? 아! 한승문 의원 아니십니까?”
“처음뵙겠습니다. 한승문입니다.”
옹기종기 앉아 홍삼젤리를 까먹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영차영차 일어나 우리를 반겨줬다. 평균나이 55.5세의 국회는 여전히 그 연륜을 자랑했다.
어차피 누가 누구고, 뭐하는 사람인지는 기본적으로 머릿속에 넣어둔 상태다. 외울 필요는 없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12명 사이의 분위기는 썩 화기애애했다.
사실 TV에 나오는 것처럼 국회의원들끼리 사이가 험악하지는 않다.
물론 말마따나 'TV‘에 나올만한 사람들이라면 당에서 대표나 3역(원내대표, 사무총장, 정책위의장)을 지고있기 때문에 평소에도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우지만,
평의원들은 카메라 앞에서는 개처럼 물어뜯고, 의사당 지하 2층 건강관리실(헬스장&사우나)에서 바나나 우유를 까며 악수를 나누곤 했다.
12명 중, 'TV'에 나올 급은 세 명 뿐이었다.
4선 양판석. 민주당 너구리.
초선 한승문. 서울의 영웅.
그리고.
“원옥분이에요. 반갑습니다.”
“처, 처음뵙겠습니다, 원의원님.”
아주머니와 할머니 사이의 중노년이 무표정으로 내게 악수를 청했다. 물론 정치 17년차가 웃음도 제대로 못 지을 리가 없다.
그저, 칼에 맞아 얼굴 신경이 죽었을 뿐이었다.
“압구정 이야기는 들었어요. 한의원님이 고생이 참 많았겠어.”
“아, 아닙니다.”
흉측하게 파여버린 왼쪽 눈의 칼자국.
기나긴 애꾸눈으로 인해 희뿌옇게 물든 오른쪽 눈.
외알안경. 그 속에서 풍기는 카리스마.
1990년. 노태우 정권 10.13 선언.
통칭 ‘범죄와의 전쟁’
최전선에서 조폭들을 갈갈이 찢어죽인 강력통 검사.
공화당 5선 의원. 원옥분.
“힘든 시기에 잘 해보지요. 한승문 의원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과찬이십니다. 원의원님.”
거물 하나가 살아 있었다.
*
의장석에는 누구도 서지 않았다. 그저 원탁의 모임처럼 둘러앉아 자유롭게 대담을 나누었다.
물론 암묵적인 의사진행은 양판석과 원옥분에게 있었다.
원옥분이 희끄무레한 외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단, 한승문 의원이 발의한 괴수대응 특별위원회에 대해서는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양판석이 곧장 지원사격에 나섰다.
“국가존망의 위기에 절차에 매이는 건 안 될 일입니다. 특별위원회를 설치해서 임시적인 초법기관을 구성하는 방안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우선, 지금 실종 상태의 의원들을 잠정 궐원하려고 하는데. 어찌들 생각하시는지?”
두 잠룡이 합을 맞추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숨에 제적 국회의원이 300명에서 12명으로 줄어들었다. 이게 정치다.
우리는 여러 안건들을 처리했다.
국회의원 중 널린 게 법조인이라는 것 또한 신속한 일처리에 일조했다. 애초에 양판석도 판사 출신이었으니 말이다.
국회의장의 부재와 법제사법위원회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우리 프로페셔널한 법꾸라지들은 힘을 합쳐 영차영차 안간힘을 썼다.
우선, 양판석의 주도 하에 ‘한승문 재단’의 법적 정당성을 만들었다.
괴수 퇴치의 공익성을 인정하고, 재단 정관에 관한 법안을 몇 줄 수정하는 게 끝이었다. 범죄가 순식간에 합법으로 바뀌었다.
또,
“그으, 괴수대응에 관해서는 혹시 의견 있으십니까? 아, 네. 한의원님 말씀해보세요.”
내가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도 있었다.
“강력하게 나가려면 초능력자 이민을 막고, 부드럽게 나가려면 마석 상거래부터 잡아야 합니다. 특히 후자는 필수적이라고 봅니다.”
“마석, 이요?”
“괴수 시체에서 나오는 보석인데 초능력자가 그걸 흡수하면 강해집니다. 마석을 국가전략자원으로 지정하면 국내 업계는 정부가 잡는 겁니다.”
“흐음. 그러면 기업에서 반발이 심할 텐데요.”
“일단 묶어놓으면, 풀어주는 게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나중에는 묶지도 못 할 겁니다.”
해석 : 규제 풀어주고 기업한테 뭐 받아먹을 수 있다.
모든 의원들이 방긋 웃었다. 원의원 빼고.
나는 신중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마석 부스러기보다 원형이 더 가치가 높습니다. 비례세를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옥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합시다. 혹시 또 다른 의견 있습니까?”
“아, 초능력자들의 무력행사에 관해서 말입니다만......”
우리는 한참동안 토의를 계속했다. 분열되면 안 되는 시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의견이 엇갈리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나왔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언제까지 비워둘 수는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