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5 - 사냥꾼들 (9)
11시간 전.
“저기요!”
누군가 내 뺨을 툭툭 쳤다.
“저어-기이-요오-?”
세상이 어둡다. 창문 커튼 사이로 달빛이 내리쬐었다.
새벽의 병실에서,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홍, 선아 씨?”
“네에-! 저에요.”
중단발 끝을 붉게 염색한, 아니. 머리카락 끝이 마력으로 붉게 물든 여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생글생글 미소지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홍선아 씨는 무사하십니까?”
“재단을 하나 운영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녀의 미소가 살짝 미묘해졌다. 웃는건지 무표정인건지 구분할 수 없는 얼굴이다.
“따로 알아보니까. PMC를 세우실 예정이라던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각성자 중엔 청력이 좋은 사람도 있잖아요. 뭘.”
나는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잖아도 날 밝으면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김춘식 아저씨한테요?”
“......예.”
그녀가 생긋 웃었다.
“TV에서 우리보고 대단한 사람이래요!”
“......네, 과분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 있군요.”
“서울을 빠져나온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나요?”
“아무래도 그렇죠.”
“아니에요.”
홍선아가 다시금 미묘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각성자들이 서울을 빠져나가는 건, 정말 쉽고 간단한 일이었어요.”
“......그렇습니까?”
“민간인을 ‘달고’ 이동하는 게 번거로운 거죠.”
홍선아는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몸을 기대었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자뭇 서늘했다.
“근데, 민간인들이 집 밖으로 나가기 싫다고 징징대는 것 때문에. 서울에 남는다?”
그들이 압구정에 남아있던 이유였다. 홍선아는 안타깝다는 듯 미소지었다.
“흐음. 이건 좀 아닌 것 같죠! 그렇죠?”
“글쎄요.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승문씨는 헌터 아닌가?”
그녀가 내게 쓴 첫 반말이었다.
“우리. 사이좋게 어깨동무하고서. 그 어둡고 지옥같은 길을 헤쳐 왔잖아요. 그러면 이제 뭐어, 썸씽이 통한 거 아니에요?”
“뭐어, 뭘 그리 거창하게까지야.”
“후우!”
그녀의 입술에서 나온 불똥이 허공에 번뜩였다. 작은 초롱불 하나가 둥둥 떠다녔다.
“얍얍!”
그녀는 허공에 손짓하며 내 얼굴 근처로 불꽃을 들이밀었다.
너울치는 그것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따뜻하죠?”
그리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상황에서 홍선아가 마음먹으면 나는 타죽는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침대맡에 앉아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불꽃에 내 손을 집어넣었다.
“자아, 움직여 봐요.”
“......아름답군요.”
“여기, 종달새도 만들어보고, 물고기도 만들고...”
허공에 일렁이는 불꽃이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꾸어 간다. 어두운 병실에 종달새 하나가 달빛을 맞으며 헤엄쳤다.
“맞다!”
그녀는 순식간에 불꽃을 꺼버리더니, 아차 했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이것도 치즈참치마요떡볶이 알려준 친구가 전해준 기술이에요.”
“......네.”
“그 친구는 물을 다뤘었는데, 압구정 캠프를 지키다가 죽었어요. 총맞아서.”
홍선아가 자뭇 미소지었다.
“얘는 총맞아서 죽은 거에요? 아니면 민간인들 징징대는 거 들어주다 죽은 거에요?”
상당히,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 나는 이 시점에서 입꼬리를 내렸다.
“에이!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그, 뭐냐. 그래. 매그니토! 그 아저씨처럼 초능력자들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또라이는 아니니까요!”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침대 난간에 턱을 올렸다.
“그냐앙. 각성자가 민간인을 위해 무조건 헌신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윽시. 제가 사람 잘 찾았네요!”
욥! 그녀는 내게 장난스럽게 주먹을 내밀었다. 나는 사무적으로 웃으며 그 주먹을 툭 쳐줬다.
“으음. 예전부터 자꾸 군대를 안 좋게 평가하시던데.”
“......”
“초능력자들이랑 친하게 지내시고 싶어하시는 거 맞죠? 그럴려면 재단에 우리를 끌어들일 심산일 것이고? 그 수단은 말마따나.”
홍선아가 내 가방에 들어있던 계약서를 꺼내들었다.
“용역 회사, 를 가장한 민간군사기업.”
“......상당히 손버릇이 나쁘시군요.”
“맞죠?”
“맞죠.”
홍선아는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계약서를 불태웠다. 잿가루는 자연스레 창문 밖으로 흘러들어갔다.
“춘식이 아저씨는 잘 모르겠지만. 정확히는 너무 고결하셔서 우리를 이해 못하시겠지만.”
“......”
“원래부터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냥, 딱히 반항을 못한 거죠. 춘식이 아저씨한테 목숨빚을 입은 사람들이니까.”
홍선아는 사뭇 걱정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만약에, 춘식이 아저씨가 지분을 아주 많이 가져가고. 나머지는 겉절이처럼 쪼개가지면. 누군가는 쪼끔 섭섭할 것 같아요. 그 아재 낭만 들어주다가 사람 여럿 다치고 죽었는데......”
“그게 당신입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방금 계약서처럼, 지분 공정하게 분배하지 말고. 춘식아재 30. 저 10. 떨거지 0.5. 이렇게 새로 만드는 건 어떨까요?”
해석 : 내부분열의 명분을 만들어달라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그렇게 하면 재단이 기존보다 더 많은 지분을 먹게 되니까. 무려 40이나.
홍선아가 덧붙였다.
“승문 씨도 아저씨가 혼자 밀어붙이는 거 받아주는 것보다는. 회사에 완충제가 있는 편이 더 좋지 않나요?”
사실 완충제는 이미 끼워놓은 상태였다. PMC 행정팀 모두가 양판석과 내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선아라는 묘수는 상당히 탐나는 종류의 것이었다.
다만.
“회사 열자마자 깽판치면 썩 재미가 없을 것 같은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예절은 아는 여자니까. 그리고 아직은 그럴 생각도 없고요.”
‘아직’이라.
“상당히 먼 곳을 바라보시는군요?”
“친구의 죽음은 가슴에 영원히 남으니까요.”
홍선아는 쓰게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한승문 의원님. 제가 춘식이 아저씨를 쫓아내고 권력을 잡겠다는 게 아니에요.”
“......”
“각성자들이 무조건 영웅 노름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이죠.
문제는, 김춘식이라는 영웅은 언젠가 우리에게 그 짐을 흘릴 것이라는 거에요. 어떤 식으로든.”
홍선아는 슬프게 미소지으며 나를 붙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냥, 친구를 또 잃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나는 처연하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한 그녀의 눈망울을 보며 곰곰이 판단했다.
이 요망한 눈빛.
이걸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고.
그녀는, 압도적인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늑대 앞의 우리를 방관한 사람이었다.
데이비드 김이 늑대 머리에 기름을 묻히기 전까지 그녀는 능력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뻔뻔하게 내게 붙어 사과까지 했다.
능력을 숨긴 것 또한 마찬가지다. 조직의 이익이 관련되어있다고는 하나.
내가 정치권 사람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그녀의 거짓말은 정도 이상으로 자연스러웠다.
언제나 그렇듯, 판단은 빨랐다.
지금 그녀의 꿍꿍이가 중요한 게 아니다.
“......퍽 합리적인 제안이군요.”
달빛 스며드는 어두운 병실에서.
허공에 여우불 하나 동동 띄워놓고.
사냥꾼들 사이에 은밀한 악수가 오갔다.
누가 누굴 잡아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최고의 사냥꾼과 함께 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정한 사냥꾼은, 사냥감을 가리지 않는다.
“별 말씀을요. 한승문 헌터.”
괴물이든. 사람이든.
EP 5
사냥꾼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