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5 - 사냥꾼들 (8)
근방에 있는 모든 군인 시체에서 소총을 주워 와서 군필자들을 무장시켰다.
현대아파트에서 압구정 역까지. 고작 50m도 안 되는 구간을 이동하며 괴수의 산을 쌓았다.
압구정 역에서 신사역까지. 고작 한 정거장을 이동하는동안 홍선아가 다섯 번 기절했고, 나는 세 번 기절했으며, 여도연과 데이비드 김이 우리의 목숨을 열 번 이상 구해냈다.
후방을 맡은 20인의 각성자들은 1200명이 압구정역으로 들어가는 동안 한 사람의 희생자도 만들지 않았고, 일곱 명이 불구가 되었다.
신사역에서 신분당선으로 환승하는동안 홍선아와 내가 각각 두 번씩 기절했고, 우리를 뒤에서 치료하던 할머니가 여기서 정신을 잃고 탈출까지 깨어나지 못했다.
신분당선의 기나긴 지하통로를 지나는 동안, 한 마리의 거대괴수의 습격을 받았다. 데이비드 김이 홀로 괴수를 잡아내고 한쪽 팔과 눈을 잃었다.
충격파에 자극받은 소형 괴수들이 습격했고, 홍선아와 내가 그들을 불태웠다. 끔찍한 매연으로 인해 수백명이 화상을 입었다.
강남역. 차재균이 급파한 특수부대와 처음으로 접촉했다. 허나, 대규모 지원은 없었다. 돌파 과정에서 각성자 여섯이 불구가 되었다.
양재역. 우면산에 고립돼있던 수도방위사령부 잔여 인원들이 기적적으로 합류했다.
청계산 입구역. 1200여명의 생존자들이 지상으로 올라왔다.
* * *
나는 병실에서 눈을 떴다.
“......으음? 아! 일어났군!”
양판석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누군가를 불러왔고, 나는 약기운에 취한 채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이런저런 조치들을 당했다.
나는 간호사들의 손에 이끌려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나는 멍하게 TV를 보았다.
어두운 동굴에서 붉은 눈을 흉흉하게 빛내는 들개 수십마리가 무리지어 달려든다.
- 1시 방향! 2조 사격!
- 샤냥팀 진입 시작!
- 마석 흡수하고 4번 출구에 불 지릅니다! 이동!
- 야아! 누나! 누나! 씨발! 쏴! 갈겨!
- 15초간 전방 방화! 전부 대피! 자세 낮춰!
내 목소리들이었다.
사과를 깎던 양판석이 여유롭게 말을 붙였다.
“감기자가 화면은 기가막히게 뽑았군.”
“......말도 마십쇼. 저거 찍겠다고 최전방에서 떠나지를 않았으니.”
“뭐어. 마누라한테 옴팡지게 맞고 있더만.”
양판석은 낄낄대며 내 입에 사과 한 조각을 쏘옥 집어넣었다. 나는 심드렁한 기색으로 우물거렸다.
“제가 의원님이 깎아주신 사과를 먹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영광인 줄 알게. 우리 손녀 말고는 아무한테도 깎아준 적 없으니.”
자식한테도 안 깎아준 사과였다는 뜻이었다.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다들 무사합니까?”
“병원신세 져야하는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없네.”
“누나는요?”
“중환자실. 헌데 천화란 소장의 말에 따르면, 일반인 기준으로 중상이지 각성자 기준으론 양호하다고 하더군.”
“......소장이요?”
“연구소장. 자네가 설립했으면서 모르면 쓰나?”
“아하.”
양판석이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내게 말했다.
“자네가 실종된 직후, 전국적으로 욕을 퍼먹었다는 거 아나?”
“......그럴 만도 하죠.”
정치인이 쓸데없이 기웃거리다 민폐끼친 꼴이니.
“자네 보좌관들이 언론플레이를 꽤 하더군.”
“......예?”
“특히 이호정인가? 그 친구가 서럽게 울면서, ‘우리 의원님은 고작 친구를 구하러 사지에 들어갔다’고. 막. 허허허......”
양판석이 해맑게 미소지으며 내 입에 사과를 한 개 더 쏘옥 집어넣었다. 나는 말도 못하고 그저 우물거릴 따름이다.
“뭐어, 나도 뒤에서 힘 좀 써주긴 했다만 한계가 있더군. 어쨌든 그 친구 기자회견 한 방에 여론이 뒤바뀌었네.”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고생 깨나 한 모양이다.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붕 떠있더니, 썩 나아졌구만.”
“예?”
“과장 조금 보태서 지금 대선 출마하면 자네가 당선이야.”
TV에서는 연신 내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내가 악을 지르며 어디에다 불 지르니까 도망치라고, 어디로 총 쏘라고 소리치고 있다.
“......대선은 모르겠고 영화는 한 편 찍었습니다. 재난영화요. 하드한 슬레터 무비로.”
“슬레터는 모르겠고, 원래 사람들이 영웅 좋아하지 않나. 그, 마블? 우리 손녀가 차암 좋아하는데......”
문득 양판석은 묵묵히 침묵을 지키더니 자세를 낮추며 침착하게 읊조렸다.
“자네가 지자체장들 주둥아리를 꼬매버렸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함부로 서울에 갔다 고립당한 걸 빌미로. 수많은 사람들이 국회 해산을 외쳤다. 이 말일세.”
소름이 끼쳤다. 행정부와 군부가 여론에 힘입어 입법부를 보내버리려고 했다는 소리였다.
“......그 놈들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자네가 내게 힘을 실어줬으니. 이제부턴 내가 소매를 걷어야지.”
양판석이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그는 적을 만들기 싫어하는 사람이다.
실제로도 적이랄 게 별로 없었다.
그건, 그가 때때로 손해를 보면서도 적이 생기는 것을 예방하기도 하지만.
“승문이. 앞으로 뉴스 잘 챙겨보게나.”
한 번 생긴 적은 다 죽여 버리기 때문이었다.
“밥그릇에 대가리 처박다 코 막혀 뒈지는 수가 있다는 걸 보여주겠네.”
*
강석호는 혼수상태에 빠진 상태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듣기로는 폐에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각성자라 딱히 회복에 지장은 없지만.
“세상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해.”
“옝?”
“먹던 거 다 처먹고 대답해 임마.”
양일호, 이호정, 그리고 나는 강석호의 병실에서 치즈참치마요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이호정이 한 입 퍼먹더니 감탄했다.
“어머, 이거 뭔데 맛있어요?”
“압구정 생존자들의 특식이야. 살아 숨쉬는 것에 감사하면서 먹어.”
“근데 칼로리 장난 아니다......”
나는 작게 헛기침하고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하루만에 인생이 바닥에 떨어지더니, 정신 바짝 차리니까 또 다시 올라온다니까?”
“......아, 예.”
“살면서 남는 건 후회뿐이다. 으응? 근데 돌이켜보면 항상 더 나은 방법이 있고, 다시 말해 지금 상황이 개노답이어도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방법이 있다. 이거지!”
“냠.”
이호정이 ‘냠’이라고 굳이 소리를 내며 떡볶이 국물을 퍼먹었다. 그래. ‘꺼억’이라고 안한 게 어디인가.
“나 꼰대같았냐?”
“엄청요.”
여기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말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떡볶이에서 치즈만 건져먹었던, 변호사 출신 양일호였다.
양일호는 자기가 좋아하는 치즈만 다 건져먹고서는 플라스틱 포크를 내려놓았다.
“형, 재단 대충 짜깁기 해놨어요.”
“그래?”
“일단 천화란 박사님이 이미 연구소는 돌리고 계신데, 고아원은 고아가 너무 많아서 준비할 시간이 더 필요하고요. 용역은 어떻게, 초능력자가 없네요.”
으음.
“없긴 왜 없어?”
*
하루가 지났다.
“의사 할매는 남은 평생 침대 신세라고 하더군.”
“......”
“사냥팀 하던 친구 중 열여섯 명이 병신됐어.”
“유감입니다. 데이비드 씨.”
데이비드 김이 심술맞게 미소지으며 오른손으로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악전고투 끝에 왼눈과 왼팔을 잃었다.
“너나 나나 이제 장애인이군."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허공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벌 받은 거지. 내가 오죽 많이 죽였나."
그는 재미없는 농담을 했다는 듯 낄낄거렸다.
“나, 사람 많이 죽였어. 이라크에서."
그는 간호사 몰래 들여온 참이슬 뚜껑을 땄다. 그리고 한 모금 들이켰다.
“너, 사람 죽였지?”
그는 히죽이며 내게 삿대질했다.
“원래 처음으로 사람 죽인 것들이, 사람 살린다고 발악을 하곤 해. 눈빛도 살짝 가고, 막, 영웅심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
“내가 그래서 니 등신같은 작전을 밀어준 거고. 우리 깜찍이 열여섯을 병신으로 만든 거야. 알겠나?”
"......"
"그 심정 이해하니까."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탈출의 성공으로 스타덤에 오른 건 나였지만, 실상 가장 큰 공적은 압구정 캠프의 각성자들에게 있었다.
그들은 1200명 대열의 중간과 후미에서, 계속 습격해오는 괴수들을 몸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40명 중 16명이 죽지 못해 살게 되었다.
죽지 않은 이유는 틈틈이 섞여있던 치유사들 덕분이었고, 그 40인의 각성자들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정예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세운 기발한 작전에 열광했지만,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데이비드 김이 고작 몇주만에 쌓아올린 조직의 결속력 덕분인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긴 말씀 안 드리지요. 주한미군이셨으니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 건지 이해하실 거라 믿습니다."
나는 능청스레 계약서 한 장을 내밀며 한미동맹의 구호를 읊조렸다.
“같이 갑시다.”
*
“이게 뭐에요?”
홍선아가 사슴같은 눈망울을 끔뻑거렸다. 나는 사람좋게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혹시 PMC라고 아십니까?”
“으잉?”
고개를 갸웃거리는 홍선아 대신, 데이비드 김이 유창한 발음을 뽐냈다.
“Private Military Company. 민간군사기업.”
“그렇죠. 저는 여러분이 이런 회사를 창설해주셨으면 합니다. 정확히는 괴수 잡는 회사요.”
데이비드 김은 진중한 외눈으로 계약서를 읽기 시작했고, 홍선아는 옆에서 귤을 까먹기 시작했다.
“...이건,”
“앞으로도 지금처럼 초능력자 전투집단을 운영하시면서. 괴수들을 잡아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나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꾼들이 경기도 남부에서 날뛰는 괴수를 제압해주셨으면 합니다. 민간인들 사이로 퍼져서 자주포를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깔끔하게. 괴수만 족치고 나오라는 이야기인가?”
“이해가 빠르십니다.”
홍선아가 저요 저요 거리며 작게 손을 들고 미소지었다.
“으음, 여어기, 사회복지 활동은 뭐에요?”
“민간인 구출, 공사장 노동, 등. 초능력자의 능력을 이용한 공익 활동입니다.”
나는 은근한 눈치로 덧붙였다.
“말이 공익이지 짭짤한 파트타임 알바가 될 겁니다. 법이라는 게 사실 뭐, 네. 아시잖습니까.”
“하! 이렇게 보니 천생 정치꾼이구만.”
데이비드 김은 실실 웃으며 지분 분배율을 들이밀었다.
“이게 썩 마음에 들어.”
[괴수피해복구재단 40%
데이비드 김 30%
홍선아 10%
그 외 40인에게 각각 0.5%
*CEO 데이비드 김
**괴수피해복구재단에게 배당금 없음]
데이비드 김이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이번에 병신된 친구들도 먹여살릴 수 있다는 거 아닌가?”
“그렇죠. 사업 규모가 커지면 그 친구들도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릴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약간의 설명을 더 덧붙였다.
“......아마 군대나 국정원에서 초능력자들을 회유하려 들 겁니다. 실제로 저한테 내려진 명령도 그쪽에 더 가까웠고요.”
“......”
“......초능력자들이 나라에 헌신할 환경을 만들어줄 순 있어도. 국가에 목줄을 채우는 건 좀 아니라고 봤습니다.”
“스, 승문 씨...!”
"이게 제 보답입니다."
홍선아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살짝 구역질이 났지만 애써 견뎠다.
나는 미소짓는 얼굴로 홍선아를 토닥이며 데이비드 김에게 물었다.
“그런데 회사 이름은 뭐로 할까요?”
그가 기분좋게 미소지었다.
“......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