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5 - 사냥꾼들 (1)
피채원.
침대 맡에 앉아 붕대감은 소녀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소녀는 링겔과 호흡기를 달고 새액새액 숨쉬고 있다.
......정말 미래라도 본 걸까.
소녀가 눈을 떴다. 소녀는 미동도 않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피채원의 몽롱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만약 미래시未來視가 맞다면,
그,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다고.
우리는 말없이 한참동안 눈을 맞추었다.
나는 판단을 마치고 곧장 행동에 나섰다.
최대한 인자하게 미소지으며 두 손으로 피채원의 손을 부드럽게 잡는다. 양판석이 선거철에 써먹던 방식이었다.
“정말, 정말 고마워요. 피채원 학생.”
“......”
“덕분에 살았어요. 뭐라고 감사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순간, 이게 어른이 할 짓인가 회의감이 들었다.
허나, 나는 선 위를 걷고 있다.
미끄러지면 뒈진다. 내 밑에 딸린 식구가 셋이다.
나는 퍽 능숙하게 웃으며 이빨을 까기 시작했다. 우선 시선을 내리깔며 슬프게 미소짓는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안 물을게요.”
이미 입단속을 끝낸 상태다. 피채원이 헬기 추락을 예견했다는 걸 떠벌릴 사람은 없으리라.
“여기는 군대고, 피채원 양의 초능력이 밝혀진다면. 아마......”
작은 침묵으로 위험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요. 지금처럼.”
걱정스런 눈빛. 그리고 손아귀에 들어가는 힘.
작은 연출과 함께 단도직입적인 후속타를 넣는다.
“이런 말 꺼내기는 조금 미안한데. 의탁할 친척은 있어요?”
“......”
피채원이 말없이 시선을 깔았다. 그리고 한참동안 묵묵히 침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몇 살이라고 했죠?”
“......고, 3이요.”
“고아네.”
직설적인 평가, 작은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도 고아에요.”
강한 감정을 곧장 동질감으로 뒤바꾼다. 그리고 가벼운 미소와 함께 목소리 톤을 올려 분위기를 전환한다.
“뭐어, 사실 이모가 곧바로 거둬주긴 했지만 말이에요.”
“......네.”
“무섭지요?”
밝은 목소리로 전달하는 무거운 메시지. 대비에서 오는 강렬함.
그리고 창문 밖을 바라보는 시선. 눈을 마주치지 않고 전달하는 발화는 자기고백적 진솔함을 더한다.
사실, 소녀의 눈을 바라보고 대화하기가 살짝 힘에 부치기도 했다. 워낙 못할 짓이라.
나는 담담하게 공감대를 끌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고아원에서는 받아줄까. 앞으로 뭐 먹고 살아야 하나. 나라가 이 꼴이 됐는데 나는 어디에 속해야 하나......”
“......”
“그냥 존재가 붕 뜬 것 같을 거야.”
나는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옥상문. 다른 사람을 못 오게 잠궜었어요. 기억나나요?”
“......네.”
“원래는 열면 안 되는데, 내가 열었어요.”
나는 슬프게 미소띄며 소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확인받듯 질문했다.
“......학생은 내가 살린 거 맞죠?”
“......네.”
“그러면, 내가 학생의 후견인이 되어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피채원은 몽롱한 눈빛으로 흐린 목소리를 내게 흘려보냈다.
“......왜죠.”
즉답해야 한다.
“...그냥, 조실부모의 슬픔이 이해가 되기도 하고.”
나는 좆밥이다. 인맥도 돈도 없는 개털이다.
“서로가 서로를 구했으니. 이것도 인연인가 싶고.”
유일한 활로는 초능력자 업계를 장악하는 것.
“뭐, 선행에 딱히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결코, 이 귀중한 변수를 다른 곳에 넘길 수 없다.
“...피채원 양. 내가 재단을 하나 차릴 거에요.”
외줄 위를 걷고 있다. 미끄러지면 죽는다.
“괜찮다면, 거기서 일 배워보지 않을래요?”
이 소녀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지만.
너 이제 나한테서 못 벗어난다.
*
“아움.... 허엉! 형!”
입에 삶은 계란을 우겨넣은 양일호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깔끔떠는 이호정은 옆에서 질색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얘는 부러진 하이힐이랑 찢어진 스타킹까지 어디서 새 거 구해서 바꿔입더니, 지금은 여성용 정장까지 어디서 구해입고 있다.
“넌, 뭐. 볼때마다 복장이 업그레이드하냐.”
이호정이 깔끔하게 빗은 중단발을 귀 뒤로 넘기며 자신있게 미소 지었다. 지 예쁜 거 아는 사람은 이따금 얄미울 때가 있다.
“옷가게에서 해물비빔소스 캔 스물여덟 개랑 바꿔왔어요.”
“뭐?”
“어차피 군인들은 다 그거 안 먹던데요. 식당에서 몇 번 웃어주니까 저한테 선물해주대요?”
“그거 민간이랑 군부대 간 시세차익 이용한 부당이득 아니냐?”
“흠...!”
요, 요, 되바라진 거. 3일 동안 재단 세우느라 철야작업 했으니 봐주기로 했다.
나는 책상 위에 산처럼 널린 계란껍데기를 툭 툭 건드리며 양일호를 쳐다봤다.
“이렇게 처먹으면서도 살이 안 찌냐? 돼지 같은 놈......”
“아까 썰전에서 형 나왔어요!”
“그게 아직도 하디?”
이호정이 피곤한 얼굴로 대신 대답했다. 3일 밤샘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요즘처럼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있는 시절은 처음이에요. 어제만해도 부산 시의회에서 싸움난 게 뉴스 메인에 떠가지구......”
“그래서 예능에서 나보고 뭐라 그러디?”
“양판석의 꼭두각시요.”
반쯤 예상했던 대로다.
“양판석 수행비서 출신 국회의원에, 사실상 운빨로 당선되가지고, 양판석 대신 얼굴마담이나 하는 놈이라고 하디?”
“네.”
“빈말이라도 좀 아니라고 해주면 안 되냐?”
“네. 안돼요.”
가차없군. 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뭐어, 이제부터 노력해야지. 나만의 영역을 가지려고.”
양일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요?”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면 마음을 열어주시지 않겠니?”
초능력자 판은 내가 먹는다.
*
“뭐 하십니까?”
“흐앗!”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던 감기자가 화들짝 놀라 공책을 덮었다.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휠체어에서 몸을 낮춰 그 안경을 주워주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뭐 쓰시고 계셨습니까?”
“아, 아하하......”
감기자가 겸연쩍게 대답했다.
“그냥, 뭐어. 수필?”
“수필이요?”
“으음. 레포트랑 기사랑 대충, 섞어서. 뭐라고 해야 할까요. 아, 그래. 일기 쓰고 있습니다.”
아마 일기라기보다는 역사서에 가까운 물건일 것이었다. 국제부 종군기자가 쓰는 게이트 사건이라.
“벌써 2주나 지났네요.”
“......네.”
게이트가 열린 지 2주가 지났다.
추정 사망자 98만. 사상자 340만.
대한민국은 피와 눈물의 역사를 견디고 있다.
언제는 안 그랬느냐만은.
감기자는 슬픈 눈빛으로 내게 읊조렸다.
“여기서 50km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을까요.”
“......그렇겠지요. 혹시 가고 싶으십니까?”
감기자는 게이트가 열리기 전, 이미 수백 km 건너의 타국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한 사람이었다.
“...가고야 싶지요.”
감기자는 둥근 안경 속에 비치는 순한 눈망울을 아래로 내렸다.
그곳에는 포대기를 두른 감 철이 그의 무릎위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대답은 충분히 들었다.
안가는 게 아니라 못가는 거다.
나는 쓰게 미소지으며 오랜만에 민생관리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TV 화면이 갑자기 뉴스속보로 바뀌는 바람에 말을 잇지 못했다.
-속보입니다. 군 설정 1급 위험지대인 압구정에 대규모 생존자 집단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들은 통칭 ‘각성자’ 위주의......
이런 젠장.
자료 화면에서 미친 영상이 흘러나왔다.
헬기로, 상공에서 찍은 영상이다. 국군의 방공망을 언론이 뚫었다는 소리였다. 나는 금세 화면에 집중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옥상을 뛰어다니며 괴수를 몰이한다. 괴수는 마침내 막다른 골목길에 도달한다.
그렇게 모인 괴수가 여럿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팀을 짜서, 여러 괴수를 한 곳으로 몰았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 하나가 손을 뻗었다.
막다른 골목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단 한 사람이, 수십미터에 달하는 불기둥을 만들어낸 것이다.
저거. 절대로 뺏기면 안된다.
애초에 저게 언론에 풀린 이상 초능력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과 다름없었다.
혼란스러운 나라, 그리고 피어오른 불꽃.
심상찮은 정국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언론사 헬기가 압구정에 떴어. 강소장은 방공망 통제 안하나? 죽고 싶어?”
“죄, 죄송합니다.”
“위협이 아니라 질문이야. 죽기 싫으면 항공 똑바로 감시해. 비행괴수 나온 적 없다고 통제실에서 술판이라도 벌인 건가 지금?”
“아닙니다. 워낙 갑작스레 일어난-”
“지금 이 상황에서 갑작스럽지 않은 일이 있나? 당장 게이트 열려서 비행괴수 튀어나올 지 누가 아나? 그저께 게이트 폭주로 한강다리 두 개나 부숴놓고 아직도 챙길 여유가 있는 모양이지?”
지금까지 차관 옆에서 비벼둔 게 효과가 좋았는지, 나는 아무런 제재 없이 상황실에 들어올 수 있었다.
차재균 차관은 군인아저씨 하나를 갈구고 있었다. 그는 나를 힐끔 보더니 턱짓으로 군인을 물렸다. 군인이 잽싸게 도망쳤다.
포스 봐라. 차재균은 다시 사무적인 말투로 돌아와 내게 눈짓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의원님.”
나는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YBC에서 우리 대신 초능력자 오피셜을 띄워줬군요.”
“......만약 지금 전국에 비상계엄이 떨어진 상태였다면. 저 치들을 가만히 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언제나 그렇듯 약간 빠르고 무덤덤한 어조였으나 말의 내용은 전혀 평이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그를 달랬다.
“양판석 의원님께 말씀 전하겠습니다. 국난에 도의를 어기는 사람들과는 같이 못 가지요.”
“이미 여러 번 통제구역에 기자들을 보내려 하다 적발된 방송사입니다.”
그렇다면 아마 그 기자는 지금 감빵에 있을 것이었다. 이번 항공 취재는 그에 대한 보복이었을 것이고.
아무래도 슬슬 이 인텔리하게 생긴 양반의 터프한 짓거리에 대한 부작용이 튀어나오고 있는 것 같다.
썩 나쁘지 않은 일이다. 군부가 약해지는 것도 괜찮고, 그 틈에 내 영향력을 키우는 것도 좋다.
정말 약해져서 괴수한테 밀려버리면 큰일이겠지만은, 차재균이 그 정도로 못난 위인은 아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 화염술사를 한승문 재단에 꽂아 넣는 것이다. 국정원 따위에 뺏길 수 없다.
“압구정에 생존자 집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규모는 대략 수천. 압구정의 거주단지와 대형마트 위주로 활동하는 곳입니다. 진즉에 파악하고는 있었습니다만.....”
알면서 안 구하고 있었다는 뜻이군.
“초능력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요.”
마침 상황실 화면에서 화염술사가 괴수 십수마리를 한꺼번에 불사르고 있었다.
만약, 군대에서 화염술사를 구출한 다음 재단에 소속시키라고 하면 말을 들을까.
차재균의 저 탐나는 눈빛만 봐도, 그럴 가능성은 없어보인다.
바닷길이 조진 상황에서 군대는 무한하지 않다. 하지만, 각성자는 밥을 먹이면 다시 싸울 수 있다. 간단한 경제논리가 각성자의 가치를 폭등시킬 것이다.
이걸 알고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몇 명도 안 될 것이었고, 다행히 나는 가장 먼저 그를 알고 조치한 사람이었으나, 문제는 차재균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화염술사를 재단에 소속시킬 수 있을까. 나에게는 군대가 제시할 수 있는 자본도, 안전도, 권력도 없다.
어떡하지...!
매수, 협박, 설득,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군에 넘겨주기에는 2층짜리 건물 크기의 불기둥이 지나치게 인상적이다. 그 사람이 마석을 먹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걸어다니는 폭격기, 인간 전술무기가 될 것이다.
게다가 전국민이 공식적으로 확인한 첫번째 초능력자다. 홍보용 간판으로 써먹기에도 딱 적절하다. 무력에만 힘이 있는 게 아니다.
......물질적인 제시로는 군대와 비빌 수 없다. 조금 더 휴머니즘적으로 다가가야 할 것 같다.
새로운 도박이다.
삼고초려.
내가 직접 헬기를 타고 저 초능력자를 구출하러 가는 거다.
허나, 제갈량을 대하는 유비처럼 삼고초려의 예를 다하고 싶어도,
이 양반이 나를 거기에 보내줄 리가 없었다.
*
새로 배정받은 생활관으로 돌아오니 다들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야, 이거...!”
평소 같았으면 ‘시발’ 한 단어로 모든 감정을 표현했을 여도연이었으나, 감지윤의 패드립 사건 이후로 입이 좀 얌전해졌다.
“어어, 알아.”
“아, 아니...!”
“압구정 생존자 클럽. 차관님한테 들었-”
여도연이 휠체어를 낚아챈 다음 TV 앞으로 끌고와 화면에 손가락을 쿡 찔렀다.
양일호와 이호정은 유독 정신이 나간 것처럼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호정이 중얼거렸다.
“석호......”
“뭐?”
나는 순식간에 TV에 집중했다.
강석호. 3호. 우리가 여의도에 버리고 간 석호가 괴수를 때려잡고 있었다.
......흐음.
으음. 으음.
그래. 국회의원으로서 압구정에 고립된 생존자들을 멍하니 지켜볼 수는 없다.
상당히 예쁜 그림이 하나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