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4 - 큰 그림에는 큰 붓이 필요하다 (1)
생활관 테이블에 둘러앉아 삶은 계란과 야쿠르트로 아침을 때우고 있을 때, 천화란이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썰을 풀기 시작했다.
“이이랑은 남수단 카포에타에서 만났어요. 의료봉사 갔을 때.”
“의사셨습니까?”
천화제약 다닌다고 하지 않았었나.
“어릴 적에 몸이 많이 약했거든요.”
그녀가 아련한 눈빛으로 회상했다.
“아버지께서 저 하나 살리겠다고 연구회사 하나 차려서는 기어코 치료해주셨어요. 뭐. 이젠 이름도 기억 안 나는 희귀병이었는데......”
역시 천화란의 아버지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저 하나 살리겠다고 여러 사람 임상실험했다가 죽인 모양이에요. 그 다음은 뻔하죠, 뭐. 나중에 커서 그걸 알게 됐고, 죄책감에 뭣도 모르고 내전지역가서 의료봉사하고......”
그녀는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감기자에게 턱짓했다. 그는 감지윤과 감석을 데리고 세상 날아갈 것처럼 미소짓고 있었다.
“반군 치료했다고 정부군한테 죽을 뻔했는데 지윤이 아빠가 구출해줬죠.”
“종군기자셨습니까?”
“네. 돌아갈 방법도 없어서 같이 1년동안 아프리카에서 도망다니면서 로맨스 영화 한 편 찍었는데. 귀국하니까 뱃속에 지윤이가 있더라구요.”
* * *
양판석이 관리를 못해 슬슬 자라난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국회를 재소집하는 거야.”
탄핵, 입법, 특별위원회. 국회만 정상화된다면 반쯤은 이긴 게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의원님들이 어디에 얼마나 살아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게 문제지. 그래서 내가 밑으로 내려가려는 게고.”
서울이 망했다고는 하나 상층부의 파괴에 지나지 않는다. 즉, 지방권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지방 검찰청, 경찰청. 시장, 도의회, 시의회...”
“일단 공화-민주 대립부터 중재하셔야겠습니다.”
“그래. 군부가 한국을 먹게 생겼는데, 괜히 우리끼리 싸워봐야 제 살 깎아먹는 짓이네.”
허나, 정말로 공화당과 민주당이 합당을 해서, 뭐. 국방당같은 거라도 만들어버린다면, 금세 일당독재라고 욕을 퍼먹으면서 끌어내려질 게 분명했다.
“키 포인트를 집는 거야. 키 포인트.”
양판석이 게슴츠레한 눈빛을 보내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쿡쿡 찔렀다.
“검찰같은 경우는 검사장들에게만. 도의회같은 경우는 위원장급에게만. 암묵적인 동맹을 제의하는 게지.”
“겉으로는 티 안나는 유착이로군요.”
“괜히 군부랑 척 져서 좋을 게 없어. 펜잡이가 총잡이를 견제한다는 티를 내면 안 된다고.”
양판석은 흐뭇하게 웃으며 설명을 끝냈다.
“자, 나는 됐고. 자네는 무슨 계획인가?”
“차재균한테 잘 보인 다음에, 초능력자 군대에 숟가락을 얹어야죠.”
“어떻게?”
*
“야......”
여도연이 나를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이렇게까지 해야 돼?”
“자, 점프!”
우리는 사령부 근처 야산 공터에 있었다. 여도연의 체력테스트와, 내 초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여도연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폴짝 폴짝 뛰었다.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이다.
“와! 어부바!”
감지윤이 해맑게 웃으며 둥실둥실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여도연에게 업힌 상태로 대답했다.
“어어, 지윤아. 아저씨 지금 노는 거 아니야.”
“언니랑 아저씨 머해?”
얘 좀 봐라.
“야! 얘가 나보다 한 살 많은데 왜 내가 아저씨야!”
“엄마가 여자한테 아줌마라고 그러지 말랬어!”
천화란이 아이 교육을 참 전문적으로 시켜놨다.
여도연은 나를 업고 2m 높이를 폴짝 폴짝 뛰고 있었고, 감지윤은 둥둥 떠다니며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천화란이 차마 못볼 꼴이라는 듯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계속 점프하던 여도연이 내게 발끈했다.
“야, 임마! 언제까지 뛰어!”
“누가 계속 뛰래?”
여도연이 나를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나는 여도연의 허리춤을 붙잡고 일어나며 흙먼지를 툭 툭 털었다.
“천화란 씨.”
“네.”
“혹시 지금 뭐, 파란색, 마력 보인거 있으신가요?”
“글쎄요, 잘 안 보이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감지윤이 방긋 웃었다.
“언니는 파아란데, 아저씨랑 붙으니까 아저씨도 파래졌어!”
이건 좀 흥미롭다.
“누나랑 내가 달라붙으면 나도 강해지는 건가?”
“내가 어떻게 알아.”
“접촉하면 초능력을 공유한다?”
“나한테 묻지 마.”
“혼잣말인데?”
여도연에게 배를 맞고 흙바닥을 뒹굴뒹굴 구르고 있으니, 감지윤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키에에엑! 커허억....!”
“아저씨...? 괜찮아?”
감지윤이 내 등을 토닥이려 손을 대자,
몸이 떠올랐다.
“......호오.”
“이야아앙!”
무중력 상태처럼 두둥실 떠오른다.
허공에 보이는 푸르스름한 안개들에 손짓하자, 나는 감지윤의 손을 잡고서 허공을 유영할 수 있었다.
“아, 이거 재밌네.”
“그치? 그치?”
여도연이 한심한 눈치로 팔짱을 끼었다.
“나이먹고 그러고 싶냐?”
“내가 얘 손잡고 헤엄치려고 이거 테스트한 거 같아?”
“그러면?”
*
“저도 초능력잡니다.”
서류를 넘기던 차재균이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왔다.
“초능력자와 접촉하면 대상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습니다. 한 일행에서 초능력자가 세 명이나 나오다니.”
“왜 그러십니까?”
차재균이 작게 한숨지었다. 주름진 미간에 골이 파였다.
“국정원과 보안사를 움직인 지 3일이나 됐습니다만, 한 명도 못 찾았습니다.”
다행이군. 나는 그의 의중을 짐작했다.
“기동 타격대를 만들고 싶어하시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군이 서울을 포위한 상황, 허나 포위망을 돌파한 괴수들이 경기도 남부에서 깽판을 치고 있다.
민간인과 괴수가 섞여있는데 미사일을 날릴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고 특수부대를 보내자니 총알이 안 박힐 수도 있다.
초능력을 쓸 줄 아는 괴물 사냥꾼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여기에 한 발을 걸치려고 한다.
“실례지만 제가 도와드릴 점이 있겠습니까?”
“이미 국정원과 보안사가 담당하고 있습니다만...”
역시 그냥 넘어가지는 않는다.
멍청이도 아니고 왜 나를 끼워주겠는가. 군대에서 중장을 찍고 차관이 되었다는 소리는, 이미 정치질에 도가 텄다는 소리였다.
숟가락 걸치려는 의도는 이미 파악했을 것이었고, 나는 이 시점에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야 한다.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뭐어, 정치인만이 할 수 있는 생각도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요원님들이 3일동안 헛손질 하셨다면서요. 실례지만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셨는지......?”
국회의원이 이렇게 찐따를 붙으면 당하는 입장에서도 곤란할 수밖에 없다.
차재균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국정원과 군 내부에서 믿을만한 사람들을 골라 마석을 접촉시키는 중입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는데요?”
“초능력자를 찾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말입니다.”
하기야 초능력자 찾아서 마석 때려박으면 뭐하겠는가. 눈 뒤집히면 큰 사고 하나 터지는 거지.
그러니 국가에 충성심이 있거나, 통제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비밀리에 특수부대를 조직하려는 모양인데......
“저랑 비즈니스 하나만 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원래 정치랑 비즈니스는 종이 한 장 차이다.
*
다음날, 나는 일행에게 모든 계획을 설명하고, 여도연과 함께 차관실을 방문했다.
“재단 하나만 만들지요. 이름은 뭐, 한승문재단, 승문재단, 승문이네 감자탕, SM,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나는 차관에게 내 빅픽쳐를 보여줬다.
세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가장 필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초능력자들이 활동할 조직.
초능력자들을 연구할 조직.
초능력자들을 관리할 조직. 맞습니까?“
차재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단 하나로 세 개의 수익사업을 굴리면서 이 모든 걸 해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관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일단 들어보지요.”
우선, 재단을 설립해야 한다.
그러나,
설립자 재산 출연, 재단 목적 공증, 정관작성, 주무관청 체크, 설립허가 신청, 컨펌, 관할법원 설립등기, 등.
행정과 사법에 걸친 수많은 절차가 필요했다.
“재단은 서류상으로 서울에 세울 겁니다.”
비상계엄사령관은 지역의 모든 ‘행정’과 ‘사법’을 관장한다. 그리고 앞에 실질적인 서울 계엄사령관이 있다.
“차관님께서 힘써주신다면 3일 내로 재단하나 만들 수 있습니다.”
“더 말씀해보십시오.”
오케이. 여기까지 왔으면 절반은 온 거다.
“재단에서는 세 개의 수익사업을 굴릴 겁니다.”
“재단은 수익사업 운영 못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사회복지, 연구개발, 교육복지 같은 공익사업은 가능합니다.”
물론 주무관청의 허가가 필요했고, 그건 아주 까다로운 일이었지만, 내 앞에는 걸어 다니는 ‘권한’ 덩어리가 존재했다.
나는 막힘없이 설명을 계속했다.
“첫째. 사회복지 사업.
초능력자들의 능력을 이용해 피난민들의 집을 지어주고, 무너진 건물 잔해를 치우고, 사람을 구출하고, 괴물을 잡을 겁니다.”
“그게 초능력자들이 활동할 조직입니까?”
“어차피 초능력자의 존재가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사회에 최대한 온건하게 비춰지려면, 이런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도 중요합니다.”
“초능력자를 사회에 융화시킨다?”
“비밀 조직으로 굴려봐야 외국에서 초능력 발표하면 말짱 도로묵이니까요.”
나는 자신있게 미소지으며 여도연을 가리켰다.
“여도연이나 감지윤 같은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 중장비입니다. 싸움에만 써먹을 필요는 없지요.”
실제로 여도연은 대학교 시절, 남들 편의점 알바할 때 혼자 공사장 노가다를 뛰었다.
이모의 성화로 노가다를 그만둘 때 반장이 캐스팅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심지어 그때는 초능력도 없었다.
차재균이 여전한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사회복지 사업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다음은 연구개발 사업입니까?”
“재단에서 R&D 하나 세울 겁니다.”
“R..., 뭐요?”
“리서치 앤 디벨롭먼트! 연구개발회사입니다. 초능력과 그 원리, 그리고 활용방안에 대해 연구할 계획입니다.”
천화란이라는 의사자격증 있는 금수저 제약회사 연구원도 있고 말이다. 그녀가 연구개발을 진행하게 될 것이다.
물론 현장에서 ‘사회복지’ 시켜도 되겠지만, 그녀는 임산부였다.
차재균이 의문을 제시했다.
“......괴수 연구가 공익사업이라는 법안이 있습니까?”
“양판석 의원님이 만들 겁니다. 그 전까지는 계엄사령관의 보증으로 버티기가 가능하겠지요. 그리고 공익사업 맞지 않습니까?”
“반발한 게 아니라 법적 정당성을 여쭌 겁니다. 괜찮네요. 더 말씀해보십시오.”
차재균이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지막은 교육복지인데......”
여기가 살짝 문제다.
“고아원 하나 세우실 생각 없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