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7화 (7/296)

EP 2 - 붉은 한강의 초능력자 (4)

뻥 뜷린 차문 사이로 소녀의 단말마가 들려왔다. 그에 슬퍼하기에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버린 이후였다. 나는 지친 몸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이 근처에 제 아파트가 있습니다. 그 입구에 내려주고 오는 길입니다."

왜 버리고 갔냐고 묻기에는 이유가 너무 명확했다. 굳이 책망하기에는 목숨을 빚졌다. 그럼에도 언급하기에는 감정이 너무 지친다.

"집에 먹을 거 있습니까?"

* * *

깜빡 잠든 모양이다.

눈을 뜨니 침대 위였다. 옆에 누군가 있었던 흔적이 있다. 여도연 냄새다.

치미는 두통에 비틀거리며 겨우 앉았다. 놀란 근육이 풀렸는지 온통 욱신거리고, 피곤함과 뻐근함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살짝 휘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을 짚고 콩콩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겨우 거실로 나갔다.

"......"

"......"

"......"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감상하고 있었다.

"뭐합니까? 다들."

"아, 그, 형, 이, 어어, 으."

양일호가 진땀을 빼며 무언가를 가리켰다.

감지윤. 감기자네 딸내미.

녀석이 허공에 손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숟가락이 둥둥 떠있다.

허공에.

*

"방금 그거 뭡니까?"

우리는 주전부리를 집어먹으며 거실에 빙 둘러앉아 있었다. 감지윤은 소파 위에서 엄마 품에 꼭 안겨있다.

"어제 내가 괴물 시체에서 뭘 주웠다고 하지 않았나?"

"그, 파란 거요?"

"그래."

양판석은 감지윤을 손으로 가리켰다.

"방금 아이가 그걸 만졌는데, 보석이 아이 몸 속으로 들어갔어."

"어떤 식으로요?"

"......하아. 파란 불빛이,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어차피 요지경인데요 뭘."

"퍼런 게 번쩍 하더니, 몸에 스르륵 들어갔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군.

"그리고 허공에 숟가락을 둥둥 띄웠고요?"

양판석이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도연도 사람처럼 움직이진 않았다. 나도 악어 주둥이 앞에서 서커스를 했고, 감기자는 120km로 교통사고를 내놓고 멀쩡하다.

심지어 이제는 감지윤이 숟가락을 띄우기까지.

"괴물만 나타난 게 아닌건가......"

나는 쿠크다스 하나를 까서 우물거리며 입을 다물었지만, 모두가 이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지윤아, 그, 파란 게 보인다고 그랬지?"

"......네."

"숟가락 띄우는 건 어떻게 했어?"

"그, 파랑으로 막, 막......"

아주 조리있는 설명이었다.

"누나."

"......어."

"그냥 격투기 선수 복귀해라. 월드 챔피언 따겠다."

"......미치겠네."

양판석이 상황을 정리했다.

"여도연 양이든, 감지윤 양이든, 뭔가 있는 건 분명해. 근데 우리가 머리 싸맨다고 지금 뭘 알 수 있겠나. 전부 추측에 불과한 것을. 커튼 좀 열어주게."

양판석이 일호를 툭툭 치자 녀석이 쪼르르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불타는 63빌딩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집이 남향이다.

"한의원, 방금 저 멀리서 국군을 봤다네."

"강남에서 이미 전투가 일어났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 근방에도 심심찮게 총소리가 들리고 있어."

타이밍 좋게 어디서 총성이 들렸다. 영화에서 듣던 것보다 훨씬 크고 두려웠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이미 국군의 활동범위 내에 들어왔다네. 여기서 천천히 국군과 접촉할 방법을 찾는 건 어떻겠나?"

"......물은 나옵니까?"

천화란이 대신 대답했다.

"갓난아기가 있어서 생수로 생활했어요. 창고에, 그. 네 박스 정도 있을 거에요."

"마누라 몰래 숨겨둔 맥주도 조금 있습니다. 화란이가 셋째를 품고 있어서 먹을 것도 많이 쟁여놨고요."

천화란이 감기자의 옆구리를 힘껏 찍었다. 잡혀사는 모양이다.

양판석이 민생관리를 시작했다. 가끔 지역구 주민들한테 써먹는 방식이었다.

"홀몸도 아닌데 고생 참 많으셨습니다. 자네도 가장으로서 많이 노력해줬어."

"아, ......죄송합니다. 어제는, 정말."

"나도 애가 셋이야. 그 맘 잘 알아. 다시 와서 구해줬으면 된 게지. 냉정하게 잘 판단했어."

감기자는 우리를 버리고 갔다.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괜히 분위기 상하면 상황 안 좋아진다.

"감기자님 덕분에 살았는걸요. 저도 마음에 담아둔 거 없습니다."

"아, 의원님들......"

내가 감지윤 목숨을 살려줬지만 감기자는 이미 한 번 나를 버렸다. 부디 이 아저씨가 그걸 잘 새기기를 바랄 따름이다.

*

나 또한 양판석을 본받아 민생관리에 나섰다. 우선은 양판석 본인.

"의원님, 혹시 몸 상하신 데 없으십니까?"

"자네나 잘 챙기게."

"그래도 제가 의원님 챙기는 게 직업 아닙니까."

"입만 살아가지고......"

속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그래도 가장 먼저 챙겨줘서 고마운 모양이다. 외롭게 사는 할아버지니까.

나는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풍기는 양일호와 이호정에게 다가갔다. 선남선녀다.

"야. 니들 아까 한강에서 뽀뽀했지."

"아, 안했는데요!"

"......나랑 한 게 부끄러워?"

"아, 아니! 호정아, 그게 아니라......"

슬슬 녀석들도 본래 성격을 되찾은 모양이다. 이호정의 까칠함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접근하면 안 된다.

나는 양일호를 제물로 바치고 감기자네 가족에게 다가갔다.

"감기자님은 어느 쪽에서 일하셨습니까?"

"아, 국제부 기자입니다."

"사회부로 오실 생각 없으세요? 저 보좌관 출신이라서 기자들 엄청 많이 아는데."

"하하! 직장이 무사할런지 모르겠네요."

"저도 어제 직장 잃었습니다. 국회의사당이 무너졌어요."

"아이고......"

나는 천화란이 들고있는 감 석을 살피며 볼을 쿡쿡 찔렀다. 통통한 갓난아기가 짧은 팔을 버둥버둥거리며 휘저었다.

"애기야.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까웅..."

"엄마가 좋다고?"

"우아아...!"

"누나가 좋아?"

나는 감지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화란에게 말을 걸었다.

"홀몸이 아니신 줄은 몰랐네요. 어제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아닙니다. 저희 딸 목숨까지 구해주셨는데......"

"의족 하나 버린거죠 뭐. 그나저나 애기가 셋이면 키우느라 고생 많으시겠어요."

나는 지금 천화란의 직업을 물어봤다.

"아, 아뇨. 저는 연구소에서 일해서..."

"아, 이과셨습니까?"

"네, 천화제약이라고 혹시...?"

모른다.

"아, 저는 국민들 행복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서요......"

"어머, 말씀도......"

대충 말투랑 행동거지를 보니까 '교육'받은 사람이다. 그냥 고학력자가 아니라 있는 집 사람이었다. 양판석 의원 쫓아다니던 시절에 가끔 호텔에서 보는 사모님들 느낌이 난다.

'천화'제약이라. '천화'란. 어쩌면 있는 집 사모님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했다.

마지막 민생관리의 대상은 딱 하나였다.

여도연.

그녀는 배란다에서 슬픈 눈으로 무너지는 도시를 지켜보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험악한 표정이었겠지만 나는 그 미세한 차이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참고로 이모부는 자기 딸 표정 구분 못한다.

그녀는 콩콩거리며 다가오는 나를 슬쩍 보더니 피식 웃었다.

"정치인 됐다고 끼부리는 거야?"

"또, 또, 쿨병들어가지고."

"팍, 씨...!"

그녀가 들어올린 주먹에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어릴적부터 맞고 자라서 자동으로 몸이 움찔한다.

"누가 보면 내가 너 패면서 키운 줄 알겠다?"

"양심 있냐?"

"뭐 이 새끼야."

그녀는 갑자기 내게 헤드락을 걸었다. 나는 쏜살같이 혓바닥을 털었다.

"아! 아! 감정에 솔직하지 못할 때마다 폭력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 봐! 이 맥락에서 헤드락을 거는 건 너무 부자연스러운 행동-"

"누가 누굴 버리고 도망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너 버리고 도망칠 것 같냐?"

"......아니, 둘 다 죽을 바에는 하나라도,"

"닥쳐 좀."

그녀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늘 그렇듯이 대충 어떤 표정일지 알 수 있었다.

"그냥 이러고 있어. 임마."

부산 여자의 애정은 가끔 과격할 때가 있다.

"......근데 이거 좀 풀어주면 안 돼?"

"안돼."

*

그날은 별 탈없이 저녁이 되었다. 우리는 순번을 정해 창문 너머를 감시했고, 다행히도 근처에 들리는 총성이 점차 잦아지고 있었다.

군대가 가깝다.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천화란이 차린 밥상을 보며 양판석이 립서비스를 시작했다.

"우리 감기자님은 참 복받은 남자야. 안사람이 곱고, 요리도 잘하고, 똑똑하고, 살뜰하고......"

"아이! 아, 아닙니다!"

"자아, 한 잔 받아. 남의 술 가지고 생색내는 것 같긴 하다만..."

"아뇨! 받겠습니다!"

원래였다면 국제부 감기자가 4선 국회의원이 따라주는 술을 마실 수 있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일호와 이호와 둘러앉아 과자를 으적거리며 토론을 하는 중이었다.

"외계인 아닐까요?"

"솔직히 비주얼만 보면 그렇긴 한데..."

"왜 사람을 죽이느냐가 문제죠. 게다가 쟤네 딱히 머리쓰는 것 같지는 않던데요?"

"쟤네들을 같은 종족이라고 보기에는 좀..."

"다양하죠?"

"그치. 생물병기에, 순간이동에, 나, 참. 공중부양, 신체강화......"

양일호가 입에 과자 부스러기를 핥아먹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근데, 형."

"뭐."

"왜 이렇게 멋있어요?"

"뭐?"

"침착맨이야? 절뚝절뚝거리면서 그냥, 막. 리더십이 뭐...!"

크으으! 양일호는 따봉을 내밀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호정이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는 바람에 금방 입을 다물었다.

"잘했어."

"이제 어떡하실 거에요? 국군이랑 합류?"

"이런 말하긴 좀 뭐한데, 아무래도 우리가 기득권이다보니까. 사회 인프라에 합류만 하면 앞길이 딱히 나쁠 것 같지는 않아."

"내가 줄은 잘 잡았네. 국회의원 수도 많이 줄었으니까 오빠도 정치적으로 살짝 중요해진 거 아니에요? 1/300에서 1/N로 변한 거잖아."

"너 지금 정무비서관하고 싶다는 소리냐?"

"제가 운전을 해요? 법을 잘 알아요? 지역구에서 아저씨들 술상무할 바에는 이쪽으로라도 머리를 굴려봐야죠."

이호정은 음침하게 미소지었다. 비상사태가 끝나니까 다들 슬슬 제 성격이 나오는 모양이다.

늘 함께했던 강석호가 없는 자리였지만 아무도 그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딩- 동-

현관문 벨소리가 울리자, 왁자지껄하던 집안이 침묵에 감싸였다.

감기자가 조심스레 문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아! 부녀횝니다! 지금 동 사람들 모두 모여서 회의를 할라 그러는데, 혹시 자리해주실 수 있으신가 여쭙고 싶어서요!"

열지 마 씨발. 뭔가 느낌이 안 좋아.

나는 감기자가 내게 허락을 받고 문을 열 줄 알아서 굳이 소리치진 않았지만, 내가 간과한 건 그가 지금 만취한 상태였다는 거다.

감기자는 현관문을 덜컥 열었다.

- 푸욱

기다리던 괴한의 식칼이 그의 몸에 쑤셔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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