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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106)화 (106/106)

<106화>

“……나! 록시나!”

나는 어디선가 웅웅거리며 들리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록시나! 정신이 좀 들어?”

내 멍한 눈과 시선을 마주친 아슬론이 황급히 물어왔다.

“대체 어디를 갔던 거야? 갑자기 사라지더니 이런 곳에 누워 있고.”

‘이런 곳?’

나는 뻐근한 몸을 애써 일으킨 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어디에요?”

아르타나 여신에게 불려 가기 전까진 분명 대신전 앞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좁지만 깔끔한 방 안이었다.

나는 다소 딱딱한 침대를 짚고 벽에 몸을 기대었다.

아슬론은 내가 일어나는 걸 부축하며 말했다.

“갑자기 네가 사라져서 대신전 곳곳을 돌아다녔다. 찾던 중에 신관을 하나 만났고.”

“신관이요?”

“그래. 갑작스레 느껴진 빛의 기운에 주변을 살피던 중이라더구나.”

“제가 어디에 있었는데요?”

처음 아르타나 여신의 부름을 받았던 곳에서 그대로 눈을 뜰 줄 알았는데.

“너를 찾은 곳은 대신전 중앙 기도실 앞이었다. 다행히 복도를 돌던 신관 말고는 모두 기도 중이라 널 발견한 이는 더 없다.”

“제가 기도실 앞에 있었다고요?”

대체 어떻게?

나는 분명 대신전 정문 근처에 있었는데, 신과 대화를 나눈 후 위치가 변하다니.

‘혹시, 가장 신성한 공간이라 그런가?’

제국에서 가장 신성한 곳은 대신전, 그중에서도 가장 신과 가까운 공간은 중앙 기도실이다.

신관들조차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므로 평소에는 문이 잠겨 있다고, 이곳까지 오는 마차 안에서 아슬론이 말해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했잖아.”

그의 말에 나는 좀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입술을 꾹 눌렀다.

“제가, 아르타나 여신을 만났어요.”

“여신을?”

아슬론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널 부른 게 아르타나 여신이라고?”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어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내가 죽으면서 록시나와 영혼이 바뀐 것이 아니라 제자리를 찾은 거라는 말은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혼란스러움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내 표정에도 그 뒤섞인 감정들이 드러났는지 아슬론은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도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신탁에 대해서도 들었어요. 무슨 내용인지 들었으니 우선 돌아가면서 이야기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마차로 가려는 순간,

똑똑-

문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슬론은 문을 열기 전 나를 바라보았다.

“너를 이곳으로 옮겨 준 사람이다. 상태만 확인하고 다시 돌아갈 거야.”

“신관이요?”

내가 살짝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자 아슬론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전에 나 역시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믿을 만한 사람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슬론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여전히 신전은 경계 대상이며 그중 신관은 특히 더 조심해야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아슬론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분명 해가 되는 인물은 아니겠지.’

내가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슬론이 문을 열었다.

“아, 깨어나셨습니까.”

“신관님……?”

나는 생각보다 더 나이 든 신관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아슬론이 존칭도 사용하지 않길래 어린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마치 본인의 또래를 생각하듯 말해서 나는 적어도 아슬론보다 어리거나 많아도 그 또래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노인에 가까운 모습의 신관에 조금 당황한 것도 잠깐, 나는 뻐근한 몸으로 애써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를 도와주셨다고요. 감사합니다.”

그러자 신관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허허 웃었다.

“어떤 분이기에 이 애가 그리 간절히 찾는가 했더니, 왜 그랬는지 좀 알 것도 같군요.”

‘아슬론이 나를 간절히 찾았다고?’

아슬론 윈터쳇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것을 본 바가 없어 상상이 되질 않았다.

내가 간절히 무언가를 원하는 아슬론의 모습을 애써 떠올려 보려는데, 신관이 말을 이어갔다.

“아슬론은 쉽게 도움을 청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게 직접 부탁까지 하니 놀랍지요.”

‘아슬론?’

신관은 아슬론 윈터쳇을 마치 가까운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불렀다.

하지만 둘이 정말 친한 게 맞긴 한지, 신관이 자신을 이름으로 부름에도 아슬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까칠한 아슬론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두 분은,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내 물음에 가만히 서 있던 아슬론이 입을 열었다.

“어릴 적 갈 곳 없던 나를 거둬 주신 분이다. 신전으로 데려와 키워 주셨지.”

“네? 하지만 스승님은 중앙 신전 소속 아니었나요?”

그래서 대신관과도 자주 마주쳤고, 척까지 치지 않았던가.

그러자 나의 의문에 대답하듯 아슬론이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처음 발견된 곳은 대신전 근처이다. 여기 계신 신관님이 나를 대신전으로 데려왔고, 한동안은 여기서 지냈지.”

“그런데 왜 중앙 신전으로 가신 거예요?”

이곳에서 잘 지냈다고 하는 걸 보니 계속 머물러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그러자 나와 아슬론을 바라보던 신관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제가 보냈습니다. 아슬론처럼 신성력에 재능이 있는 아이는 중앙 신전에 더 어울린다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신관은 소위 ‘잘 나가는’ 신관들이 있다는 중앙 신전에서 아슬론이 더 실력을 갈고닦아 진실한 신의 종이 되기를 바랐노라 말했다.

“그 대신관이라는 자가 어떤 이인지 알았다면 보내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신관의 눈에는 약간의 후회와 자책이 묻어 있었다,

내가 그런 신관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고 있자, 가만 보던 아슬론이 결국 먼저 서두를 열었다.

“록시, 신관님께선 이미 네가 누군지 알고 계신다, 더불어 네가 발현했다는 사실까지도.”

내가 놀란 눈으로 신관을 바라보자, 그는 무척이나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탄제리크 공녀께 인사드립니다. 아르타나 여신의 신실한 종, 룩셈 신관입니다.”

‘룩셈 신관이라면…… 신과 가장 가깝다는 사람 아닌가?’

대신전이 가장 청렴하고 신과 가깝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가 룩셈 신관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룩셈 신관은 나를, 정확히는 내 안을 휘젓는 신성력을 꿰뚫어 보듯 말했다.

“기도실 근처에서 강한 성력이 느껴져 주변을 확인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공녀님을 찾고 있는 아슬론을 마주쳤지요.”

그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

“신탁이 내려올 때보다 더 강력한 기운이었습니다. 마치 지상에 신이 강림한 것만 같은, 엄청난 기운이었지요.”

‘그럼 다른 신관들도 느꼈을 텐데.’

혹여 대신관이 알아채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내가 입술을 꾹 누른 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는데, 룩셈 신관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여신의 힘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입니다. 무척이나 정화된 힘이기 때문에 타락하였거나 수련이 부족한 이는 알아챌 수 없지요.”

그러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공녀님께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

그는 아무 말 없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공녀님께서는, 여신을 만나셨습니까?”

‘어떡하지.’

나는 이 모든 일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어떻게 옳은 선택일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물어볼 수라도 있다면 이리 갈등할 일도 없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직감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언제부터 내가 모든 걸 의지하기 시작했지?’

왜 나는 모든 결정을 남에게 떠넘기고 있었던 걸까. 대체 왜?

‘내가 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라서? 내 모든 삶이 신의 개입이어서?’

그래서 신이 의도한 대로만 움직였던 걸까? 나의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타인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면서?

‘내가 대체, 왜 그래야 하지?’

내가 왜 신이 뜻한 대로 흔들려야 하나. 나는 왜 내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가.

‘저항할 의지조차 없었기 때문에.’

내 모든 비참함과 외로움이 신의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내가 한평생을 괴로워하다 죽은 것이 신의 실수 때문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던 지난 생을 보상받기 위해 록시나로서의 삶은 누군가에게 미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언제부터 소극적이었는지, 언제부터 나의 소리를 외면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젠 그러지 않아.’

나의 외면 받은 과거가 신의 농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이대로 머물 생각은 없었다.

나를 고립시켜왔던 존재가 나의 진짜 가족이 아니었다는 것도, 나를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했던 현실이 내 세상이 아니었다는 것도, 모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뿐이었지만.

‘그대로 무너질 생각도 없어.’

만일 신이 계속 타인의 힘을 빌어 내 의견을 묵살하려 한다면, 이젠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다.

“전부 말씀드릴게요.”

신이 나에게 신성력을 주었다는 사실과 직접 전한 제국의 미래까지.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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