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거짓말 같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아슬론이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많이 유해졌다 해도 여전히 신전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그는 아직 신탁의 내용을 전해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리 대신관의 입맛대로 움직인다 해도, 신전에서는 함부로 거짓을 입에 담을 수 없다. 그게 말단 신관이든 대신관이든 말이야.”
“저도 알고 있어요. 신관의 기본적 소양이 정직과 청렴이라는 거요.”
이 제국에서 신전의 이념에 대해 모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또한 제국민은 함부로 신전을 의심하지도 않는다. 신전을 의심한다는 것은 즉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신관, 특히 대신관에게 감히 의구심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은 쉽게 없었다.
‘그래서 나도 긴가민가했어.’
무려 신탁이다. 신이 직접 내렸다는 미래.
신을 모신다는 신관이 대체 무슨 배짱으로 거짓된 신탁을 말한단 말인가. 대체 어떤 벌을 받을 줄 알고.
‘하지만 갈수록 확실해져.’
대신관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추측에 자꾸만 살이 덧대지고 있었다.
“신이 제국의 일에 관여하는 일은 결코 흔치 않아요. 물론 대 루엔트 제국은 아르타나의 수호 아래에 있다고 믿고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국민 하나하나에 열의를 쏟을 만큼 신은 열정적이지 않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의문스러웠던 것은,
“이번 신탁에서 신은, 인간사에 너무 깊이 관여했어요,”
나는 그게 이상했다.
사실 신이 정말 제국민에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내가 한 말조차 전부 추측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실을 차치하고도 이번 여신의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은 인간에게 개입할 수 없어요. 인간들이 해내야만 하는 일을 신이 돕게 되면 세상은 나태해지고 흐름은 걷잡을 수 없게 될 테니까요.”
그건 신전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만한 아주 기초적인 상식이었다.
여신은 절대 인과율을 어길 일을 만들지 않는다. 철저하게 절차를 중시하고 결과가 어떨지 알면서도 개입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전멸이더라도.
“인간의 죽음이 그 예에요. 아끼던 신자가 죽었대도 신은 개입하지 않죠. 나서서 살리지도 않아요. 그건 인과율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실이 꼬이는 순간 가장 곤란해지는 건 신이다. 그 때문에 곤란할 일을 사서 행하지도 않는다. 나의 죽음이 그러했고, 프리실라의 죽음이 또 그러했으니까.
아무리 황당하고 허무한 끝이더라도, 그럴 운명이었다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신탁은 제국의 사정에 너무 깊이 발을 뻗고 있어요. 단순히 ‘어떤 조건을 갖춘 이가 황위에 오를 것이다’ 정도가 아니라, 황실이 어떤 가문을 견제해야 하는지까지 묘사하고 있으니까요.”
“……그건 확실히 이상하군.”
나의 말을 듣고 있던 아슬론 역시 비상식적인 일이라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정확히 신탁의 내용이 뭐였지?”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으리라. 어둠을 쥐려 하지 않는 자에게 영원의 영광이 있으리라. 어둠이 곧 빛임을 명심하라.』”
“신탁의 애매모호함은 평소와 비슷한데…….”
내가 읊은 신탁의 내용에 아슬론이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잘린 듯한 느낌은 있지만 그게 근거가 되진 못할 거 같은데.”
“문제는 신탁 자체가 아니에요.”
“그렇다면?”
나는 눈썹 한쪽을 올린 채 묻는 아슬론을 마주 보았다.
“신탁의 해석 말이에요. 대신관이 한 해석이 조금 이상해요.”
나는 살짝 눈을 감은 채 기도실에서 들었던 해석을 떠올렸다.
“빛과 어둠이 같다는 것은 이 제국의 어두운 부분까지 굽어살피는 아르타나 여신의 비호임을 뜻하며 빛과 어둠은 각각,”
대신관이 이르길 빛과 어둠의 의미는,
“빛은 제국의 태양, 대 루엔트 제국의 필리티움 황가를 의미하며 어둠은 황가를 도와 제국을 지탱하는 봉신 가문으로 생각된다.”
나의 말이 끝나자 아슬론은 알았다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
“결국 대신관이 해석했군.”
“원래 신탁이 내려오면 대신관이 해석하는 거 아닌가요?”
“신탁은 신전 전체에서 해석하는 게 맞아. 중앙 신전뿐만 아니라 제국에 있는 다른 신전의 신관들과 함께 말이야.”
“그렇다면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는 말씀이세요?”
내 물음에 아슬론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공표조차 대신관 마음대로 하지 않았나.”
확실히 아슬론의 말대로 이번 신탁에 대한 공표는 이른 감이 있었다.
그게 오랜만에 제국에 내려온 신탁을 하루라도 빨리 제국민과 나누기 위해서인가 했지만, 아무래도 그들에겐 급하게 공표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 신탁은 대신관이 일방적으로 한 통보에 가깝다. 게다가 몇 년 만에 내려온 신탁을 깊은 연구도 없이 이토록 빨리 발표하는 것을 보면 발표된 내용조차 의심이 가는군.”
‘그렇다면 역시 대신관이 한 말은 거짓이려나.’
그렇다면 대체 왜?
대신관이 다른 신전과 신관들, 그리고 여신의 미움을 받을 각오까지 하고 이리 나서야만 했던 이유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목적이 있었던 걸까.”
중얼거리듯 묻는 아슬론의 말에도 나는 선뜻 답할 수가 없었다.
‘짐작 가는 바는 있지만 물증이 없으니까.’
예전부터 프리실라의 죽음에 황후와 신전이 깊이 연관되어 있으리라 생각한 나로선 대신관의 뒷배가 누구인지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함부로 입 밖으로 내는 것은 곤란했다.
잠시 무언가 고민하던 아슬론은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대신전에 가자고?”
“네. 신탁은 대신전에도 내려왔을 테고, 대신관의 영향력이 그것까지 미치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확실히.”
아무리 대신관이 황실과 연관되어 있고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해도 그게 가장 신성하다는 대신전까지 닿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하고.’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슬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볼 만한 일이야. 한 번쯤 확인해보는 것도 좋겠어.”
“스승님께선 언제 시간이 되세요?”
그러자 아슬론은 책상 위 대충 정리해 둔 종이를 가볍게 훑으며 말했다.
“내일 가지.”
“내일이요?”
나는 생각보다도 더 이른 날짜에 당황하여 되물었다.
“당장 내일이라니…….”
빨라 봐야 이틀 후일 거라 생각했다. 사실 그마저도 내 욕심이라 여겼는데.
내가 말없이 그를 바라만 보고 있자, 아슬론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빠를수록 좋잖아?”
“그렇긴 해요.”
나는 혹여 그가 마음을 바꿀까 싶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가는 거예요?”
“그래. 호위 없이 가는 걸로 알고 있으면 되나?”
“네.”
그러자 아슬론은 어쩐지 장난기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공작이 허락을 하려나?”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이미 받았으니까요.”
“공작이 그걸 허락했다고?”
“혹시 무슨 문제라도……?”
나의 물음에도 잠시간 멍하니 있던 아슬론은 곧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공작도 정말 노력하는군.”
“노력이요?”
어리둥절해하는 나의 표정에도 아슬론은 별말 없이 웃기만 했다.
“아주 보기 드문 일이야. 아주…….”
‘대체 뭐가 보기 드물다는 거야?’
하지만 나는 끝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 * *
“그래서…… 지금 바로 떠난다고?”
헤이녹스는 아침이 밝자마자 집무실로 찾아온 록시나를 보며 허탈한 듯 말했다.
“당장 말이냐?”
“아뇨, 지금은 아니고요. 일단 간단하게나마 짐도 싸야 해서 아침 식사는 하고 가려고요.”
“……그래.”
그는 솔직히 록시나가 이토록 빨리 대신전으로 떠날 줄은 몰랐다.
‘이미 허락했으니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곤란하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 말에 당장이라도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막고 싶었지만 이제 와 말을 바꾸는 게 더 무리인 것 같았다.
“조심히 다녀오거라.”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조심히 다녀오라는 것.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 한마디밖에 없어서.
‘널 지키겠다고 그토록 애를 썼는데.’
늦었지만 헤이녹스는 후회했고, 록시나는 그런 못난 그를 받아 주었다.
이제부터라도 평생 이 아이만을 위해 살겠다 다짐했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록시나를 향해 있었다. 조금이라도 그 아이의 앞길을 막을 무언가를 치워 버리기 위하여. 그런데,
‘여전히 나는 무능력하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또다시 너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이 내게 매섭게 다가온다.
그리고 너는 언제나처럼 이해심이 깊고, 나를 이렇게 또 이해해 준다. 어쩔 수 없다고, 이건 불가피한 일이라고.
어느새 훌쩍 커 버린 것만 같은 록시나의 모습에 헤이녹스는 어쩐지 서운하면서도 대견했고, 또 부끄러웠다.
‘아직도 한없이 부족한 아빠다.’
너를 품어 주겠다 나서기엔 내가 너무도 비루하다. 네가 이토록 단단하게 성장하는 동안에도 나는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구나.
헤이녹스는 가볍게 미소를 지은 후 집무실을 나서는 록시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몇 시간 뒤 록시나가 대신전으로 떠날 때는 가문의 회의가 있는 터라 배웅을 할 수 없어 더욱 끈질기게 그 뒷모습을 쫓았다.
그리고 그 순간,
헤이녹스는 어쩐지 록시나를 바라봐야만 했던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것 같다는,
그런 우스운 생각을 했었다. 아주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