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헤델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갈등하는 거겠지.’
선뜻 이 제안을 받아들여도 되는지. 체드만이 그럴듯한 조건을 붙였지만, 10년이나 후작과 대립하던 그녀로선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것도 사실이야.’
그녀가 왜 고민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나는 구태여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옆에서 함께 기다리던 앤이 더 안절부절못하던 그때, 헤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괜한 폐를 끼치는 건 아니죠?”
조심스러운 질문이 참 앤의 언니다웠다.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린 채 그녀에게 말했다.
“물론. 가문 사이에 일에 이용한 것 같아 오히려 미안한데.”
“아뇨,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자마자 헤델은 단호히 말했다.
“저를 생각해 주신 거잖아요. 그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헤델은, 곧 결심한 듯 시선을 들어 나를 마주 보았다.
“저, 아무래도 포기 못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헤델은 어쩐지 후련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한 오묘한 표정이었다.
“공녀님 죄송해요. 사실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 깊은 관계가 아니라고요.”
‘누가 봐도 둘이 깊은 관계란 건 모를 수가 없지.’
비록 나는 오늘 헤델을 처음 만났음에도, 그녀가 연인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떨리는 눈꺼풀,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자꾸만 짓씹는 입술에서 그대로 드러났으니까.
헤델은 여전히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하고서도 말을 이어 갔다.
“그분과는 꽤 오래 되었어요. 처음 수도에 올라와 낯설어하던 제게 첫 친구가 되어 주었고, 그 이후로는 늘 함께했으니까요. 그리고 그 고마움과 친숙함이 사랑으로 변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어요.”
헤델은 아직 흔들리는 어깨를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말했다.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제게 언제나 도움이 되고 싶어 했고요. 비록 제가 다 필요 없다며 선을 그었지만 말이에요.”
나는 고되게 일을 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손가락과 군데군데 멍이 든 팔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요, 제가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가는데 미래를 생각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어요. 정말 웃기죠? 그분이 확신을 주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나는 직감적으로, 헤델이 연인과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지 않게 된 것이 브루안트 후작의 반대에 부딪히고부터라는 걸 알았다.
“정말 노력 많이 했어요. 저도, 그분도. 인정받기 위해 아등바등, 진짜 많이 힘들었는데.”
헤델은 어쩐지 씁쓸한 듯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결국 이렇게 다른 분의 도움을 받고야 마네요.”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확실히 하려는 듯 묻는 체드만에 헤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염치없지만, 부탁드려요.”
그녀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럼 그렇게 알고 먼저 가 보도록 하지.”
헤델이 제안에 응한 만큼 소후작의 의견도 최대한 빨리 얻어 그들의 혼인을 향한 속도에 불을 붙여야 했다.
‘저택을 하도 급하게 나와서 걱정할 것 같기도 하고.’
헤이녹스도 내가 서두르는 이유를 알았는지 막지는 않았지만, 호위 하나 붙인 정도로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였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걱정이 많아지신 것 같아.’
아무래도 요즘은 신전이나 황후파의 움직임이 표면으로 드러난 데다 신탁에 대한 언급까지 된 상황이라 그런지 헤이녹스는 더 촉각이 곤두서 있는 듯했다.
“가자, 오라버니.”
나의 말에 체드만은 내렸던 후드를 썼다.
“앤은 더 있다가 올래?”
내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앤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니랑 조금만 더 이야기하다 갈게요. 늦지 않게 돌아가겠습니다.”
헤델의 옆에 선 채 전보다 편해 보이는 앤의 표정에 나는 싱긋 웃었다.
* * *
“…….”
록시나와 체드만이 떠나고 둘이 남은 호숫가에는 정적이 흘렀다.
“……어떻게 된 거야?”
헤델의 물음에 앤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공녀님께서 브루안트 후작가와, 정확히는 소후작님과의 거래하셔야 한대. 그리고 그걸 위해선 소후작께서 가주의 자리에 있으셔야 하고.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가문과의 관계에 중요한 일이라는 건 확실해.”
“그렇구나.”
짧게 대답한 후 헤델이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불안해진 앤이 물었다.
“미안. 내가 함부로 언니 이야기해서 화났어?”
그러나 헤델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화 안 났어.”
그러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호수를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조금 허탈했달까. 그토록 오래 진심으로 다투어 왔는데, 그게 다른 사람들에겐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럼 지금이라도 제안 거절할래? 공녀님께선 그런 일로 앙심을 품을 분이 아니니까 내가 잘 말씀드려 볼게.”
그러나 헤델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러면 대체 왜 제안을 받아들인 거야?”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판단했을 뿐이야.”
그녀라고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10년 동안 해 온 노력들이 모두 무의미했다는 생각에 조금 비참했고, 결국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끝낼 수 있음에 새삼 그녀의 무능함이 느껴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거절할 수 없었던 건,
“내가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러기엔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서. 그냥 이대로 놓기에는 고마운 사람이라서.
“염치없다는 걸 알면서도 믿고 싶었어.”
나를 도와주겠다는 공녀님의 모습을. 비록 모든 게 계산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모른 척 믿고만 싶어서.”
오늘이라면 그래도 될 것 같아서.
그게 오늘이라면.
* * *
헤델 판을 만난 후 며칠 뒤, 체드만은 소후작을 만났다.
소후작 역시 차기 가주가 될 사람이니만큼 체드만이 직접 만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후계자인 체드만이 직접 나서는 것이 탄제리크의 뜻이라는 데에 더 무게를 실어 주기도 하고.
“오라버니.”
나는 외출 후 방으로 찾아온 체드만을 반기며 말했다.
“이야기는 잘 끝났어?”
내 질문에 체드만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앉아서 이야기하자.”
“아, 미안.”
급한 마음에 체드만을 앉히지도 않은 채 물어봤던 모양이다.
나는 머쓱한 마음에 얼른 그를 의자로 데려왔다.
“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 됐어. 소후작도 좀 의아해하는 것 같긴 했지만 동의했고.”
브루안트 소후작의 입장에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브루안트가는 탄제리크와 사업적 파트너로 관계를 맺은 적은 있지만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던 관계는 아니니까.
‘게다가 자신에게 무언가 바라는 게 있다는 느낌을 몰랐을 리도 없고.’
당장 로이스터를 지지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수 없으니 명확히 이유를 밝히진 못했다.
모든 일은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했고 의도를 꺼내기 위해선 적어도 소후작이 가주 자리를 물려받은 후여야만 하니까.
“잘 진행될 테니 걱정 마.”
체드만은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는 대신전에는 언제 가기로 했어?”
“브루안트 후작가 일도 잘 끝났다니까 나도 곧 가야지.”
“곧이라면, 일주일?”
“아니. 빨리 갈수록 좋을 것 같아서. 스승님께서 된다고만 하시면 이틀 뒤쯤 떠나려고.”
“이틀 뒤라고……?”
체드만은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조금 당황한 듯 말했다.
“이틀이면 준비를 하기엔 좀 부족하지 않나?”
“무슨 준비?”
“음, 마음의 준비 같은 거?”
나는 그답지 않은 실없는 말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장난치는 거지?”
하지만 체드만은 내 물음에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웃기만 했다.
‘뭐지……?’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는데도 느껴지는 왠지 모를 서늘함의 이유를,
나는 그때 알아챘어야만 했다.
* * *
“스승님, 혹시 지금 시간 되세요?”
“록시구나. 들어와.”
아슬론 윈터쳇은 얼마 전부터 연구실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연구하기에 바빴다.
“아직 연구 중이세요?”
아슬론이 대충 치운 책상 위는 연구하다만 흔적으로 너저분했다.
“최근에 좀 특이한 걸 발견해서. 뭘로 만들었는지 좀 알아보려고.”
나는 조금 궁금하긴 했으나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인 것 같아 구태여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의자에 앉은 채 조용히 방만 두리번거리자 정리를 마무리한 아슬론이 나를 마주 보며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라고?”
“아, 스승님 이틀 뒤에 시간 되세요? 한 10일 정도요.”
“10일?”
“네. 지금 진행 중인 연구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러자 아슬론은 대충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연구는 됐어. 별로 급한 일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어디 갈 건데? 예전처럼 호위 하나도 같이 가나?”
“아니요. 이번에는 저와 스승님만 갈 거예요.”
그 말에 아슬론은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대체 어딜 가길래…….”
“대신전이요.”
아슬론은 오랜만에 들은 신전이라는 단어에 미간을 찌푸렸다.
“신전에?”
“네. 스승님 불편하실 거 알지만 꼭 가야해요. 이번에 내려온 신탁이 아무래도…….”
나는 잠시 크게 숨을 들이켠 후 내뱉듯이 말했다.
“거짓말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