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 * *
수도에 있는 선착장에는 제국의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타국과도 교역하는 곳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고 분주했다.
“여기서 찾을 수 있을까요?”
당장 코앞에도 사람과 온갖 짐으로 붐벼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앤이 동동거리는 사이에 나는 애써 고개를 세운 채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사람들의 얼굴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사람이 많아서 찾기가…….”
“내가 찾을게.”
곤란해하던 찰나, 저택에서부터 함께 온 체드만이 앞장서며 말했다.
그는 나보다 키가 한 뼘 반 이상은 크기에 헤델을 찾기에 더 유리할 듯했다.
“갈색 머리라고 했지?”
“네. 그런데 갈색 머리인 사람이 하도 많아서 알아보지 못하실지도 몰라요.”
“플레리 아카린즈과 함께 있을 테니 그리 어렵진 않을 거다.”
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플레리 아카린즈는 눈에 띄는 사람이니까.’
플레리 아카린즈는 분홍색 머리에다가 분홍색 프릴이 달린 옷을 입고 다니니까. 확실히 눈에 띄는 취향이긴 했다.
‘지난번 연회에서도 별로 바뀐 것 같진 않았지.’
어렸을 때만큼 광적인 핑크 도배는 아니었지만, 노란색이나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도 꼭 리본이나 프릴을 분홍색으로 달았다.
‘그 풍성한 분홍색 머리도 못 알아볼 수가 없으니까.’
체드만 옆에서 나도 애써 목을 뻗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7시는 안 됐으니까 배에 타진 않았을 텐데…….”
아슬아슬했지만 벌써 배에 탔을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분홍색, 분홍색이 어디…… 아!”
나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분홍색 머리에 눈을 크게 떴다.
“저기! 저기 있는 거 맞지.”
내가 가리킨 손가락의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 체드만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런데 주변 사용인들이 다 갈색 머리라…….”
“제가 찾아볼게요!”
황급히 플레리 근처를 훑어보던 앤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언니가…… 없어요.”
“뭐?”
“저 중에 언니가 없어요. 분명 오늘 간다고 했었는데…….”
혼란스러운 듯 앤은 떨리는 동공으로 말했다.
“설마 이미 떠난 건…….”
“이미 떠날 수도 있다는 거야?”
나의 물음에 앤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미 떠난 사용인들도 있을 거예요. 백작 영애가 도착하기 전에 머물 곳을 정리해 두어야 하니까요.”
잠시 고민하듯 입을 다물고 있던 체드만은, 이내 앤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저 중에 아는 사람이 있나? 언니와 친한 사용인이라거나.”
“언니와 친한 사람이라면…….”
체드만의 말에 재빨리 주변을 훑던 앤은 누군가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뜬 채 말했다.
“저기 있어요! 헤델 언니하고 친해서 가끔 본 적도 있어서 저를 알아볼 거예요.”
“일단 그 사람부터 불러보지. 플레리 아카린즈가 모르게. 아마 사용인들이 마지막으로 배에 탈 테니 그사이에.”
“네!”
그리고 나와 체드만, 그리고 앤은 선착장 근처 짐에 몸을 숨긴 채 플레리가 배에 타기만을 기다렸다.
“탔다!”
나의 외침에 앤은 쪼그려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제가 가서 얼른 물어보고 올게요.”
그리고 앤은 남은 짐과 함께 대기 중인 아카린즈가 사용인들을 향해 다가갔다.
“브루안트 후작에게 이미 말을 해 두었는데…… 만약 헤델과 만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이미 떠난 거라면, 다시 데려와야겠지. 번거롭긴 하겠지만 브루안트는 나중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가문이니까.”
“그럼 연회 전까지 시간을 못 맞출 수도 있겠네.”
“아마도.”
그리고 한동안 정적이 흘렀을 때, 나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정말 헤델이 제국을 떠난 걸까?”
나의 말에 잠시 생각하듯 가만히 있던 체드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 내 생각에는…….”
“아가씨!”
앤이 밝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을 본 체드만이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닐 거 같은데.”
“아가씨, 도련님!”
멀리서부터 달려온 앤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아직 아니래요! 원래는 언니가 오늘 떠나기로 했었는데, 다른 사람하고 일정을 바꾸었다고 해요. 오늘은 휴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대요.”
“휴가를 냈다고?”
의문 섞인 물음에 앤 역시 의아한 듯 답했다.
“무슨 일이 있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어쩌면 제국을 떠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했었는지도 몰라요.”
“출근하지 않았다면, 어디에 있는 거지? 혹시 본가로 돌아간 건가?”
체드만의 말에 앤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본가와 수도가 머니까 사용인 휴가 며칠로는 다녀올 수가 없거든요. 대신 가끔가다 언니가 휴가를 내면 가는 곳이 있어요. 오늘도 그곳에 있을 거예요.”
“그럼 거기로 가자.”
우리는 앤의 안내에 따라 마차에 타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가까운 곳이에요. 여기서 선착장을 끼고 돌면 호수가 있거든요.”
선착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착한 나는 체드만의 손을 잡은 채 마차에서 내렸다.
“수도에 이런 곳이 있었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에요. 언니와 저도 우연히 알게 됐거든요. 운이 좋았죠.”
‘제국에서 이렇게 한적한 호숫가라면 인기가 많을 텐데. 선착장에 가려져서 눈에 띄지 않았던 건가.’
나무와 풀들에 가려져 있던 호수는 작지만 물이 맑고 깨끗했다. 주변에는 들꽃도 자라고 있었고.
“저기 있다.”
호수 옆에 나무에 기대앉은 한 여자를 보곤 앤이 작게 중얼거렸다.
“저기 모자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제 언니예요.”
그러곤 앤은 천천히 그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
“언니.”
자고 있는 게 아니었던지, 앤의 작은 목소리에도 고개를 들었다.
“앤? 네가 여긴 왜…….”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헤델은 멀찍이 서 있는 나와 체드만을 발견하곤 다시 고개를 돌려 앤을 바라보았다.
“저분들은 누구…….”
“아, 언니는 처음 뵙겠구나. 저분들은…….”
앤의 머뭇거리는 듯한 모습에 나는 한 발짝 다가갔다.
그리고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검은 머리칼과 푸른 눈을 보여주었다.
“불쑥 찾아와 미안하네.”
나는 정체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헤델은 이미 나의 외견만 보고도 알아본 듯했다.
“공녀님……!”
헤델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섰다.
“여긴 어떻게…….”
“앤의 언니라고 들었어.”
“네, 맞습니다.”
“플레리 가문에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곧 제국을 떠나야 한다고.”
“……그것도 맞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헤델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후 천천히 말을 꺼냈다.
“브루안트 소후작과 오랫동안 연인관계였다고 들었고,”
“아…….”
그 말에 헤델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퍼뜩 고개를 든 채 말했다.
“그리 깊은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곧 이 제국을 떠날 테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아니, 잠깐만.”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지금 헤델의 모습은 뭐랄까, 약혼녀에게 바람을 들킨 것만 같은 모습이랄까.
“깊은 관계가 아니면 곤란한데.”
“네?”
얼떨떨한 헤델의 모습에 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말했다.
“따지러 온 게 아니야. 도와주려고 한 건데.”
“도와주시다니, 그게 무슨…….”
“브루안트 후작의 허락이 필요하잖아. 둘이 혼인하려는 걸 후작이 반대하고 있다며.”
“……맞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그녀의 물음에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눈만 굴렸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체드만이 나섰다.
“탄제리크는 지금 소후작이 차기 후작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자세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가문 사이의 이해관계 때문이라고만 말해 두지.”
체드만은 헤델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로 말을 적당히 돌려 말했다.
“현재 소후작이 혼인을 하는 것이 후작위를 물려받는 조건인데, 헤델 판이 아니라면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해서 말이야.”
“아…….”
“그런데도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헤델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나와 체드만, 그리고 앤을 번갈아 보는 헤델의 표정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후작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요.”
“브루안트 후작은 이미 알고 있어. 공작가와의 교류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말하더군.”
“그게, 정말인가요……?”
되묻는 헤델의 모습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대로 끝낼 생각인가? 10년을 넘도록 이어온 관계를 이대로?”
나는 부르튼 헤델의 손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포기할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