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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100)화 (100/106)

<100화>

* * *

“저 대신전에 가려고요.”

나는 렌자드를 제외한 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던 중 말했다.

“스승님과 가면 폭주할 걱정도 없으니 괜찮을 거 같아서요. 물론 스승님께선 같이 가 주신다고 했고요.”

“……대신전이라니.”

헤이녹스가 무언가 생각에 잠긴 사이, 체드만이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대신전은 왜? 중앙 신전에서 무슨 일 있었어?”

“오라버니도 알다시피, 신탁이 내려왔잖아.”

나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헤이녹스와 체드만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근데 난 신탁의 내용이 영 찝찝해. 대신관의 해석을 전부 믿지도 못하겠고. 어쩐지 숨겨진 내용이 더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대신전에 가겠다는 거야?”

“응. 대신전은 대신관의 영역 밖이니까. 어쩌면 제대로 된 신탁의 내용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신탁의 해석이 황위 계승과 관련되었다지.”

느릿하게 물어오는 헤이녹스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대신관은 개국공신 가문을 저격하는 듯한 해석을 했고요.”

“그건 황후의 머리에서 나온 발상일 테고.”

헤이녹스는 팔짱을 낀 채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대신전까지 다녀오는데 얼마나 걸릴 거 같나?”

“10일 정도요. 늦어도 2주 내로는 돌아오려고요.”

“다음 황실 연회 전까진 수도에 도착할 생각이구나.”

연회는 지금부터 한 달 뒤다. 드레스를 주문하고 로이스터와도 말을 맞춰야 하니 시간이 필요했다.

“늦지 않게 올게요. 지장 주는 일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일에 차질이 생길까 봐 걱정되는 게 아니다.”

헤이녹스는 나와 지긋이 눈을 맞췄다.

“……혹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되는구나.”

“무슨 일이요?”

“대신전에 가거나 오는 길에 질 낮은 무리를 만나거나, 다리를 건너는데 운이 나쁘게 비라도 내리면…….”

나는 새삼스러운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혹시 잘못될까 봐서요?”

“……그래.”

“아버지, 저 10년 넘게 제국을 돌아다녔어요. 움직이는 동안 늘 안전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안다. 네가 그렇게 쉽게 당할 애가 아니라는 것도. 하지만 이번에는 기사도 동행할 수 없지 않느냐. 대신전에 간다는 건 나와 체드만 정도만 알고 있어야 하니.”

듣고 보니 헤이녹스의 걱정도 이해가 되었다. 지난 몇 년간 매개를 찾기 위해 돌아다닐 때는 나의 신변을 지켜 줄 기사가 따라다녔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내가 대신전에 가는 건 비밀이니까.’

숨겨진 신탁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수도를 떠난다는 사실은 체드만과 헤이녹스만 알고 있어야 했다.

‘왜 걱정하시는지 알겠어. 그치만,’

“정말 곤란할 것 같으면 도움을 요청할게요.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요.”

그러나 여전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헤이녹스의 미간에 나는 살풋 웃어 보였다.

“조심히 다녀올게요. 이건 어머니와 탄제리크를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잖아요.”

“……그래.”

프리실라까지 언급하며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보이자, 헤이녹스는 결국 한 발짝 물러났다.

“알아내지 못해도 괜찮으니 너무 미련 갖지 말거라. 너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알겠어요.”

“정말이야, 록시. 만약 아슬론 윈터쳇과 너, 모두 돌아올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라면 혼자서라도 도망쳐.”

“명심할게.”

체드만의 다소 편애하는 말에도 나는 작게 웃으며 답했다.

처음 저택을 떠나는 것도 아닌데, 체드만과 헤이녹스의 저 우려된다는 표정을 보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내가 좀 이상한 건가.’

나를 걱정하는 거라 생각하니 새삼 간질거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헤델 판에 대한 이야기는 앤에게 미리 해 둘게요. 아, 그러고 보니 브루안트가에 한 번 방문해야겠어요.”

“네가 굳이 갈 필요 없다. 이미 브루안트 후작과는 말을 끝내 놓았으니.”

“정말요? 후작이 뭐라던가요?”

헤이녹스의 말에 내가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가주와 헤델 판의 관계를 인정하겠다더구나. 빨리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먼 곳으로 휴가를 가고 싶다던데.”

“역시 지쳤었나 보네요.”

브루안트 후작과 그의 아들의 대립은 꽤 오래되었다. 아들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동안에도 내심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어쨌든 잘되었어요. 아직 헤델이나 소가주에게는 말하지 않으셨죠?”

“네가 앤에게 가장 먼저 말하고 싶어 할 것 같아 아직 알리지는 말라고 했다.”

헤이녹스의 예상은 정확했다. 이제껏 앤과 헤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입이 근질거렸으니까.

“앤에게는 오늘 말해야겠어요. 헤델 판을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브루안트 소가주와는 약속을 잡고 싶고요.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 필요할 테니까요.”

“그래. 소후작에게 미리 서신을 보내두지.”

“감사해요. 그럼 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날게요.”

그리고 나는 앤에게 말할 생각에 신이 난 채로 식당을 나섰다.

* * *

“앤!”

“아가씨? 오늘은 디저트 안 먹고 오세요?”

평소보다 식사를 일찍 끝낸 나를 본 앤이 의아한 듯 물었다.

“아, 앤한테 빨리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저한테요?”

“응, 일단 여기 앉아봐.”

내가 창가 옆 의자에 앉아 반대편을 가리키자, 앤은 털던 이불을 내려놓은 채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신데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앤의 표정에 나는 애써 차분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앤, 드디어 내가 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날이 되었어.”

“드디어라고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앤의 언니가 연인의 부모님께 인정받지 못해 괴롭다고 했지?”

“그랬…… 었죠?”

“내가 방금 들었는데, 브루안트 후작이 결국 둘 사이를 인정하기로 했대!”

“네?”

앤은 진심으로 놀란 듯 벙찐 채로 되물었다.

“브루안트 후작께서, 언니와 소후작님과의 사이를 인정하셨다고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앤은 상체를 내 쪽으로 더욱 기울여 물었다.

“공녀님께서 후작님을 설득하신 거예요? 언니는 알고 있는 거구요?”

“의견을 낸 건 나지만 후작을 설득한 건 아버지야. 아직 헤델이나 소후작에게는 알리지 않았고.”

“어떻게 그런…….”

여전히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앤의 모습에 나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소후작은 내일쯤 만날 거야.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줘야 할 테니까. 헤델한테도 아직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내일 같이 만나 봐야 하나?”

나의 말에 앤은 갑작스레 무언가 떠오르는 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어떡해!”

“왜? 무슨 일인데?”

앤은 굉장히 급한 일을 잊은 사람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이 언니가 출항하는 날이에요!”

“뭐? 출항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의 물음에 앤은 초조해하며 애써 말을 이어 갔다.

“언니가 모시는 아카린즈 영애가 오늘 출항한다고 했어요.”

“거길 헤델도 따라가는 거야? 플레리 아카린즈와 같이?”

‘하필 오늘이라니……!’

플레리를 이렇게 빨리 제국 밖으로 내보낼 줄은 몰랐다.

“언제 오는지도 모르는 거지?”

“네. 아카린즈 백작님이 많이 화가 나셔서 반성할 때까지 돌아올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들었어요. 이걸 어떡하죠……?”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듯 앤은 애꿎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상황이 이렇다면 시간은 오늘밖에 없어.’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들어 앤을 바라보았다.

“출항 시간이 언제라 그랬지?”

“오늘 저녁 7시요. 선착장에 가고 있을 시간이에요. 어쩌면 이미 도착했을 수도 있고요.”

“가자.”

“지금요……?”

앤이 어느덧 6을 가리키는 시계에 얼떨떨한 듯 묻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수도에 있는 선착장일 거 아니야. 서두르면 출항하기 전에 도착할 수도 있어.”

“아가씨…….”

감동받은 듯 눈시울을 붉히는 앤에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감사 인사는 나중에. 우선은 나갈 준비부터 하자. 한시가 급하니까.”

그 말에 앤은 정신을 차리곤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알겠어요. 그럼 저는 외투를 가지고 금방 내려갈게요!”

그러곤 내가 마차를 부르기 위해 방을 나서려는 찰나, 앤이 내 뒤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감사해요, 아가씨!”

“……인사는 나중에 하라니까.”

그 소리에 멈칫한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앤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도 할 거예요. 지금도 감사하고 나중에도 감사할 테니까요.”

그 맑은 고집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앤 마음대로 해.”

그리고 방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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