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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99)화 (99/106)

<99화>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거지?’

대신관의 해석은 아무리 봐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겐.

‘봉신 가문이 황위를 탐낸다는 말을 이렇게 공개적인 곳에서 하다니.’

거대 가문을 향한 견제를 비롯하여 다른 귀족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 하더라도 이건 너무 성급했다. 자칫 신전이나 황실이 봉신 가문 전체의 질타를 받을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급하게 나온다는 건,’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간만 보던 황실이나 신전이 직접 나서야만 했던 이유가.

이를테면,

‘로이스터가 황위를 탐낸다는 사실 같은 거.’

그리고 그런 2황자를 탄제리크에서 몰래 돕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눈치챈 건가.’

황후가 로이스터와 몰래 접촉하는 인물이 나 혹은 탄제리크 중 누구라는 사실까지 알아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2황자가 결코 백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 걸 보면 로이스터가 기사로 서임되기 전부터 이미 정해진 계획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목표가 확실해졌다는 거지.’

모두가 1황자의 황위 계승을 확신하고 있는 이때, 로이스터를 나서서 지지할 곳은 제국에서 뿌리 깊은, 적어도 봉신 가문 정도로 생각했을 테니.

‘귀족들의 분열을 원하는 건가.’

어느 가문이라고 특정 지을 순 없었을 테지만, 빛과 어둠이라고 말한다면 많은 이들이 떠올리는 건 분명 황실과 탄제리크일 것이다.

황실과 함께 동등한 입장으로 엮일 수 있는 것은 제국에 탄제리크 하나뿐이니까.

‘다행인 건 아직 탄제리크를 향한 본격적인 견제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거.’

확신이 없는 상태로 탄제리크를 공격하는 것은 황실의 입장에서도 큰 부담이니 언급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분명 황후가 의심하는 이들 중에 탄제리크가 있을 것이다.

‘알기 전에 선수를 쳐야 돼.’

언제까지고 로이스터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은 없다. 어차피 황위 쟁탈전이 시작되면 로이스터 역시 드러내야 할 것이 많아질 테니까.

탄제리크는 그때, 그리고 이왕이면 화려하게. 그렇게 몸집을 드러낼 생각이다.

황후가 판을 쥐고 흔들려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록시.”

그때 생각에 잠겨 있는 나를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걱정스럽다는 듯 묻는 체드만의 목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그래.”

한결 풀어진 그의 표정에 문득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오라버니는 걱정 안 돼?”

나와 로이스터는 이왕이면 화려하게 터트리자 마음먹었다지만, 체드만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그 나름대로 짜놓은 계획이 있으나 지금 신전의 이런 돌발행동이 그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체드만에게서는 긴장의 기색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예상 못 한 거 아니잖아.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거.”

그의 말이 맞았다. 황후가 제국에서 가장 큰 세력인 우리를 견제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탄제리크를 늘 의심했으나 선뜻 추궁하지는 못했다는 것까지도.

‘간을 보고 있었던 거겠지. 언제쯤 공격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지.’

실패하는 순간 돌아오는 피해가 너무 클 테니까 황후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황실이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 탄제리크를 견제하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 일에 신탁을 이용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황실, 정확히 말하자면 황후와 신전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황후가 신전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게 크다니.’

오늘 대신관의 해석은 너무도 의도하는 바가 명확했다. 위협을 무릅쓰고 이토록 한 쪽에 치우친 신탁의 해석을 한다는 건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

그럼에도 체드만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시기를 정하셨어.”

체드만은 정면을 바라보며 나만 들리도록 작게 중얼거렸다.

“다음 연회가 될 거야.”

‘다음 연회에 밝힐 거라면,’

“시간이 좀 남았네.”

그전 연회가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신탁이 공개되고 난 후인 만큼 각 가문들이 줄을 타기 위해 치열한 눈치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이미 몇 가문과는 이야기 끝냈어.”

‘역시 하르펠이나 테리온즈 같은 곳과는 말을 맞춘 모양이네.’

그 몇 가문 중에 긴 시간 소가주들 간의 유대를 유지하고 있는 하르펠이나 프리실라의 친정인 테리온즈가 있을 거라는 정도는 예상했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보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말을 아꼈다.

“신전에서는 아르타나 여신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밤낮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디 대 루엔트 제국에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대신관은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굳이 정리하지 않은 채 금방 자리를 떠났다.

황제와 황후 역시 별다른 말 없이 기도실을 떠났고.

“록시는 조금 더 있다가 올 거야?”

체드만의 물음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곧 따라갈게.”

흘끔거리는 귀족들의 시선을 피해 기도실을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앤이 다가왔다.

“아가씨. 저 마차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요.”

앤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신전에 올 때는 보지 못했던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황자님.”

나는 문을 열자 보이는 얼굴에 살짝 고개를 숙였다.

“왔군. 신전 안에는 자리가 마땅치 않아 마차로 불렀네.”

나는 로이스터의 건너편에 자리를 잡은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회에서 황자님의 황위 계승에 대한 의사를 밝힐 겁니다.”

“시간이 좀 있겠군.”

“네. 그동안 저 역시 지지할 가문을 모을 테니 황자님께서도 준비해주세요.”

“황후 폐하가 이렇게 본격적으로 나올 줄 몰랐는데 말이야.”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신탁을 그렇게 해석한 것도 뜻밖이고.”

그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처음 발표하는 해석은 신중해야 하는데 오늘 대신관은,’

이상했다. 너무도 기울어져 있었다. 황실과 귀족 사이에 줄타기를 하는 것은 신전의 의무인데, 오늘은 너무도 황실만을 위하는 해석을 했다.

‘직접 알아봐야겠어.’

대신관이 그렇게 해석한 데에는 분명 황후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숨겨진 신탁의 내용이 있거나, 대신관이 한 해석이 완전히 틀렸거나.’

현재 알려진 신탁의 해석은 대신관의 일방적인 해석임으로 믿을 수가 없었다.

‘대신전에 가 봐야겠어.’

대신전은 수도와는 조금 떨어진, 이보다 한적하고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가장 성스러운 존재가 머무는 공간이라고도 불렸고.

‘수도의 신전에서 모르는, 혹은 감추고 있는 내용이 있을 거야. 분명히.’

이렇게까지 감추려는 내용을 내가 알아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지만 일단 가 보는 수밖에.

다음 연회가 있기 전까진 모든 게 확실히 정리되어야 하니까.

“저는 대신전에 갈 겁니다.”

조심스레 입을 열어 로이스터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신탁에 대해 무언가 더 알아내려면 그곳에 가는 수밖에 없어요.”

대신관이 머무는 이곳 수도의 신전은 이미 그의 영향력 아래였다. 그보다 좀 더 직접적으로 신탁의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신전들과 별개로 운영되는 대신전 뿐이다.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닿아 있는, 그 어느 곳보다 성스러운 공간이니까.

‘과연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까.’

고귀한 만큼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막고 있을 테니 쉽진 않을 것이다.

“저는 그곳에 가서 신탁의 바른 해석을 알아 오겠습니다. 그간 황자님께서는 지지 가문의 가주들과 친분을 쌓으시면 좋을 듯합니다.”

“대신전에 간다고.”

나의 말을 곱씹던 로이스터는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겠나? 그곳에도 신관이 있을 테고, 공녀의 신성력을 알아볼지도 모르는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함께 갈 사람이 있으니까요.”

‘잠깐 다녀오는 정도라면 아슬론 윈터쳇으로도 충분해.’

로이스터는 황후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신분이다. 황궁을 비우면 곧장 들킬 테니 대신전은 아슬론과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로이스터는 표정을 굳힌 채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함께 갈 사람이 있다고? 그게 누구지? 공녀의 매개는 나인 걸로 알고 있는데.”

“제 매개는 황자님이 맞습니다. 동행할 사람은 그저, 오래전부터 보아온 이라 믿을 수 있고 제 폭주를 일시적으로 막아 줄 수 있어 함께하려는 것뿐입니다.”

“오래전부터 봐 왔다라…….”

그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님께선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그분과 잠깐 다녀오려고 합니다.”

그러자 무언가 고민하는 듯 입을 다물고 있던 로이스터는 이내 입꼬리 한쪽을 말아 올리며 말했다.

“썩 기분이 좋지는 않군. 내가 대체될 수 있다는 건.”

“…….”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이스터는 예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조심히 다녀오게. 돌아온 후부터는 정신이 없을 테니.”

그리곤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공식적인 나의 연인이 되는 순간 아닌가.”

“아, 그건…….”

문득 달아오르는 얼굴에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눈만 굴리자, 로이스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기다리겠네. 공녀가 나의 연인이 되는 날을.”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마차를 나섰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얼굴의 열감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놀라서 그런가?’

그래. 로이스터가 갑작스레 언급한 ‘연인’이라는 단어에 당황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고서는,

‘이 감정을 설명할 수 없으니까.’

신성력이 폭주하기 전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에 나는 황급히 숨을 들이켰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놀라서 그래. 놀라서.”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신전을 나섰다.

* * *

“단둘이 간다라…….”

록시나와 대신전을 간다는 사람은 분명 아슬론 윈터쳇이라는 자일 테다. 그는 오래전부터 록시나와 제국을 떠돌았다고 하니까.

‘스승이라고 들었는데.’

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불쾌한 마음이 드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내겐 너뿐인데.”

록시나에게는 너무도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주변은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가득했고, 그 사이에 자신이 위치할 곳은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조금 상처인데.’

신성력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구실로, 황위 계승권을 가졌다는 이유로 애써 록시나와 닿을 수 있었다. 만약 그조차도 없었더라면 로이스터가 록시나와 엮이는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아슬론 윈터쳇이 록시나를 안정시킬 수 있다니.’

일시적이라고 한들, 불안한 속은 어찌할 바가 없었다.

“하…….”

겨우 닿았는데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 그토록 오래 바라오던 사람인데 쉽게 놓칠 수는 없다.

‘대신전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돼.’

그때부터 록시나는 자신의 공식적인 연인이 될 테니.

연인이 되어 달라,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온갖 핑계를 갖다 대었다. 록시나와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심 하나만으로.

“너는 모르겠지. 네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강렬한 만남이었는지, 얼마나 지울 수 없는 추억이었는지.

나는 그 잠깐의 기억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기억을 조금씩 떼어먹고, 뼈에 새겨지도록 곱씹었다.

‘이런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면, 너는 분명 도망가겠지.’

오늘, 답지 않게 속을 드러내자 금세 멀어져 버린 너처럼,

“천천히 다가가면 돼. 천천히.”

네가 놀라지 않도록, 언젠가부터 그녀에게서 나의 영역을 넓혀가며.

그때까지 나는 또 참고, 인내하겠다.

지금껏 내가 그래 왔던 것처럼.

* * *

“황후 폐하.”

대신관은 신전의 지하 속 숨겨진 공간에 먼저 와 있던 사람을 보곤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신탁의 내용은 잘 숨겼겠지.”

본론부터 이야기하는 그녀의 태도에 대신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신탁이 내려온 날 함께 있던 이들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그래.”

대신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의 치부를 덮어 준 게 나라는 걸, 늘 잊지 말도록.”

협박과도 같은 말에도 대신관은 그저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늘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탄제리크의 안주인이 죽던 그날, 대신관의 씻을 수 없는 실수를 덮은 건 다름 아닌 황후였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대신관이 깊이 고개 숙이는 모습을 황후는 지긋이 바라보았다.

감정 한 톨 없는 차가운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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