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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98)화 (98/106)

<98화>

“긴장돼?”

모두가 대신관의 말을 기다리는 순간 체드만이 조용히 물었다.

“신탁 내용 말이야.”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황후는 신탁이 차기 황제에 관련된 내용이라 말했지만, 나는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신탁은 아르타나 여신의 영역이니까.’

혹여 신이 내린 힘이라는 신성력이나 그것을 나에 관한 이야기 있다면 무척이나 곤란한 일이 될 거다.

“아직은 밝힐 생각 없으니까.”

솔직한 나의 대답에 체드만은 조용히 웃었다.

“맞아. 아직은 말이지.”

그는 무엇이 재미있는지 굳은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왜 그래. 내 얼굴에 뭐 묻기라도 했어?”

참다못한 내가 그와 시선을 마주치자, 체드만은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냥. 그냥 본 거야.”

“……뭐야.”

그러곤 어색함에 고개를 돌린 순간, 기도실 단상 위에 선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이른 아침부터 신전에 찾아 주신 신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대들에게 아르타나 여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여신의 가호는 무슨.’

이곳에 온 사람들은 전부 신탁이 가리킬 차기 황제가 궁금했을 뿐이다.

신앙심 같은 알량한 이유로 이 꼭두새벽부터 달려왔을 리 없으니까.

‘아까부터 하는 얘기도 다 황좌와 관련된 것뿐이잖아.’

대신관과 황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1황자와 로이스터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

심지어는 대신관이 신탁의 내용을 밝히기 직전인 지금까지도.

“정말 신탁이 차기 황제를 정할까요?”

“어떤 내용이든 1황자 전하가 다음 대 황제가 되지 않겠나.”

“혹시 또 모르죠. 신탁이 2황자를 지지할지도.”

애써 낮춘 목소리로 떠들었으나 남보다 더 감각이 뛰어난 내가 듣지 못할 리 없었다.

“부주의하긴.”

그 작은 소란을 들은 건 체드만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항상 함부로 입을 여는 게 문제지.”

담담한 목소리에 녹아 있는 미묘한 경멸에 나는 휙 고개를 돌려 체드만을 바라보았다.

“왜?”

나와 눈을 마주친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웃음을 짓자 나는 작게 한숨을 쉬듯 말했다.

“……아냐.”

‘가만 보면 체드만 오라버니가 제일 아버지를 닮았다니까.’

기본적으로 헤이녹스는 무표정에 체드만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다뿐이지, 묘하게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서늘함이 닮아 있었다.

“……오빠는,”

나는 그 서늘함이 애꿎은 사람을 긴장시킬 수도 있다는 말을 하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알아서 하겠지.’

나보다 더 오랜 시간 귀족 사회에서 지낸 체드만이다. 적어도 나보다는 더 그들의 생태계를 잘 알고 있겠지.

나는 다른 이들이 떠들든 말든 관심도 없다는 듯 웃는 체드만에게서 고개를 돌려 단상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제국의 수호자 아르타나 여신께서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이에 여신님의 성실한 종이자 대리인으로서 그 내용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대신관은 신성력 덕분인지 그의 본래 나이보다 정정해 보였다.

‘……저 사람이 아슬론 윈터쳇을 탐냈던 사람이란 말이지.’

어릴 때부터 막대한 신성력으로 그 두각을 드러낸 아슬론 윈터쳇을 누구보다 자기의 편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이가 대신관이었다.

‘내가 가장 주의해야할 사람이기도 하고.’

만약 로이스터가 매개라는 것을 아직 몰랐다면, 정말 위험했을 수도 있다.

‘그나저나 로이스터는 어디 있지?’

로이스터 뿐만 아니라 황후와 1황자 역시 단상 위에 없었다.

‘대체 어디에, 아…….’

그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단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황실의 일원을 발견했다.

내가 로이스터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체드만이 작게 물었다.

“앞에 가고 싶어?”

귀족이나 황족이 모이는 공간에서는 보통 신분에 따라 앞쪽 자리를 선점했지만, 나와 체드만은 기도실 가장 뒤에 앉은 참이었다.

“가까이 가고 싶다면 자리를 옮겨도 되는데.”

그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곧 신탁이 공개될 테니 내용만 듣고 돌아가자.”

모두가 고위 귀족이라는 걸 의미하는 앞쪽을 선점하고 싶어 했지만 나와 체드만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대신관이랑 가까워져 봐야 좋을 것도 없고.’

로이스터 덕분에 신성력이 폭주할 걱정이야 없다지만 굳이 위험한 인물을 가까이할 필요는 없었다.

정면을 꼿꼿이 바라보며 답하는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체드만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래.”

크고 작은 소리가 들리던 기도실 내가 완전히 조용해지자, 대신관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으리라. 어둠을 쥐려 하지 않는 자에게 영원의 영광이 있으리라.』”

대신관은 그 어느 때보다 엄숙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둠이 곧 빛임을 명심하라.』”

‘어둠이 곧 빛이라고.’

어둠은 무얼 뜻하는 거고 빛은 또 뭐란 말인가.

‘하여간 뭐 하나 속 시원하게 말해 주는 법이 없지.’

신의 언어란 무척이나 꼬여 있어서, 해석하기 위해 드는 노력이 더했다.

‘이제 무슨 해석이 나오려나.’

같은 공간에 있던 이들 역시 나와 비슷한 이유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 듯했다.

‘황좌와 관련된 신탁이라고 했으니 분명 황자 중 하나를 뜻하는 이야기일 텐데.’

골똘히 생각해 봐도 선뜻 해석을 내놓기 어려웠다.

나의 고민 어린 표정을 보았는지 체드만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신관이 우선 해석할 거야.”

“뭐?”

‘신탁을 대신관이 해석한다고?’

“해석할 만한 여지가 많을 텐데.”

“그래서 대신관의 해석이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어.”

“그래도.”

신탁이 공개되고 처음 나오는 해석에 모두가 집중하지 않겠나.

‘대신관의 권력이 너무 막대한 거 아니야?’

마음만 먹으면 신탁을 조작할 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

내가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체드만이 느리게 말을 이었다.

“신을 모시는 종이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겠지만, 확실히 위험한 일이긴 하지.”

제국이 신탁과 이를 해석할 수 있는 존재, 대신관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위험한데.’

신전의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하는데, 멀리서 대신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신전에서는 이 신탁이 황위 계승과 관련이 되어 있다 판단했습니다.”

대신관은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빛과 어둠이 같다는 것은 이 제국의 어두운 부분까지 굽어살피는 아르타나 여신의 비호임을 뜻하며 빛과 어둠이 각각 뜻하는 바는,”

‘뭐지?’

순간 대신관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착각인가.’

이렇게 먼 거리에서 대신관이 어떻게 나를 알아본단 말인가. 한 번 마주친 적도 없는데.

‘머리카락 때문인가.’

제국에서 흑발을 한 이는 탄제리크가 유일했다.

그러나 신탁을 해석하는 중에 대신관이 탄제리크를 쳐다봐야 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우연인가.’

그저 착각일지도 모른다. 대신관이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

‘내가 예민한 건지도 몰라.’

신성력을 숨기고 있는 상태이기에 혹여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평소보다 예민해진 건지도 모른다.

‘대신관에게는 절대 들켜선 안 되니까.’

신전이 내가 신성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이렇게 조용하다는 건 아직 신전에서도 모른다는 의미일 텐데.’

이 이유 모를 두려움은 대체 뭘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단상을 바라보고 있자, 대신관은 언제 나를 보았냐는 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채 말했다.

“빛은 제국의 태양, 즉 대 루엔트 제국의 필리티움 황가를 의미하며 어둠은 황가를 도와 제국을 지탱하는 봉신 가문으로 생각됩니다.”

‘제국의 봉신 가문……?’

물론 모든 제국민이 제국을 지탱하고 있으나, 대신관이 이리 공개적인 장소에서 언급할 정도라면 그저 그런 가문일 리가 없었다.

‘최소 고위 귀족이야. 어쩌면, 개국공신 가문일 지도…….’

다른 귀족들 역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아까부터 이쪽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는 걸 보니.

귀족들의 술렁거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신관은 하려던 말을 이어 갔다.

“따라서 빛과 어둠이 같다는 것은 황가와의 결탁이나,”

그간 차분하던 대신관은 말을 덧붙이기 전 숨을 크게 들이켠 후 말했다.

“황가의 권력에 닿으려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하.’

대신관은 애써 돌려 말하려 노력하는 듯했으나 그가 의미하는 바를 모를 리가 없었다.

‘반역을 한다는 거야.’

이중 누군가, 아니 어쩌면,

‘탄제리크가.’

황가를 제외한 누구든 반역자가 될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누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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