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장난치지 마세요.”
내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로이스터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장난 아닌데.”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하나 없었다.
“공녀는 장난으로 이런 말도 하나?”
“그건 아니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로이스터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연인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당황스러웠다. 농담이라기엔 로이스터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대체 왜…….”
혼란스러움 가득한 물음에 로이스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작이 곧 공식화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그때라면 왜 탄제리크가 나를 지지하는지 의문을 갖는 이들이 많아지겠지.”
“…….”
“공작이 전부터 나를 도왔다는 건 알리지 않으려 한다. 혹여 내가 마나를 발현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도 있으니.”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왜 로이스터를 지지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헤이녹스와 로이스터의 관계를 파다가 그가 발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일이 꽤나 복잡해진다.
‘황후의 견제가 더 심해질 테지.’
그것도 노골적으로.
“가장 민감한 소문이 연인 관계 아닌가. 그런데 나와 공녀가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면 어떻겠어.”
“아…….”
이제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가십은 누군가의 몰락이거나 스캔들이다.
가장 입에 담기 가볍고, 나르기 흥미로우니까. 탄제리크가 2황자를 지지한다는 거대한 사실 속 숨어 있는 의도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선 더 큰 소문으로 감추는 수밖에 없다.
‘나와 2황자의 스캔들은 꽤나 먹힐 테고.’
버림받은 2황자와 몇 년 만에 사교계에 얼굴을 비춘 공녀.
‘아버지가 딸의 사랑을 위해 2황자를 지지하기로 했다면 그 무게 자체가 달라지겠지.’
어떠한 심오한 뜻이 있는 선택이라기보단 철없는 딸을 위한 아버지의 선심 정도로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귀족도 아닌 탄제리크라면 의심을 완전히 지우기도 힘들 거야.’
그간 황위 승계에 목소리를 내지 않던 탄제리크의 첫 의견인 셈이니까.
나의 걱정을 아는지 로이스터는 재차 입을 열었다.
“물론 우리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큰 변화니까. 그러나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을 거다.”
로이스터와 탄제리크를 의심하는 사람이 생기겠지만, 둘의 만남을 저지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만남에 ‘사랑’이라는 흔한 이유를 붙이면 한층 단순해질 것이고.
‘그럼 둘이 약속을 잡는 것도 수월해지겠지.’
가주인 헤이녹스가 아닌 나와 만나야만 하는 이유가 충분하니까.
“어차피 밝혀야 하는 일이라면 화려하게 가지.”
로이스터는 이제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황후가 주도권을 쥐게 할 순 없으니.”
나는 베베라를 이용하여 다시금 사교계에서 주도권을 쥐려던 황후를 떠올렸다.
‘로이스터와 나는 귀족들과 거리감이 있어.’
황후와 황자는 오래전부터 이어 온 사교계 활동으로 타 귀족들과 가까웠지만 나와 로이스터는 아니었다.
그는 아펠라궁에서 거의 유폐되다시피 갇혀 자랐고, 나는 수도에서 오래 떨어져 있었으니까.
황후나 1황자에 비해 귀족들이 가지는 거리감이 더 클 터였다.
‘하지만 연인이라는 관계가 그 거리감을 줄어들게 하겠지.’
멀게만 느껴지던 이들이 사랑이라는 흔한 감정으로 연인 관계를 유지한다고 생각하면 왜인지 친숙하게 느껴질 테니까.
‘결국 저 둘도 같은 사람이구나, 하고 말이지.’
로이스터의 말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하고 방법 중 왜 연인이라는 형태를 선택했는지는 여전히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로이스터의 방법은 일리가 있었지만, 내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무려 탄제리크의 2황자 지지 의사를 밝히는 일이었으니 무엇보다 가주의 의견이 중요했다.
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답하자, 로이스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공녀는 참 신중하군. 원래부터 그랬나?”
‘무슨 질문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던 사람치곤 실없는 질문이었지만 어쩐지 진지한 듯한 그의 표정에 나는 입을 열었다.
“……원래도 즉흥적인 편은 아니에요.”
‘내 행동 하나하나가 미래를 바꿀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어.’
게다가 나를 믿어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괜한 일로 그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로이스터는 들릴락 말락 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나는 왜 구했지.”
“방금 뭐라고 했어요?”
제대로 듣지 못한 내가 재차 묻자, 그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렇게 신중한 사람이 왜 나를 구했는지 모르겠네.”
“…….”
“줄곧 궁금했어. 공녀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날 왜 구했던 걸까. 어차피 버림받은 황자 따위 모른 척하면 됐을 텐데 말이야.”
“그건…….”
나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입술을 꾹 눌렀다.
하지만 로이스터는 그런 내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내가 불쌍했나? 그래서 신성력을 썼어? 나를 구해 주는 게 폭주를 감당할 만큼의 가치가 있었나?”
“누구를 구하는데…….”
어쩐지 날이 선 듯한 그의 말에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가치를 저울질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로이스터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게 가능하다니. 공녀는 무척 다정한 사람이군.”
그러곤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곳에 있지 않았더라면 이리 마주 보고 있는 일도 없었겠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로이스터는 이내 후드를 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려고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지금의 그는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질문을 입안으로만 삼킨 채 바라보자, 문 앞에 선 로이스터가 멈춰선 채 말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그 골목에 있던 게 내가 아니었더라도 구했을 건가?”
“…….”
“공녀는 그곳에 있던 게 누구였더라도 기꺼이 나섰을 건가?”
‘로이스터가 아니었다면, 내가 과연 나섰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선뜻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자, 잠시 침묵하던 로이스터가 몸을 돌렸다.
“……이만 돌아가지.”
‘안 돼!’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그를 이대로 보내선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저는……!”
황급히 그를 멈춰 세운 나는 정리한 생각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게 누구든 나섰을 겁니다.”
“……역시.”
어쩐지 씁쓸한 목소리로 답한 로이스터가 다시 문을 열려고 하자, 나는 재빨리 하려던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리 무모하게 나서진 않았을 겁니다. 조금 더 이성적으로 행동했겠지요. 그곳에 있던 게 다른 이였다면 근처 치안대에게 먼저 도움을 요청했을 겁니다.”
그 골목에서 당하고 있던 사람이 누구였든 모른 척 지나가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직접 나서지도 않았겠지.’
신성력을 다루는 법조차 모르는 내가 나서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오히려 일만 더 크게 만들 게 뻔하고.
‘그럼에도 내가 직접 나섰던 건, 그곳에서 당하고 있던 게 로이스터여서.’
나도 왜 그를 구하겠답시고 나섰는지 모르겠다.
버림받은 황자라는 사실이 불쌍해서인지, 그가 할 줄 아는 게 없던 어린애여서였는지 몰라도 한 가지 확실한 건,
“황자님이라 나선 겁니다.”
내가 그리 비효율적인 행동을 한 것은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였기 때문에 나섰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의 대답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침묵하던 로이스터는 이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엔 신전에서 보지.”
그의 말은 아무런 감정이 묻어 있지 않은 듯 가라앉아 있었으나 표정을 볼 수 없으니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때 후드에 가려져 있던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 * *
“역시.”
신전에서 신탁을 공개하는 날이니 만큼 사람이 많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는데.”
나의 혼잣말에 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평민들도 와서 그래요. 그래도 기도실로 들어가면 붐비는 게 좀 덜 하겠죠.”
“어째서?”
앤은 의아하다는 듯한 내 질문에도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평민은 기도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니까요.”
“기도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그렇다면 저 많은 사람들은 대체 왜 이런 이른 아침부터 신전을 찾았단 말인가.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앤은 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
“이렇게 특별한 날에는 기도실은 아니더라도, 신전 앞까진 들어갈 수 있거든요.”
“신전을 구경할 수 있다는 말이야?”
“네. 기도실 같은 성스러운 공간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그 앞 복도까지는 갈 수 있어요.”
“오늘 말고 또 언제 들어갈 수 있는 거지?”
“음, 새해가 밝은 날 오전과 제국 건국 기념일 오후, 그리고 신탁이 내려온 날이요. 그날 외에 평민은 신전에 출입조차 할 수 없어요. 그러니 그들에게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인 거죠. 신전의 성스러운 기운을 받아 갈 수 있는 보기 드문 날이니까요.”
‘신전에 방문할 수 있는 때가 고작 저런 날 뿐이라니.’
그나마도 기도실에서 기도는 할 수 없고 그 근처 복도까지만 출입이 가능하다니,
‘이건 제국민을 위한 신전이 아니잖아.’
신도를 가려 받는 곳이 어찌 성스러운 신전이라 할 수 있을까.
답답한 속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데, 내 단장을 마친 앤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서 가요, 공녀님!”
“안에도 사람이 많네.”
기도실로 들어왔음에도 전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수의 귀족들이 모여있었다.
‘다름 아닌 신탁이 내려왔기 때문이겠지.’
제국에 신탁이 내려오지 않은 게 벌써 몇 년이었다.
‘앤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다행이야.’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앤이 움직이기 쉽지 않을 터였다.
아슬론 윈터쳇은 나오미 후궁의 장례 이후 알아볼 게 있다며 저택을 떠난 지 꽤 되었고, 헤이녹스는 오랜만에 귀환한 탓에 할 일이 많아 신전에 오지 못했다.
‘렌자드는 황성에서 근무 중일 테고.’
전부 할 일이 많아 바빴다.
내 옆에 있는 이 체드만을 제외하고는.
“오라버니는 할 일 없어?”
나는 옆에 서 싱긋 웃고 있는 체드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 전만 해도 일에 치여서 눈 밑이 어둡더니.”
지금 체드만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광이 났다.
나의 말에 체드만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아버지께서 돌아오셨잖아. 임시 가주직을 내려놓으니 여유가 생기더라고. 게다가,”
그는 어쩐지 장난기가 섞인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록시 네가 직접 나와 멀어지기 싫다고 말하기도 했으니까.”
그는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오늘만큼은 너랑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 거리는 물리적인 의미로 한 말이 아닌데.”
“응, 알아.”
체드만은 내 떨떠름한 반응에도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그치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짐짓 뻔뻔하기까지 한 그의 태도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 마음대로 해라.”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와 대신관님 드십니다!”
내가 고개를 내젓는 사이, 멀리서 황제와 대신관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체드만은 좀 전의 장난기를 지운 채 나를 바라보았다.
“우선은 저 일에 집중할까?”
과연 몇 년 만에 제국에 내려온 저 신탁이,
무엇을 가리킬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