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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96)화 (96/106)

<96화>

“브루안트는 후계자 문제로 머리가 복잡할 거예요. 1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래. 골머리 좀 앓을 거다.”

“그 문제를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헤이녹스는 눈썹 한쪽을 까딱거렸다.

“후작가의 후계 문제에 개입하겠다는 건가? 분명 반기지 않을 텐데.”

“그렇겠죠.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아버지의 도움만 있다면 가능해요.”

“탄제리크의 이름을 이용하겠다는 건가?”

헤이녹스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짧게 한숨을 쉬었다.

“록시, 그건 탄제리크의 힘으로 해결할 만한 일이 아니다. 브루안트의 지지를 위해선 그들의 명예를 건드려선 안 돼.”

“아버지. 브루안트 후작이 왜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내정하지 않았는지 알고 계시죠?”

나의 물음에 헤이녹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인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이다.”

“후작께선 소후작이 권세 있는 가문의 영애와 혼인하길 원하시지만 소후작께선 따로 사랑하는 연인이 있으니까요.”

소후작은 연인을 배신하고 가문만을 보고 만난 사람과 정략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소후작님의 연인이 누군지 알고 계시나요?”

“관심을 둔 적이 없어 모르겠군.”

언제나처럼 냉담한 헤이녹스의 말에 나는 천천히 말했다.

“헤델 판. 현재 아카린즈 백작가에서 시녀로 일하고 있고, 동시에 앤의 언니이기도 해요.”

“……네 시녀의 혈육이라고.”

잠시 고민하듯 침묵하던 헤이녹스는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 바라는 게 뭐냐.”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예상한 듯한 말에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소후작은 연인을 놓을 생각이 없죠. 그렇다면 답은 간단해요. 헤델이라는 시녀와 소후작을 혼인시키면 됩니다. 브루안트 후작이 이를 반대할 테니 그때 탄제리크에서 소후작에게 힘을 실어 주면 돼요. 마침 앤이 제 시녀이기도 하니까요.”

브루안트 후작에게 자식은 케드릭 브루안트 하나뿐이다.

하나뿐인 자식이기에 더욱 정략혼을 밀어붙였던 후작은 이 일로 아들이 10년 동안 고집을 부릴 줄은 몰랐겠지.

“무려 10년이에요.”

후작뿐만 아니라 소후작 또한 마찬가지로 지쳤을 거다. 그러니 그들의 갈등을 대외적으로 종결지을 명분을 제시해 주는 것.

“10년 동안이나 다투던 문제에 쉽게 물러서면 우스워 보일 테지만, 적당한 명분이 있다면 수월히 갈등을 끝낼 수 있겠죠.”

그리고 그 명분을 탄제리크가 주겠다는 것이다.

제국의 권력자인 탄제리크와 가까운 소후작이라면 브루안트 후작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발 물러설 수 있다.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소후작을 인정하기로 했다고 말하면 그만이니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헤이녹스는 이내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네가 앤이라는 시녀를 잘 따르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시녀의 언니를 위해 가문이 나설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가?”

“아뇨.”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후 차분히 말을 이었다.

“물론 제가 앤에게 의지하는 건 맞지만, 앤의 언니를 돕자는 건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에요.”

앤은 공작가에서 외롭던 나를 살뜰히 챙겨 주었다. 한번 괴롭힌 적도, 무시한 적도 없이 나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매개를 찾기 위해 떠도는 동안에도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라 응원해 주었다.

하지만 그게 내가 아닌 가문이 나서 도와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아버지. 2황자는 황좌에 올라야 해요.”

1황자가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2황자가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탄제리크가 선택했으니까. 그저 그 이유만으로도 로이스터는 황좌에 올라야만 했다.

‘로이스터가 황제가 되지 못하면 끝은 파멸뿐이야.’

1황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탄제리크는 원작대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는 결코 탄제리크의 흥을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탄제리크를 위해서라도 다음 황제는 2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서는 탄제리크와 뜻을 모을 가문이 필요했다.

“브루안트는 분명 큰 힘이 될 거예요.”

“소후작이 헤델 판과 혼인하고 탄제리크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증거는? 만약 그가 우리의 호의를 잊은 채 중립을 유지하면 어떻게 할 건가.”

헤이녹스의 날카로운 질문에 나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소후작은 그의 연인을 위해 10년 동안이나 가주와 대립해 왔습니다. 연인에 대한 그의 의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가주의 눈 밖에 나려는 자식은 없다.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가주에게는 잘 보여야만 했으니까.

그럼에도 소후작이 브루안트 후작과 이토록 긴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다는 것은 그의 의지가 쉽게 꺾일 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헤델 판의 친동생이 탄제리크에서 일하고 있죠. 그것도 바로 제 측근에서요.”

“……앤이라는 시녀를 위해서라도 모른 체하지 못할 거라는 말이군.”

“맞아요.”

‘앤을 인질로 잡은 것 같아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헤델과 소후작이 혼인한 후 탄제리크의 도움을 잊지 않는다면 앤이 위험해질 일도 없을 것이다.

‘헤델은 앤을 많이 아끼는 것 같았으니까.’

앤이 평소에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녀와 헤델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지 알 수 있었다.

“브루안트 후작은 헤델 판이 공작가의 지지를 받는다면 반드시 그녀를 받아 줄 거예요.”

애초에 정략결혼을 시키려던 목적도 다른 가문과의 결합으로 더 견고해지기 위해서였으니까.

“혼인을 하게 되면 소후작은 브루안트 후작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그때 분명 탄제리크와 뜻을 함께할 겁니다.”

황좌의 주인을 저울질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지금 브루안트 후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먼 미래가 아니다.

“때론 당장을 위해 과감해져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나는 알 수 없는 표정의 헤이녹스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 * *

“용사님.”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황자님.”

후드를 쓰고 있었지만 그가 로이스터라는 걸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나는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가라앉은 신성력에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 황궁을 나오시면 의심을 사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오늘은 약속을 잡은 날도 아니고요.”

나의 질문에도 로이스터는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었다.

“곧 신전에 가지 않나. 그곳엔 대신관을 비롯한 고위 신관들이 있으니 그 전에 공녀를 만나야겠다 판단한 것뿐이야.”

그의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내일이면 신탁을 듣기 위해 신전을 방문하는 날이었으니까. 조금이라도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신성력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결국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제가 마리웨셀에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요.”

오늘 마리웨셀에 있는 가게에 방문한 것은 체드만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번 내가 멀어지기 싫다고 말한 이후 서로 비밀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 중 하나가 정보상 이용이고.’

체드만은 내게 이 정보상을 자유롭게 사용해도 된다고 말했다. 나 역시 사교계에 본격적으로 나서야 할 때이니 정보가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게 이유였다.

‘베베라에 대해 알아보려고 방문했건만,’

앞에서 로이스터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키가 큰 로이스터는 후드를 쓰고 있어도 꽤나 눈에 띄었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가게로 들여야만 했다.

“황후의 눈을 피해 온 것이니 오래 있지는 못해.”

로이스터는 후드를 벗곤 자리에 앉았다.

“공작이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의 태도에 난 결국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네. 얼마 전 귀환하셨습니다.”

“연회에서 아카린즈 영애와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어.”

“……사정이 있었습니다.”

선을 긋는 듯한 내 대답에도 로이스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플레리 아카린즈는 한동안 제국을 떠나 있을 거야.”

“제국을…… 떠난다고요?”

“이번 일을 황제 폐하께서 그냥 넘어가지 않기로 결정한 것 같더군. 아마 한동안은 그 영애를 볼 일 없겠지.”

‘제국을 떠나 있는 거라면, 사용인들까지 데려갈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다면 아카린즈의 시녀인 헤델 판 역시 제국을 떠날 확률이 높아진다.

‘브루안트 소후작에게 소식을 빨리 전달해야겠어.’

신전에서 신탁을 공개하기 전에 브루안트 소후작을 찾아가야만 했다.

‘신탁이 차기 황제에 대해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까.’

모든 걸 확신할 수 없을 때 확실히 소후작을 잡아놔야만 했다.

내가 골똘히 고민하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던 로이스터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 연회에서는 대화조차 나누지 못해 아쉬웠는데.”

그는 무언가 감추고 있는 사람처럼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라도 만나 다행이군.”

“……그건 전하가 제 매개이기 때문인가요.”

날이 선 질문에도 로이스터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글쎄.”

로이스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한 날, 공작이 내게 찾아왔었어.”

‘만날 사람이 있다더니.’

황궁에 다녀온 날, 헤이녹스는 만날 사람이 있다며 예정보다 늦게 귀가했다.

‘그게 2황자였던 모양이네.’

내게도 돌아오는 답이 없자 로이스터는 말을 이어갔다.

“마나 수련은 잘 되고 있는지 물었고, 곧 황좌를 위한 파벌을 공식화할 거라고 말했지.”

‘진짜 시작이구나.’

헤이녹스가 전장에서 돌아와 위세가 한층 더 높아진 이 시점이 로이스터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리고 내게 경고했다.”

‘경고라니.’

본격적인 황좌 싸움이 시작될 테니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의미의 경고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로이스터의 말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착각하지 말라더군. 나는 공녀의 매개일 뿐이라고 말이야.”

‘아버지…….’

지지할 2황자 앞에서도 차가운 헤이녹스의 모습을 떠올리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 괜한 오기가 생기지 않겠어?”

“대체 무슨,”

로이스터는 미간을 찌푸린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공녀와 매개 이상의 관계가 되고 싶은 욕심 말이야. 이를테면,”

그는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연인 같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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