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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95)화 (95/106)

<95화>

* * *

“후…….”

아무리 좋은 마차라 한들 오랫동안 타는 건 지치는 일이었다.

‘게다가 티파티도 두 군데나 갔으니까.’

하르펠 후작 영애의 초대에 참석한 이후 그녀가 친한 귀족 중 한 명의 애프터 파티에도 다녀오자 온몸이 축 늘어졌다.

“……피곤해.”

“바로 씻으실 거죠?”

앤의 물음에 나는 고개만을 겨우 끄덕였다.

“고마워, 앤.”

“뭘요.”

목욕이 준비되는 동안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나는 앤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황궁에서 돌아오셨어?”

“공작님께선 곧 오실 거예요. 황궁에 갔다가 잠시 들를 곳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

문득 헤이녹스의 발길이 향한 곳이 궁금했다.

‘전장에서 돌아오고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일까.’

헤이녹스가 황실의 후계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예상을 할 수가 없었다.

“식사는 아버지랑 해야겠네.”

“주방장님께 말씀드릴게요.”

나는 앤이 따뜻하게 데운 목욕탕에 몸을 담갔다.

“영애분들과 보낸 시간은 괜찮으셨어요?”

앤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는 편안했던 분위기의 티파티를 떠올렸다.

“응. 다들 정말 친한 사이인지 가끔 장난도 치더라.”

황후파가 모인 티파티에선 보지 못한 따뜻함이나 흘러가는 농담 같은 것이 하르펠 후작 영애와 그 지인들에게서 느껴졌다.

“다행이에요. 하르펠 영애께서 좋은 분이니 그런 거겠지만요.”

“앤이 나디아를 알아?”

“하르펠은 마님께서 살아계실 때도 자주 왕래하던 사이였으니까요.”

“아.”

“제 친구가 하르펠 후작가에서 일하고 있는데, 후작 영애께서 실수에도 너그럽고 배려심 있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그렇구나.”

앤의 말에 나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디아 하르펠은 좋은 사람이었다. 이해관계가 곧 권력이 되는 귀족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유형의 사람이기도 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득이 되는가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힘이 되어 줄 수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했으니까.

“그런데 아가씨, 그 소문 들으셨어요?”

앤은 주변에 둘밖에 없었음에도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1황자 전하께서 데리고 온 그 영애 말이에요,”

“베베라 영애?”

“네. 지금 황후 폐하의 배려로 황궁에서 지내다 보니 별 소문이 다 돌더라고요.”

“소문이라면…….”

“그 영애가 황자 전하의 연인이라는 소문 말이에요.”

그 이야기라면 나 역시도 들어 본 적 있다. 오늘 나디아의 티파티에서도 언급된 주제였으니까.

비록 나와 플레리의 소란으로 황궁 연회에서의 주목은 덜했지만, 베베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했다.

황후가 직접 데려온 1황자의 은인인 데다가 황실의 일원도 아닌 상황에서 황궁에서 머물고 있고, 또한 아름다웠으니까.

‘화려하진 않지만 확실히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지.’

베베라는 비밀스러운 듯한 분위기를 가진 묘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귀족 사회에서 그런 분위기를 가진 이가 드물다 보니 더 시선이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영애에 대한 소문이 벌써 그렇게 퍼졌어?”

사람들이 난데없이 등장한 한 평민 소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귀족가의 사용인조차 알 정도로 소문이 퍼진 줄은 몰랐다.

내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앤이 물의 온도를 조절하며 말했다.

“그 영애의 신분이 평민이잖아요. 게다가 여자인데 황자 전하를 구했다니까요. 제 친구들도 이미 다 알고 있던걸요. 주인님께서 전부 그 영애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고요.”

‘확실히 존재감이 엄청났던 모양이네.’

어디서 왔는지 모를 평민 소녀. 그리고 황자와 황후의 지지.

황궁에서 머물고 있다는 사실까지.

“행간에는 그 영애가 황자비가 될 거란 얘기도 있던데요.”

“그건 아닐 거야.”

물론 베베라의 등장은 귀족들에게 긴장감을 안겨 주었지만, 그녀가 결코 황자비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말이다.

“후궁이라면 또 모를까.”

황후가 아무런 지지기반도 없는 평민에게 황자비 자리를 넘길 리 없다. 지금 1황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황태자가 되도록 밀어 줄 세력이니까.

나의 말에 앤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무래도 그 영애가 황실의 일원이 되기는 어렵겠죠. 신분의 차이란 그런 법이니까요.”

왜인지 씁쓸한 것 같은 앤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앤의 언니도 연인과 갈등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꽤 오래전 일이지만.”

“아, 맞아요. 정확히는 언니의 연인과 그 가문의 갈등이지만요.”

앤은 걱정스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즘 언니는 자주 만나 볼 수도 없어요. 일하고 있는 곳이 함부로 휴가를 낼 수도 없는 것 같더라고요.”

“일하고 있는 곳이 백작가라고 했지?”

“네. 언니가 모시는 아가씨가 조금…… 화가 많아서 심기가 뒤틀리면 언니한테 곧잘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어요.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언니 팔에 멍이…….”

억울한 듯 말을 쏟아 내던 앤은 문득 정신이 들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일러바치는 것 같았죠. 언니가 볼 때마다 얼굴이 상하는 게 속상한 마음에…….”

“아니야, 괜찮아. 그보다 앤 언니가 일하는 저택이 어디라고?”

나의 물음에 앤은 망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카린즈 백작가요.”

‘아카린즈……? 나와 얼마 전에도 싸웠던 플레리 아카린즈의 가문이란 말이야? 앤의 언니의 직장이?’

“아카린즈라니…….”

내 허탈하면서도 어이없다는 듯한 중얼거림에 앤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저 공녀님께서 아카린즈 이야기는 별로 달갑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앤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해가 갔다. 나와는 최근에도 마찰을 빚었던 가문이고,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감정을 괜히 더 자극시킬지도 모른다 생각했겠지.

“그렇게 생각 안 해. 다만 앤의 언니 이야기를 더 들려줄 수 있어?”

아카린즈 가문이 황후와 가까운 만큼 아주 사소한 일이더라도 알고 있는 게 있을수록 내겐 이득이었다.

나의 진지한 물음에 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니는…… 혼자 해결하기를 원해요. 백작가에서 일하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지만 그것 역시 본인이 겪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고요. 저는 그게 너무 답답했어요.”

앤의 걱정도 이해가 되었다. 볼 때마다 낯빛이 흐려지는 언니를 누가 가만 놔두고 싶을까.

“너무 답답한 마음에 차라리 언니 연인에게라도 부탁해 보면 어떠냐고 했어요. 최소한 언니가 다른 가문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카린즈 가문의 고용인을 도울 수 있다면, 그 연인의 가문이 최소 백작 이상은 된다는 걸 텐데.’

게다가 아카린즈 가문은 그냥 백작가가 아니었다. 무려 황후를 배출한 가문. 어지간한 가문이 아니고서야 백작가 내부의 일에 간섭할 수 없을 터였다.

“연인의 가문이 어디길래.”

혼잣말 같은 내 물음에 앤이 대답했다.

“브루안트가요. 수도 후작 가문 중 하나예요. 그곳의 소가주께서 언니의 연인이고요.”

‘브루안트라면 분명 들어본 적이 있을 텐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그 가문의 이름에 나는 대체 어디서 언급되었던 것인지 골똘히 생각했다.

‘황실 연회에서 본 건 아니야. 체드만이나 렌자드와 친한 곳도 아니고, 그렇다면…….’

헤이녹스와 연관이 있나 싶어 되짚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 하나에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플레리와 처음 마찰이 있었던 10여 년 전 그날, 황궁 앞에서.

브루안트 가문의 차기 후계자는 분명 황궁 앞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헤이녹스와 함께.

“케드릭 브루안트.”

짧게 뱉은 말에도 앤은 크게 놀란 듯 눈을 키운 채 물었다.

“그걸 어떻게…….”

‘역시 케드릭 브루안트였어.’

갈색 머리에 초록 눈을 하고 있던 선한 인상의 남자.

오랜만에 수도로 올라왔던 헤이녹스에게 반갑게 말을 걸었던 그 남자였다.

‘그때 후계자 문제로 후작과 다투고 있다고 들었는데.’

10년이 더 흐른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놀라 있던 앤은, 이내 포기하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제는 저도 마음을 놓았어요. 언니와 소후작님의 만남은 아직도 인정받지 못했으니까요. 언니도 이젠 포기한 것 같았고요.”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나의 물음에 앤은 고개를 내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요. 언니는 누구보다 그분을 사랑하고 있어요. 다만, 영원하지 않을 거란 걸 깨달았을 뿐이죠.”

‘영원하지 않다라…….’

“글쎄.”

나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하나를 정리하며 웃었다.

“과연 그럴까?”

* * *

목욕을 마친 나는 서둘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헤이녹스가 저택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헤이녹스와 식지 않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아버지.”

적당히 배를 채우고 나서 고개를 들어 헤이녹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2황자를 지지할 생각이세요?”

나의 생각을 말하기 전에 헤이녹스의 의견을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이 일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란 건지, 잠시 멈칫한 헤이녹스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식사를 이어 가며 말했다.

“그래. 탄제리크는 2황자의 지지 기반이 될 거다.”

“굳이 이렇게까지 위험한 일을 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계승이란 늘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지금이 그 최적기이고.”

“그럼, 탄제리크 외에 2황자를 지지하는 가문은 있나요?”

그 말에 헤이녹스는 나와 눈을 마주 보았다.

“……있다. 하지만 아직은 황후파와 중립이 더 많은 게 사실이야. 그간 전장에만 있었으니 뜻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브루안트 가문은요?”

원작에서 브루안트 가문은 끝까지 중립을 유지했다. 탄제리크가 파멸을 향해 달려갈 때도, 황후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 되었을 때도.

그러나 이미 원작과 많은 것이 달라진 이 시점에, 현재의 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던 헤이녹스는 내가 괜히 묻는 게 아님을 알았는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브루안트가는 중립이다. 아직 이렇다 할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어.”

“브루안트가 탄제리크의 편에 선다면, 큰 도움이 되겠죠?”

“물론이다. 하지만 브루안트 후작은 그리 쉬이 움직일 인물이 아니야.”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한번 들어 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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