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잘 지냈느냐.”
무심하면서도 다정한 그 한 마디에 나는 문득 올라오는 울컥함을 삼켰다.
“……오셨어요.”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체드만은 피곤함이 역력하지만 묘하게 들뜬 듯한 모습이었다.
“편지라도 하셨으면 식사를 준비해두었을 텐데요.”
“됐다. 우선은 좀 씻고 싶구나.”
헤이녹스는 거추장스럽다는 듯 기다란 망토를 벗어 시종장에게 건넸다.
“기사들에게는 내일까지 훈련을 쉬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체드만이 그의 말을 전하기 위해 뒤에 대기해 있던 기사단에게로 향했다.
나는 체드만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아무런 말 없이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헤이녹스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기며 내게 다가왔다.
“갑자기 와 놀랐느냐.”
“조금요.”
“미리 연락하지 못한 건 미안하다. 상황이 여의치가 않아서.”
그는 전투를 마무리 지을 무렵에 꽤나 고생했는지 피부가 전보다 거칠어져 있었다.
“매개를 찾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너와 잘 맞는 것 같던가?”
“그런 것 같아요.”
“더 이상 번거롭게 떠돌지 않아도 돼 좋겠구나.”
“그러게요.”
고개를 숙인 채 짧은 대답만을 하는 나의 모습에 헤이녹스는 잠시 침묵했다.
“……혹시 화가 난 거냐?”
“아니요.”
무사 귀환한 그를 앞에 두고 화가 날 만한 일은 맹세코 없었다.
‘그런데도 왜,’
쳐다보지를 못하겠지.
어째선지 헤이녹스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달라진 모습이 어색하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비록 헤이녹스가 전장으로 가고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지만 그의 외모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달라진 거라면, 그건 오히려 나겠지.’
헤이녹스라면 모를까. 내가 그에게 낯을 가릴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고개를 들고 싶어도 들 수가 없었다. 들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혹시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거냐.”
전보다 가라앉은 듯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럼 고개 좀 들어보거라. 오랜만인데 섭섭하구나.”
“그게…….”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가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건, 그의 갑작스러운 귀환이 얼떨떨해서가 아니었단 걸.
그런 단순한 낯가림이 아니라, 내가 정말 감추고 싶은 사실이 있었다는 걸.
“……지금 고개 들면,”
눈물을 못 참을 거 같아서요.
아버지가 몇 년 만에 돌아온, 무척이나 소중한 날인데.
“이런 날에 울기 싫어요.”
그런데도 계속 눈물이 고였다. 무사히 돌아왔고, 부상 없이 왔으니 된 거였다. 그럼에도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내 모습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록시나.”
숙인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헤이녹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록시, 고개를 들어보거라.”
헤이녹스가 부르는 애칭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여전히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물에 고개를 들지 않으려 했으나, 반가운 목소리에 결국 그를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헤이녹스는 울음을 참느라 부은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런.”
그리곤 나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다시 널 외롭게 않겠다 다짐했건만.”
헤이녹스는 눈을 깜박일 때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불평도 없이 닦아냈다.
“그걸 이렇게 어기는구나.”
나는 너를 지키겠다고 다짐하곤 또다시 너를 외롭게 하였어.
나의 실낱같은 다짐이 우스워지는구나.
“미안하다. 너에게 편지라도 보내는 거였는데.”
하다못해 전서구라도.
나는 헤이녹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았다. 그는 얼마 전까지도 적진에 있었고, 제국군의 수장이었다. 지휘관으로서 그는 사소한 행동조차도 섣불리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혹여 전서구나 편지가 적에게 잘못 유출되면 제국군이 몸을 숨기고 있던 장소까지 들킬 위험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가 미리 연락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헤이녹스는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다. 이 검을 걸고 맹세하지.”
헤이녹스는 전장에 갈 때면 단 한 번도 몸에서 떼놓은 적 없던 그의 애검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 번만 용서해다오.”
곧 맹세라도 할 기세에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사과하실 것 없어요. 원망도 한 적 없으니까요.”
내가 이리 우는 것은 미리 소식을 알리지 않은 헤이녹스가 원망되어서가 아니라,
‘그저 반가워서일 뿐이니까.’
단순한 이유였다. 오랜만에 본 아버지가 너무 반가워서, 제국군을 승으로 이끈 그가 너무 대단해서, 자랑스러워서, 나의 아버지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때론 그런 단순한 이유로도 눈물이 났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쁘면, 안심이 되면 눈물이 나기도 한다는 걸, 나는 이제 알았다.
나의 말에 한동안 입을 다물던 헤이녹스는 살짝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많이 자랐구나.”
잠시의 대화 이후 헤이녹스는 제대로 씻기도 전에 황궁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플레리 아카린즈와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 탓인 듯했다. 조금은 지친 듯한 그의 모습에 나는 미안했지만, 헤이녹스는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차피 가야 할 곳이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네.”
“오후에 하르펠 후작가에 간다고 했던가?”
“네, 잠깐 티타임을 가지고 오려구요.”
“그래.”
“……이따 뵈어요.”
그는 담백하다면 담백한 인사를 마치곤 말을 타고 떠났다.
“그럼 나도 이만 가 볼까.”
* * *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헤이녹스의 절도 있는 움직임에 황제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공작, 이 얼마 만이요!”
황제는 자리에서까지 일어나 헤이녹스를 크게 반겼다.
“또 한 번 제국을 승전으로 이끌다니, 정말 공작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소.”
황제는 아카린즈 가문과 있었던 일은 아예 기억나지도 않는 듯 껄껄 웃었다.
“그래, 공작이 원하는 것을 말해 보시오. 내 무엇이든 들어 줄 테니.”
그 말에 헤이녹스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아카린즈 가문에 대한 보호를 멈춰 주십시오.”
그러자 황제는 크게 껄껄대던 웃음을 멈추곤 헤이녹스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의 아카린즈는 너무 많은 혜택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저 황후의 가문이라는 이유만으로.”
교역, 수집, 공연 모든 면에서 아카린즈 가문은 제재를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헤이녹스에게 그런 건 큰 상관이 없었다. 그런 사소한 혜택 따위 탄제리크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진짜 신경에 거슬리는 건,
‘황제가 방관하는 것.’
12년 전 파티에서 플레리 아카린즈와 록시나와 소란이 있었을 때는 황제의 개입 따위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탄제리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만큼 연약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에게는 황실의 채찍이 효과적일 테니.’
아카린즈는 황실을 두려워한다. 정확히는 황실의 눈 밖에 나는 것을.
그것은 형세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부정하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공포에 가장 효과적인 것을 이용해야지.’
아카린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황실과 척을 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황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폐하께서도 아시잖습니까. 더는 이대로 두고 볼 일이 아니란 걸. 계속 모른 척하신다면 상황은 더 악화될 뿐입니다.”
“허……. 이것 참.”
황제는 곤란한 듯 이마를 짚었다.
“……짐도 알고 있네. 황후가 미흡한 나의 대처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말끝을 흐리며 중얼거렸다.
“그녀에 대한 배려를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야.”
황제는 그간 황후의 많은 부정을 눈감아 왔다. 그녀는 비밀스레 행했으리라 생각했겠지만 황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황제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모른 척했다. 잘못은 황후만이 저지른 것이 아니었으니까. 황제는 한때 집시를 사랑했고, 그 사이에서 아들까지 얻었다.
애정 없는 관계였다 해도 황후에 대한 배신이라는 건 변함없었다.
그렇기에 애써 외면해 오던 일이었다. 황후와의 관계에 금이 가는 일은 전부. 그런데,
“……공작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가만히 있는 것도 우스운 꼴이군.”
더 침묵해서는 황제의 권한이 떨어질 참이었다. 황후에 대한 존중으로 더 입을 다물어 봐야 황제만 우스운 꼴이 될 지경이었다.
“이따 아카린즈 백작이 올 예정이니 그때 이야기해 두지. 그리고 황후에게도, 경고하겠다.”
작지만 전과 다른 황제의 태도에 헤이녹스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되었네. 오늘은 공작의 업적이나 치하하려 했건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군.”
황제는 앞으로 있을 일에 머리가 복잡한 듯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만 가 보게. 공작도 많이 피곤하지 않겠나.”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헤이녹스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모습으로 알현실을 나섰다.
그가 복도를 지나 마차에 가까워지는 사이, 누군가 헤이녹스 앞에 등장했다.
“아카린즈 백작.”
그는 플레리의 아버지이자 황후의 오라버니인 메르톨스 아카린즈 백작이었다.
“공작님, 전장에서의 활약은 익히 들었습니다.”
아카린즈 백작은 공작을 칭찬하는 척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제 폐하를 뵙고 오는 길입니까?”
“그래. 백작도 알만한 이유로.”
헤이녹스의 직접적이면서도 냉담한 반응에 아카린즈 백작의 미소에는 금이 갔다.
그 모습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헤이녹스는 더 있을 가치도 없다는 듯 자리를 나섰다.
“폐하께서 무슨 조치를 취하실지 기대되는군.”
아카린즈 백작의 얼굴에는 더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금이 생기고 있었다.
* * *
“아아악!!”
플레리는 방에 있던 보석과 온갖 장식품들을 집어 던졌다.
“어떻게 나를, 나를!!!”
방금 전 아카린즈 백작에게 연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황제의 반응을 들은 참이었다.
“제국을 떠나 있으라니! 어떻게 내게 그런 명령을 내릴 수가 있어, 이 플레리 아카린즈에게, 대체 어떻게!!”
무엇보다 그녀를 더 화나게 하는 것은, 조금 전 플레리를 골칫덩이 취급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아카린즈 백작의 태도였다.
“차기 탄제리크 부인이 될 나를 그딴 식으로 봐? 감히?”
백작이 아버지라는 것도 잊은 건지, 플레리는 반쯤 돌아 버린 듯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편지지 가지고 와!”
“아가씨, 지금은 좀 진정하시는 게…….”
“너 따위도 날 우습게 보는 거야?!”
날 선 플레리의 소리침에 시녀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지만 플레리는 이미 짜증이 날 만큼 나버린 뒤였다.
짝! 짜악-!
플레리는 시녀의 뺨을 두 번 연속으로 때리곤 소리 질렀다.
“편지지를 가져와! 지금 당장!”
“……예, 아가씨.”
시녀는 부어오른 뺨을 부여잡은 채 서둘러 플레리의 방을 나섰다.
“어머나!”
시녀가 편지지를 찾기 위해 1층으로 내려오자, 그녀를 본 동료들이 깜짝 놀라 다가왔다.
“헤델, 얼굴 꼴이 이게 뭐야!”
“그보다 편지지는 어디 있어?”
“또 아가씨가 그러신 거야?”
“……걱정은 이따가. 지금은 편지지가 우선이야.”
그녀의 미련하리만치 충성스러운 태도에 동료 시녀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냥 네 애인에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이렇게 맞고 다닌다는 걸 알면 분명 가만히 계시지 않을 거야.”
“아니.”
헤델은 어느 때보다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의 동료에게 말했다.
“절대 그분의 도움을 받는 일은 없어. 이건 내 일이잖아.”
“……그래.”
헤델의 완강한 태도에 결국 동료 시녀도 두 손을 들었다.
“편지지는 저기 서랍에 있어. 혹시 모르니 잉크도 같이 가져가.”
“응, 고마워.”
편지지와 잉크를 가지고 헤델의 발걸음이 유독 무거웠다.
그녀의 작아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동료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달라는 한 마디면 될 텐데.”
헤델이 그은 선이 가져올 괴로움이 동료는 못내 걱정되었다.
“대체 어쩌려고 그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