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93)화 (93/106)

<93화>

* * *

“아아악!!”

황후는 연회에서의 기품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모습으로 소리 질렀다.

“이런 멍청한 게 감히 내 일을 그르쳐?!”

미친 듯이 소리치는 황후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선 베베라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혈육이랍시고 사고 치는 것도 전부 눈감아 줬건만,”

황후는 아까 전 보았던 황제의 단호한 태도에 더욱 열이 뻗쳤다.

“오늘이 기회였단 말이다. 오늘이 너를 알릴 수 있는…….”

황후는 오늘 연회에서 확실히 베베라의 존재를 각인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포드 남작 부인과 메이룬 백작 부인까지 불러 언질했건만.

‘감히 네가 일을 그르치다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앉아 있던 플레리의 멍청한 모습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화가 나 버틸 수가 없었다.

‘이제 그 애도 버릴 때가 됐나.’

그러곤 이내 고개를 돌려 베베라를 바라보았다.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카린즈 영애와 탄제리크 공녀의 마찰이 있었습니다.”

“시작은?”

“아카린즈 영애가…….”

“이럴 줄 알았어.”

잘 나서지 않는 공녀와 마찰이라면 이유가 하나밖에 없었다.

“또 탄제리크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네. 이번에도 전 공작 부인? 아니면 탄제리크 공작?”

“……차기 공작 부인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하!”

황후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플레리가 탄제리크 안주인 자리에 관심이 있다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을 하는 것과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 얘기를 탄제리크 앞에서 꺼내다니.”

일만 잘 해결되면 분명 그보다 더 좋은 자리를 주겠다고 했건만.

애초에 황후는 헤이녹스의 귀환 소식을 듣고 자객을 보낼 생각이었다.

이번 귀환은 조용히 하고 싶다고 말했으니 수도로 돌아오기 전에 아무도 모르도록 미리 처리해 버릴 생각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귀환할 거라는 걸 이미 다 말해 버렸으니.”

이렇게 되어서야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될 테니 섣불리 공격할 수도 없었다.

“……조금 더 천천히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후의 화가 좀 누그러진 듯하자, 베베라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어차피 약은 이미 완성되었으니 때만 잘 잡으면 됩니다. 서둘러서는 되려던 일도 그르칠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합니다.”

황후는 베베라의 말에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약은 어느 정도 만들었지?”

“세 번 사용할 분량입니다.”

“그럼 기회도 세 번뿐이겠군.”

황후는 크게 숨을 들이켠 후 이내 한숨을 쉬듯 내뱉었다.

“그래. 기회는 또 올 테니 이리 조급해할 필요 없겠지.”

다시 본래의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온 황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베베라를 바라보았다.

“흔적을 남기진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확신하는 베베라의 말에 황후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피곤하니 쉬고 싶구나.”

“예.”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앉은 황후의 모습을 바라본 베베라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 * *

“아, 베베라.”

황후궁에서 나와 자신의 연구실로 향하던 베베라는 멀지 않은 곳에서 웃으며 인사하는 1황자, 제아트릭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1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렇게까지 격식 갖출 필요 없어. 우리 사이에.”

“……송구합니다.”

“사과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고.”

제아트릭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베베라를 훑어보았다.

“연구실로 돌아가는 거야?”

“예.”

“거기 틀어박혀서 이번엔 며칠 동안 안 나오려고?”

“…….”

딱히 시간을 재어 본 적 없기 때문에 확실히 대답할 수도 없었다.

베베라의 침묵이 길어지자, 제아트릭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그건 됐고.”

그는 재미있는 일을 발견한 사람처럼 번들거리는 눈으로 베베라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버지 호출로 잠깐 궁에 갔다 오는 사이 재밌는 일이 있었던 것 같던데.”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 설마 누가 너 건드렸어?”

좀 전의 장난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제법 날카로운 기세로 물어오는 제아트릭의 모습에 베베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저 다른 분들끼리 마찰이 있었을 뿐이에요.”

“다른 분들이라면, 플레리 말이야?”

“…….”

베베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확신한 제아트릭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하여간 그 녀석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어. 능력도 없는 게 욕심만 많아서는 백작이랑 똑닮았지. 아, 상대는 누구였어? 어머니께서 저렇게 화가 나신 걸 보면 그 상대가 플레리를 제대로 건드린 거 같던데.”

“……탄제리크가의 영애였습니다.”

“뭐? 탄제리크?”

그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무척이나 재밌는 걸 본 사람처럼 크게 웃었다.

“그럼 플레리가 탄제리크를 건드린 모양이구나! 감히 제 주제도 모르고.”

제아트릭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눈물까지 찔끔 흘려 가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좀 예뻐해 주니까 지가 황실 일원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

한참을 웃던 그는, 베베라의 경직된 표정에 금세 웃음기를 지웠다.

“베베라한테 하는 말 아닌 거 알지?”

“물론입니다.”

그녀의 대답에도 제아트릭은 베베라의 어깨를 꽉 붙잡은 채 말했다.

“정말이야. 넌 내 은인이니까 특별한 사람 맞아.”

“…….”

그러나 여전히 베베라에게서 돌아오는 답이 없자, 잠시 침묵하던 제아트릭이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말했다.

“나 심심한데.”

“……공연이 보고 싶으시다면 황후 폐하께 말씀드려서…….”

“그런 뜻이 아니란 거 알잖아?”

“전하.”

단호한 그녀의 모습에 제아트릭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그만하면 되잖아. 하여간 베베라는 너무 융통성이 없어서 탈이라니까.”

제아트릭은 이내 두 손을 털며 자리를 떠났다.

홀로 복도에 남겨진 베베라는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꽉 쥐었다.

* * *

“음…….”

나는 앤이 가져온 산더미 같은 초대장을 보며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이거 정말 뜻밖인데.”

연회장에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던 터라 자신에게 더 초대장이 올 리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뻐하셔야지요! 다들 공녀님의 단호한 아름다움에 반한 게 틀림없어요.”

“단호한 아름다움……?”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건 말건 앤은 상기된 표정으로 초대장 정리를 이어 갔다.

“그 아카린즈 영애께서 공녀님께 함부로 굴다가 당한 거잖아요. 사실 속으로는 잘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던 거죠.”

“잘 됐다고?”

“네. 원래 아카린즈 영애는 황후 폐하를 믿고 좀…… 막 나가는 구석이 있었잖아요.”

“그렇긴 하지.”

“다른 귀족들도 겉으론 아닌 체하지만 그 모습이 꽤나 거슬렸을 거예요. 무시당하는 건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니까요.”

“그 대가가 이 초대장이고?”

“물론이죠.”

앤은 연회에 참석하기 전보다 훨씬 많아진 초대장을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드디어 공녀님의 매력을 알아보기 시작한 거예요.”

“나의 매력이라면 어떤?”

“음, 이를테면 베일 것 같은 콧날이라던지, 심해처럼 빠져들 것만 같은 눈동자라던지, 밤하늘보다 아름다운 머리칼이라던지, 단호하지만 다정한 마음씨라던지, 자신의 사람을 아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라던지…….”

“이제 됐어. 충분해.”

나는 마치 준비라도 한 듯 쏟아지는 나의 장점에 조금 부끄러워질 것 같았다.

“어쨌건 초대장이 많아진 건 환영할 일이야. 연회에 간 목적은 달성한 셈이니까.”

“이 중에서 가고 싶은 곳 몇 군데 골라서 가셔요. 아! 참고로 시기는 전부 대신전에 가기 전이에요.”

“딱 좋아. 그럼 대신전에 가기 전까지 친목을 다지면 되겠어.”

나는 문득 황실 연회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나디아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

“아, 나디아에게도 편지해야겠네. 새 편지지 좀 가져다줘.”

“네, 아가씨!”

그리고 방을 나선 앤은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앤, 왜 이렇게 급하게 와. 무슨 일이라도 있어?”

나는 앤의 손에 편지지조차 들리지 않았다는 걸 깨닫곤 무언가 급한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공작님께서…….”

“……아버지께 왜?”

앤이 숨을 고르느라 잠시 말을 멈춘 사이,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다치시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전쟁은 완승했다고 했잖아. 분명 곧 귀환할 거라고 했는데…….’

그러나 애써 호흡을 찾은 앤이 내뱉은 말은 그보다 더 뜻밖이었다.

“공작님께서 돌아오신대요.”

“그건 나도 알고 있는데…….”

“지금 당장이요!”

내가 앤이 한 말의 뜻을 미처 다 파악하기도 전에 방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 공작님께서 저택 바로 앞에 도착하셨답니다!”

“뭐?”

나는 당황스러움에 들고 있던 초대장마저 놓치고 말았다.

“그걸 왜 이제야……!”

“아가씨, 우선 정문으로 나가셔요!”

나는 얼떨떨한 모습으로 앤을 따라 방을 나섰다.

“아버지께서 지금 당장 오신다고? 그걸 너도 몰랐어?”

“네. 미리 서신을 보내시지 않은 모양이에요.”

“대체 왜……!”

내가 황당함을 떨쳐 내지 못한 채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데, 멀리서 묵직한 발걸음이 저택과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건…….’

나는 빛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형태를 읽기 위해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발견한 건,

“오랜만이구나.”

정말 밤하늘 그 자체를 품고 있는 사람. 지독하게 차갑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유일한 이.

“아버지.”

나의 아버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