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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92)화 (9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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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황제의 말에 쥐 죽은 듯 조용히 있던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전쟁은 제국의 압승이다. 그렇지 않아도 포상을 위해 공작을 부르려 했건만 이렇게 일이 생기는군.”

홀은 헤이녹스에 대한 이야기로 금세 떠들썩해졌으나 황제는 무감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아버지가.’

순간 휘청거린 나를 체드만이 잡아챘다.

“록시. 괜찮아?”

“……아, 어. 괜찮아.”

체드만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결코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오빠 알고 있었구나.”

“…….”

아무런 대답이 없는 체드만에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곤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따 얘기해.”

“황후 폐하. 제발 제 말을 한 번만 들어보시면……!”

황후는 멀어져 가는 황제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황후 폐하, 제발…….”

플레리의 간절한 목소리에도 그녀를 바라보는 황후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변명 따위 필요 없다.”

“아아…….”

그러곤 매정하게 돌아서는 황후의 모습에 플레리는 절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야…….”

여전히 반성 없는 그녀의 태도에 질릴 대로 질려 버린 나와 체드만은 고개를 돌렸다.

“더 있을 필요 없다. 가자, 록시.”

나와 체드만이 연회장을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자, 구경하기 위해 모여 웅성거리던 귀족들이 단번에 발걸음을 물러서 길을 만들었다.

홀을 나선 우리는 정문에 세워져 있을 마차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가 씻고 생각을 정리할 계획이었다.

“록시나.”

나를 부르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벌써 저택으로 돌아가는 건가?”

로이스터의 물음에 잠시 한숨을 내쉰 나는, 이내 체드만을 향해 손짓했다.

“오라버니는 먼저 타 있어. 오래 안 걸릴 테니까.”

나와 로이스터가 주기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체드만은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와 로이스터는 인적이 드문 정원 근처까지 아무런 말 없이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도 오지 않을 만한 곳에 도착하자, 나는 신성력으로 소음을 차단하는 벽을 만들었다.

“……황궁에서 이렇게 힘을 사용해도 되는 건가.”

그의 걱정과도 같은 물음에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지금 상태로는 신성력을 쓰지 않는 게 더 괴로워요.”

“기사나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황자님이 계시잖아요.”

로이스터는 나의 신성력 폭주를 막는 것뿐 아니라, 신성력을 사용할 시에 불필요한 힘이 흘러나가는 것까지 막아 주었다.

“보호벽을 치는 데 외엔 신성력이 새지 않으니 들킬 위험 없어요.”

“……그렇군.”

낮게 한숨을 쉰 나는 로이스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 부르셨습니까? 계속 연회장에 보이지 않길래 오늘은 만날 수 없겠거니 했는데요.”

“아, 날 기다렸나.”

묘하게 전보다 밝아진 듯한 목소리에 나는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요. 다만 약속을 벌써부터 어기시니 신뢰가 깨질 뻔했을 뿐입니다.”

나의 진지한 대답에 로이스터는 웃음기를 지운 채 말했다.

“미안하군. 나도 곧 연회장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영애가 벌써 떠났다고 하기에.”

“아.”

그런 이유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애초에 플레리와 이런 일이 생기지만 않았다면 홀에 더 오래 남아 있었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로이스터의 담담한 질문에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좀, 복잡해요. 한 가지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라서.”

“공녀의 심기를 건드린 자라면 누구든 말하게.”

“말하면요?”

나는 문득 올라오는 울컥함과 장난기에 그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말하면 뭐, 황자님께서 도움이라도 주시게요?”

“당연하지 않나.”

“하하.”

왜인지 근엄하기까지 해 보이는 그의 말에 나는 실소 같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분명 로이스터는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나는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다음 만남은 대신전이 되겠네요. 신탁이 내려왔다니, 확인 안 할 수가 없어요.”

“대신전은 대신관이 머무르는 곳 아닌가. 공녀도 가도 괜찮은 건가?”

그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오늘 황자님을 뵀으니 괜찮을 거예요. 요 며칠 폭주의 조짐도 없었고.”

“……다행이군.”

왜인지 미련이 남은 듯한 그의 목소리에도 나는 보호벽을 거두었다.

“곧 뵙겠습니다, 황자님.”

“……그러지.”

나는 그곳에 홀로 남은 로이스터를 두고 마차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천천히 바뀌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나는, 아까 전부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체드만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아, 록시.”

그는 곧바로 대답했지만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어디 안 좋아?”

“아니야 그런 거.”

웃으며 답하는 체드만에게는 기운은 없어 보였으나 확실히 아픈 것 같지는 않아 나는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나는 연회의 시작부터 줄곧 그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내뱉었다.

“오라버니는 내가 못 미더워?”

“뭐?”

체드만은 예상치 못한 말인 듯 눈을 깜박였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나한테 숨기잖아.”

공작가에 정보를 주는 단체가 있다는 것도, 공작가의 사정도, 아버지의 소식도.

“다른 건 다 그렇다고 쳐. 오라버니는 가주 대리이니까. 함부로 얘기할 수 없었다고 해. 그거 다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대체 아버지 이야기는 왜 숨긴 거야?”

황제에게 헤이녹스에 대해 들은 이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안도감, 그다음은 의문이었다.

“내가 왜 아버지의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들어야 해?”

어떻게 알고도 말하지 않을 수 있지. 내가 그리 못 미더웠나? 함부로 말하고 다닐까 봐 걱정됐나?

“나도 해야 할 거 하지 말아야 할 거 구별할 줄 알아.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알아?”

헤이녹스의 무사 귀환 소식은 정말 반가웠다. 최근에는 그와 연락조차 닿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그가 곧 돌아온다니, 이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가.

‘그런데 왜 말을 안 해?’

만약 체드만이 언질이라도 주었다면, 귀띔이라도 해 줬다면.

“왜 나를 작아지게 만들어?”

11년 만에 전장에서 돌아오는 헤이녹스를 기다리는 건 전쟁 영웅으로서의 포상이 아닌 황제의 호출이었다. 그것도 나의 미숙한 행동 때문에.

“나도 피해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 최소한 부끄러운 딸은 되지 않으려고…….”

그런데 나는 무사 귀환하는 헤이녹스를 반기진 못할망정 쉬지도 못하고 황궁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아빠 황궁 오는 거 좋아하지도 않는데.”

돌아오자마자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내가 만들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나도 알고 싶어. 나도 피해 주고 싶지 않고, 같이 대화하고 싶어.”

묘하게 겉도는 느낌이었다. 요즘 따라 더더욱 체드만이 나에게 숨기는 게 많아졌다.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걷잡을 수 없이 무서워졌다.

“나 다시 오빠랑 멀어지기 싫어…….”

한바탕 쏟아 낸 후에 잠시 숨을 고른 나는 문득 올라오는 창피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미안.”

사실 나도 알고 있다. 다 내 잘못이라는 거. 침착해지려 노력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는 거.

“난 그냥 서운해서……. 미안.”

“아니.”

나의 사과에 여태껏 입을 열지 않았던 체드만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네가 사과할 거 없어. 명백히 내 잘못이니까.”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체드만은 어딘가 비어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는 게 널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때론 안다는 게 버거울 때도 있는 법이잖아.”

체드만은 열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적어도 난 그랬어. 언제나 알고 싶지 않은 게 나를 향해 쏟아졌거든. 나는 그게 너무 괴로웠고, 너만큼은 겪지 않았으면 했어. 마음 편하게. 그런데,”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곤 조용히 미소 지었다.

“너는 나와 다르구나.”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정보에 숨이 막혔는데, 너는 그 이야기들을 걸러낼 수 있을 만큼 강했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허덕일 때 너는 자유라는 걸 배웠구나. 그 사이에, 너는 아주 많이 자랐구나. 우리가 떨어져 있던 그 몇 년 사이에.

“앞으로는 너에게 이야기할게. 나 혼자만 알고 판단하지도 않을게. 널 작아지게 해서 미안해.”

어둑한 도시를 밝히는 단 하나의 달빛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나도 너랑 멀어지기 싫은데,”

체드만은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한 번만 용서해 주라.”

달빛이 막 그에게로 스며들던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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