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차기 태양이라니……!”
아닌 척 황후의 말에 귀 기울이던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그럼 다음 황제의 자리에 오를 자가 신탁으로 결정된단 말인가!”
“그럼 혹시 1황자의 자리가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그만.”
1황자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자 황후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는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점점 커지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모든 걸 말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어요.”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신전과 관련된 일이라면 나 또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혹여라도 내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릴 가능성이 있으니까.
모두의 집중 속에서, 황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곧 있을 대신전 기도에서 신탁을 공개할 겁니다.”
신탁의 내용이 과연 누군가를 향하고 있는 건지.
“그때 알 수 있겠지요.”
황후는 짧은 말만을 남기곤 곧 자리를 떠났다. 황제와 1황자, 그리고 로이스터 역시 주변에 없는 걸 보니 황실 일원끼리의 일정이 또 있는 모양이었다.
황후가 떠난 뒤부터 귀족들의 웅성거림은 걷잡을 수 없게 커졌다.
“신탁이라니, 이게 무슨…….”
“여태 황좌의 주인이 바뀌는 동안 한 번도 신탁이 내려온 적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신탁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요.”
“차기 황제는 아르타나 여신의 총애까지 받는다는 뜻일까요?”
“대체 누구…….”
신탁에 관한 이야기로 홀이 한바탕 소란스러운 와중에, 나디아가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록시나는 알고 있었나요. 신탁이 내려왔다는 거요.”
“아니요.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최근 신전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귀띔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신탁이 내려왔다는 건 몰랐다.
‘설마…….’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서 길버트와 대화를 나누던 체드만이 보였다.
그는 이 연회에 있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무척이나 차분해 보였다.
‘하…….’
체드만은 이미 신탁에 대해 알고 있던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신전과 관련된 일에 이토록 이성적일 수 없으니까.
‘대체 왜 말을 안 해 준 거야.’
미간을 찌푸린 채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나디아가 말을 걸어 왔다.
“괜찮으세요? 피곤해 보이는데…….”
“아, 괜찮아요. 잠시 현기증이 나서.”
걱정 말라는 의미로 그녀에게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가까이서 툴라젠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베라 영애는 신탁에 대해 뭐 들은 거 있나요?”
“아니요. 저도 황후 폐하께 부름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베베라의 대답에 툴라젠 부인은 궁금한 듯 은근히 질문했다.
“대체 어쩌다 황후 폐하의 부름을 받은 거예요? 황자님께 도움을 줬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아, 그건…….”
베베라는 부끄러운 듯 살짝 얼굴을 붉힌 채 말했다.
“황자님께서 다친 걸 제가 치료해드렸거든요.”
“어머. 그럼 베베라 영애는 우연히 1황자님을 만난 건가요?”
“네. 제가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황자님을 발견했어요.”
베베라의 말에 리셴 영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팔짱을 꼈다.
“일을 했다고요?”
베베라 역시 그 시선을 느꼈는지 손을 모은 채 차분히 말했다.
“저는 의원에서 일을 했어요.”
“의원에서 일했다니. 혹시 의학을 공부하셨나요?”
툴라젠 부인의 물음에 베베라는 느리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저 의원님 곁에서 일하며 약초 몇 개를 배운 게 전부예요.”
“1황자님을 도울 정도면 큰일을 하신 거니 너무 겸손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심지어 황후 폐하께서 직접 여기로 부르셨잖아요?”
툴라젠 백작 부인은 황후가 관심을 두고 있는 베베라에게 최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리셴 영애는 여전히 베베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일을 했다는 걸 보니 부유하지 못한 평민인 것 같은데, 애초에 황자님이라는 걸 알고 도운 거 아닌가요?”
“리셴 영애.”
포드 남작 부인이 그녀에게 경고를 주려 하자, 메이룬 부인이 포드 부인이 나서지 못하도록 막았다.
“지켜보세요.”
메이룬 부인의 말에 포드 남작 부인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평민이 언제 그런 고귀한 분을 만나 보았겠어요. 게다가 황자님께서는 찬란한 금발을 가지고 계신데 못 알아봤을 리가 없죠.”
비아냥거리는 리셴 영애의 물음에도 베베라는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당시 황자님께선 후드를 쓰고 계셔서 알아볼 수 없었어요. 다만 피가 너무 많이 흐르고 있어 우선 집 안으로 들여 치료한 거고요. 설령 그 앞에 쓰러져 있던 게 황자님이 아닌 다른 누구였더라도 도왔을 거예요.”
“베베라 영애는 무척이나 조심성이 없군요.”
리셴 영애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채 베베라를 노려보았다.
“신원이 확인되지도 않은 이를 집에 들인다니, 이게 무슨 망측한 일이에요.”
비꼬는 것이 분명한 리셴 영애의 말에 곁에 있던 귀족 영애들 몇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게다가 다른 누구라도 도왔을 거라니요. 그건 더더욱 위험한 말 아닌가요. 누구든 집에 들일 수 있다. 그런 뜻이니까요.”
“그런, 말은 한 적 없습니다.”
베베라는 애써 차분하려 노력했지만, 세게 쥔 손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신고식 한번 호되네요.”
나디아 영애의 중얼거림에 나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뜯기 좋은 먹잇감일 테니까.’
평민인 데다가 뒷배로 삼을 가문도 없다. 지금은 황후나 1황자가 그녀의 편의를 봐주고 있지만, 언제 내쳐질지 모르는 존재니까.
‘그런데 리셴 영애가 유독 더 예민하게 반응하네.’
그녀는 베베라를 울리거나 이 자리에서 내쫓아야만 성에 찰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요. 평민인 주제에 감히 황궁에 떳떳하게 머무르다니.”
리셴 영애는 이제 완전히 베베라를 향해 공격적인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원래 같으면 당신 같은 평민이 올려다보지도 못할 분들이야.”
베베라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없었다.
“황후 폐하께서 좀 챙겨 주신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그런 리셴 영애의 말에 베베라는 고개를 들어 플레리를 바라보았다.
“아카린즈 영애…….”
베베라가 도와달라는 듯 바라보자 팔짱을 낀 채 베베라를 내려다보던 플레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나한테 도움이라도 달라는 거야?”
“영애. 전에 우리는 꽤나 괜찮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나요. 저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친구?”
그 말에 플레리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베베라를 째려보았다.
“황후 폐하의 부탁으로 몇 번 어울려 준 거 가지고 친구라니. 주제도 모르는 모양이네. 이 근본도 없는 게!”
플레리는 베베라를 향해 쏘아붙이듯 말했다.
“황후 폐하의 조카이자, 황후 폐하의 오라버니를 아버지로 둔 나를? 게다가 조만간 탄제리크 공작 부인이 될 사람에게, 뭐? 친구?”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때, 들려오는 익숙한 이름에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서 탄제리크가 왜 나오지?”
차가운 나의 표정에 잠시 움찔한 플레리는 이내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뭘 놀라고 그래? 황후 폐하의 조카인 내가 황실로 시집갈 수는 없고, 그럼 그다음으로 큰 세력인 탄제리크의 안주인이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게 말하는 플레리의 얼굴에서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듯했다.
“제정신이 아니군요.”
아직 가까워지지 못한 귀족들과 친분을 다지러 왔으니 조용히 목적만 이루고 가려 했으나,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탄제리크에선 영애에 대한 이야기가 단 한마디도 오간 적 없습니다. 오라버니께서도 언급한 적 없고요.”
그러자 잠시 당황한 듯하던 플레리는 이내 더 큰 목소리로 따지듯 말했다.
“그, 그럼 소공작이 아직 네게 말하지 않은 모양이지! 하, 탄제리크가 사람들끼리 사이가 좋다더니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지?”
내게서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신이 난 플레리는 더욱 생각 없이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공작 부인이 죽은 게 왜 공녀 탓이냐며 뭐라 할 땐 언제고. 그것도 결국 다 보여 주기식이었나 보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탄제리크도 결국 공녀를 원망할 거라고 내가 분명 말했지 않…….”
“감히…….”
주먹을 꽉 쥐어 가면서 참으려던 나는 결코 가벼이 나올 수 없는 이름에 목소리를 낮췄다.
“누구 앞에서 입을 놀리는 거야.”
“록시나…….”
큰일이 날 거란 걸 직감한 나디아는 나를 막으려 했으나, 이 상황은 피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플레리 아카린즈. 분명 아버지께서 경고하셨을 텐데? 그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헤이녹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플레리는 흠칫거리다 다시 소리쳤다.
“그, 그게 뭐! 지금 공작은 전장에 있지 않나? 거기서 죽었든 살았든 알 게 뭐야!”
짜악-!
순간 울려 퍼진 소리에 소란스럽던 홀이 조용해졌다.
“지, 지금 이게…….”
붉어진 뺨을 부여잡은 채 플레리는 어안이 벙벙한 듯 멍하니 나를 보았다.
“나를 때린 거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제 파악은 네가 해.”
“너 따위가, 너 따위가 감히……!”
눈이 뒤집힌 플레리가 달려들려는 순간,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섰다.
“……오라버니.”
체드만은 플레리의 손목을 꽉 쥔 채 내게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들으마.”
플레리의 잡은 손을 내치듯 놓고 내게 다가온 체드만 너머 플레리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이쪽을 노려보는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거짓을 말하는 것? 한낱 날파리 따위가 떠들어 댄다 생각하고 무시했다. 주제 파악하지 못하고 허풍떠는 것? 못 배워 먹은 티를 낸다며 웃어넘겼다. 그런데 그 대상이 탄제리크라면 다르지.”
그전엔 아직 제국에 적응하지도 못했고, 오라버니들과 헤이녹스의 진심을 알지 못했으니 그저 숙이고 지나가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고작 아카린즈 따위가 탄제리크를 넘봐? 감히 탄제리크를 모욕해? 너 따위가?”
무섭도록 차가우면서도 매서운 록시나의 말에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네가 탄제리크의 일원이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나는 분노인지 수치심인지 모를 이유로 벌벌 떠는 플레리를 향해 말했다.
“근본도 없는 게.”
그리고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그 넓은 연회장 안에서 들리는 거라곤 오직 숨소리뿐이었다.
그 기나긴 정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황후였다.
황제와 함께 중앙홀로 돌아오던 황후는 연회장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플레리를 보곤 황급히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 황후 폐하……!”
플레리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울먹이며 황후 폐하에게 소리쳤다.
“저 공녀 따위가 감히 저를 욕보였습니다. 황후 폐하의 조카인 저를요!!”
그녀의 악 섞인 울먹거림과 붉어진 뺨을 본 황후는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공녀. 사실입니까?”
그녀의 따가운 눈초리에 입을 열려던 찰나, 체드만이 대신 대답했다.
“무례는 아카린즈 영애께서 먼저 저질렀습니다.”
“내가 언제……!”
“플레리.”
황후는 소리 지르려는 플레리를 온기 하나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보아하니.”
황후의 옆에서 뒷짐을 진 채 상황을 살피던 황제가 느리게 말했다.
“아카린즈 영애가 폐를 끼친 모양이군.”
“폐하!”
원망 섞인 황후의 목소리에도 황제는 아랑곳없었다.
“소공작이 거짓을 말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
그의 단호한 말에 황후는 차마 더 입을 열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이 일은 각 가주들에게 알리도록 하지. 아카린즈 백작과 탄제리크 공작은 사흘 뒤 황제궁으로 오라 하게.”
“아버지께선 자리를 비우고 계시니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아니, 공작이 직접 와야 할 거야.”
체드만의 말에 잠시 한숨을 쉰 황제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밝힐 생각은 없었건만…….”
황제는 여전히 감정 하나 없는 차가운 눈을 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곧 탄제리크 공작이 귀환할 거다.”
십 년 넘게 떨어져 있던,
이곳 수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