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황제는 황후와 황자들을 곁에 두고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 연회는 황후가 직접 준비했네. 이 홀에 있는 생화부터 샹들리에 하나까지 황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지.”
추켜세우며 말하는 황제의 말에 황후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요즘 귀족들 간 교류할 기회가 많지 않은 것 같더군. 이 자리에서만큼은 편히 대화하라고 마련한 자리이니 많은 공을 들인 만큼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네.”
황제가 연설을 끝낸 순간에도 베베라의 시선은 단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누굴 저렇게 바라보는 거지?’
베베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로이스터였다.
‘……로이스터?’
그저 지나가듯 스치는 게 아니었다. 베베라는 명백히 로이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연설이 끝나 주변 귀족들의 대화가 들려오는 지금까지도.
‘베베라가 왜 2황자에게 관심을 갖는 거지?’
그녀가 로이스터에 대해 궁금해할 만한 접점이라곤 없었을 텐데.
나 역시 조용히 베베라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고개를 돌렸다.
‘……!’
나와 눈이 마주친 베베라는 살짝 웃어 보인 후 이내 자리를 떠났다.
“아, 공녀님. 여기 계셨군요.”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지난번 티파티에서 보았던 리셴 영애와 툴라젠 백작 부인이 다가오며 말했다.
“연회에서 다시 뵈니 더욱 반갑습니다. 티파티에선 이야기할 시간이 짧아 아쉬웠는데요.”
“저도 다시 보니 반갑군요.”
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들 곁에 없는 두 명을 떠올렸다.
“그런데…… 포드 남작 부인과 메이룬 백작 부인께서는 어디에 계신가요?”
“아, 두 분은 아마 황후 폐하와 함께 계실 겁니다. 연회를 시작한 직후에는 꼭 사석에서 대화를 나누고 중앙홀로 내려오시거든요.”
“그렇군요.”
‘역시 최측근이다 이건가.’
게다가 베베라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베베라도 황후와 있는 건가.’
문득 떠오르는 의문에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반가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록시나!”
“아, 나디아.”
변치 않은 밝은 모습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회에서 보니 더 반갑네요. 그간 잘 지냈지요?”
“얼마 전에도 보았는걸요.”
“그래도요.”
나디아의 싱그러운 웃음은 보는 사람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사실 나디아와 교류한 것은 이번이 최근이 아니었다.
내가 매개를 찾아온 제국을 떠돌 때, 헤이녹스가 그래도 친구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며 소개시켜 준 게 체드만의 친구 길버트의 동생인 나디아 하르펠이었다.
떠도는 동안 그녀와 한 교류는 서로 편지를 보내는 것에 불과했지만, 나는 나디아에게서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하르펠 소후작께선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듣는 중이라 하시던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디아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그것도 황실기사단에 들어가겠다는 걸 막고 겨우 수업을 시작한 거예요. 공녀님도 아시다시피 오라버니가 좀…….”
“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길버트 하르펠 소후작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후계자 수업이 싫어서 도망을 다녔다고 했지, 아마.’
결국 고집을 꺾고 소후작으로서 수업을 받기로 한 모양이다.
“그럼 이곳에도 함께 오신 건가요?”
나의 물음에 나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에 탄제리크 소공작님과 대화를 나눈다고 자리를 떴어요.”
‘그러고 보니 체드만이 잠깐 자리를 뜨겠다고 말했던 것도 같고.’
언뜻 떠오르는 기억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사이, 나디아가 나의 머리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런데 록시나, 머리 위에 장식한 그 보석은 뭔가요?”
“아.”
나는 아닌 척하면서도 나디아의 물음에 대한 답을 기대하고 있는 주변의 영애들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묻고 싶어 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곁에 있는 황후파 인물들 탓에 선뜻 나서지 못한 모양이었다.
‘기대에는 부응을 해 줘야지.’
나는 느린 손짓으로 머리 위 장식을 훑었다.
“이건 릴케라는 보석이에요. 분홍빛이 투명하게 돌아 무척이나 희귀한 장식이죠.”
“릴케라면…… 들어 본 적 있어요! 곧 경매에도 나올 거라던데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하지만 경매에 오르기 전에 먼저 사용하고 싶더군요. 제가 이런 특별한 걸 보면 참을 수가 없어서.”
“값어치가 엄청나다고 들었는데……. 혹시 어딜 통해서 구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나는 기다리던 질문에 살포시 웃어 보였다.
“저만 알고 있으려고 했는데, 상대가 나디아니 특별히 알려 줄게요.”
나는 귓속말을 하는 척 집중하고 있는 주변 귀족들에게도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셜룬 상단이요. 지금 이 까다로운 릴케를 취급하는 건 셜룬 밖에 없답니다. 그것마저도 곧 경매에 오를 거라는 소식에 제가 먼저 차지했지요.”
“역시 록시나예요!”
진심으로 대단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나디아를 향해 한껏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는데, 누군가 심기가 불편한 듯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나디아 영애. 공녀님과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는 몰라도 차례라는 게 있지 않겠어요?”
리셴 영애는 표정이 좋지 않은 툴라젠 백작 부인과 함께 나디아를 째려보았다,
“먼저 대화를 나누던 건 우리랍니다.”
“아, 그랬군요. 미안해요.”
아무렇지 않은 듯 눈을 곱게 접은 나디아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내게 말했다.
“저는 다른 영애들과 함께 저 테이블 근처에 있을게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수도로 올라온 후 참석했던 나디아의 티파티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영애들이 있었다.
“알겠어요. 이따 봐요.”
그리고 나디아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리셴 후작 영애는 무척이나 탐탁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여간. 하르펜가에서는 예법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모양이죠? 소후작께서도 후계자 수업을 안 받겠다고 난리였다는데.”
“어쩜 그리 말도 안 되는 일이…….”
“사정이 있었겠죠.”
나는 그들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소후작께서는 검술을 배우시던 분이 아닌가요. 가만히 앉아서 글만 보는 수업하고는 맞지 않았을 수도 있지요.”
“그 이야기는 납득할 수가 없네요.”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서 있던 건, 아까 전 황후와 자리를 떠났다던 포드 남작 부인과 메이룬 백작 부인, 그리고…….
‘플레리 아카린즈.’
황후의 조카이자 어린 시절의 나에게 모욕을 주었던 플레리 아카린즈였다.
‘왜 안 나타나나 했다.’
그녀는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비아냥거림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소후작이라면 후계자답게 수업을 받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요? 고작 검술을 위해 후계자 수업을 미루다니…….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플레리.’
이 핑크 머리 영애는 정말이지 하지 못하는 말이 없었다.
“고작 검술이라니.”
그 검술로 이 제국이 건재하도록 만든 게 누구인데.
“그 검술 덕분에 수도가 이토록 평화로울 수 있다는 걸 잊으신 모양이네요.”
“그, 그건.”
플레리는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는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기사만이 제국을 지키는 건 아니지 않나요.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리를 쓰는 귀족 덕에 제국이 피해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플레리는 여전히 습관을 고치지 못했다.
본인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절대 굽히지 않는, 있어 봐야 좋을 것 없는 그 습관 말이다.
‘안 그래도 아버지한테 아직 소식이 없어서 걱정되는데.’
전장에 아버지를 보낸 사람을 두고 기사보다 탁상공론이 더 중요하다는 듯 말하는 플레리를 보니 짜증이 올라왔다.
“영애.”
결국 한 마디를 하려던 찰나, 누군가 다가와 나를 막아섰다.
“이쯤 하지요.”
어느새 다가온 황후는 살짝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친 후 이내 플레리를 향해 말했다.
“플레리. 너도 입을 조심하렴. 지금 공녀의 아버지가 전쟁터에 있다는 걸 잊은 거니?”
나긋하면서도 질책 어린 목소리에 플레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황후 폐하, 그게 아니고…….”
“변명은 되었다. 내 연회를 망칠 생각 마렴. 이번엔 그냥 넘어가마. 공녀도 동의하지요?”
그 무언의 압박이 담긴 물음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 마음대로.’
여전히 짜증은 가시질 않았지만, 지금 나서봐야 좋을 게 없었다. 나는 이곳에 나의 편을 만들기 위해 온 거지 가십거리가 되려고 한 건 아니니까.
결국 내가 입을 열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황후는 그녀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영애를 불렀다.
“여러분들에게 소개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이미 들은 사람도 있겠지만. 자, 인사하렴.”
“안녕하세요, 베베라라고 합니다.”
‘왜 성은 붙이지 않고…….’
베베라가 왜 앤더슨이라는 성을 붙이지 않았는지 고민하던 나는, 곧 그녀가 몰락 귀족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성을 아예 지워 버린 모양이네.’
귀족이 몰락한 것에 대해선 늘 끊임없는 루머가 쌓이니 아예 성을 밝히지도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 영애는 제 아들을 구해 준 은인이랍니다. 우리 아들을 살려 준 영애에게 꼭 보답하고 싶어 이리 자리에 불렀어요.”
“역시 황후 폐하의 마음은 감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어찌 이리 사려 깊으신지요.”
리셴 영애와 툴라젠 부인을 향해 미소를 지은 황후는 이내 나와 시선을 마주하더니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혹시 그 소식 들으셨나요.”
“소식이라면 어떤…….”
황후는 이곳에 시선을 집중하는 귀족들을 훑은 후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대신관이 황궁에 오셨던 건 알고 계시겠지요. 구텔 왕국에 사절단으로 다녀온 후 보고차 들렀답니다. 그때 그가 하는 말이…….”
대신관이라는 말에 미세하게 주먹을 꽉 쥔 나는, 뒤이어 들려오는 황후의 말에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신탁이 내려왔다는군요.”
그것도,
“차기 태양이 될 자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