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들어와.”
그녀의 허락하는 목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는 묵직해 보이는 물건을 천으로 감싼 채 들고 오더니,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후 방을 나갔다.
“경매에 나온다는 보석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있으세요?”
‘경매에 나올 만한 보석이라면…….’
나는 얼마 전, 로이스터를 만나기 위해 갔던 가게에서 주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릴케.”
릴케에 대한 이야기는 티파티에서도 넌지시 언급된 적이 있었다.
‘채굴하기 무척 까다로운 광물이라고 했었지.’
설마 그걸 보여 주려는 건가?
약간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자, 셜룬 영애는 미소를 지은 채 천을 거뒀다.
“딩동댕.”
천 아래로 드러난 물건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언뜻 보면 특이한 색을 가진 돌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셜룬 상단은 이 광물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한 듯했다.
“정말 어렵게 구한 녀석이에요. 이걸 찾겠다고 몇 달을 헤맸으니까요.”
“그 정도 가치의 광물을 이리 쉽게 보여 줘도 되나?”
“공녀님은 제 모델이니까요.”
물론 내가 동의의 뜻을 내비치긴 했지만, 셜룬 영애는 이미 내가 그녀의 모델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재차 ‘아직은 아니지.’라고 교정해 주려던 나는, 그녀의 무척이나 흥분한 듯한 표정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지금부터 설명해드릴게요. 공녀님께서 모델로서 무엇을 하시면 되는지.”
셜룬 영애는 광물의 거친 표면을 만지작거렸다.
“보다시피 릴케는 무척이나 거칠어요. 다듬기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죠. 하지만 제대로 다루기만 한다면, 이것만큼 아름다운 광물이 또 없어요.”
“그런 것 같군.”
수많은 보석을 보아 왔던 나지만, 이토록 투명한 빛을 내뿜는 광물은 흔치 않았다.
셜룬 영애는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곤 말을 이었다.
“우리 상단은 이걸 귀족 사회에 퍼뜨릴 예정이에요. 각종 장신구와 드레스, 시계의 부품과 같이 아주 광범위하게요. 너무도 대중적이어서 누구도 대체할 수 없을 만큼이면 더 좋고요.”
“쉽지 않을 텐데.”
그녀가 앞서 언급했듯, 릴케라는 광물은 무척이나 다루기 어려웠다. 어지간한 상단이 아니면 막 캐낸 릴케조차 얻기 어려웠으니까.
그러나 셜룬 영애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셜룬 상단 휘하 아래 있는 상단은 꽤 많으니까요.”
‘과연.’
셜룬 상단은 크고 작은 형태로 제국민의 곁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작은 상단들을 이용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공녀님께선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지금 보이는 셜룬 상단은 정말 꼬리에 불과하다는 걸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사람들의 눈에는 셜룬 상단이 막 성장한 신흥 부호 세력, 유통을 활발히 하려는 상단의 잠재력 정도를 보고 있겠지만 탄제리크는 아니었다.
‘셜룬 상단의 몸집은 상상 그 이상이니까.’
셜룬 상단은 오래전부터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몸집을 불려 오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당할 견제를 방지하기 위해 상단을 분리하여 각기 다른 곳에 소속되어 운영되는 것처럼 눈속임을 해 왔고.
탄제리크가 건드리지 않는 곳은 거의 셜룬 상단의 손을 거치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마리웨셀에 먼저 가길 잘했군.’
로이스터와 만났던 가게 주인은 내가 셜룬 영애를 만난다는 걸 알고 여러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역시 체드만이 정보 전달을 명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왔으면 망신을 당할 뻔했어.’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는 사이 셜룬 영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공녀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셜룬가는 그리 인지도가 높지 않습니다. 상단도 전부 나누어서 셜룬 소속이라는 걸 숨기고 운영시키다 보니 사람들이 보는 셜룬의 규모는 지금 이 건물 정도가 전부예요.”
‘황후파와 어울린 것도 이것 때문이겠군.’
셜룬 상단의 물건을 홍보하기 위해서는 인지도가 필요했기에 사교계에 주류인 황후파에 속하려던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목적을 숨기고 어울리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을 테고.’
그녀는 이제 릴케에서 시선을 뗀 채 나를 바라보았다.
“릴케가 보급되기 위해선 공녀님의 자리 필요합니다.”
“정확히는 탄제리크의 후광이 필요하겠지.”
그러자 셜룬 영애는 작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것도 맞고요.”
‘탄제리크의 후광이 필요하다라…….’
“제가 모델로서 뭘 해 주길 바라죠?”
나의 본격적인 질문에 셜룬 영애는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장난기를 지운 채 말했다.
“셜룬 상단의 물건을 사용해 주세요. 제국민들은 공녀님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관심이라.’
좋게 말하자면 그랬다. 그들은 나에게 지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11년 만에 수도에 모습을 드러낸 탄제리크가의 공녀.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동안, 얼굴이 끔찍하게 변했다거나 흉측한 모습 탓에 헤이녹스가 멀리 보내 버렸다는 각종 가십과 말도 안 되는 루머까지 떠돌았다.
‘헤드라인으로 뽑으면 분명 1면을 차지하겠지.’
타인에 대한 자극적인 요소는 언제나 재미를 주었으니까.
“그게 악의일 수도 있는데.”
“상관없어요.”
셜룬 영애는 정말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셜룬에게 필요한 건 파급력이에요. 악의이건 선의이건 그런 건 상관없어요. 다만, 저는 그런 악의를 받는 것 역시도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악의를 받는 게 능력이라고.’
“공녀님께서 정말 악한 짓을 저질렀다면, 그 악명은 진실이 되겠죠. 범죄자라고 불릴 테고요. 모두가 그자를 기피할 거예요. 그러나 지금 공녀님을 둘러싸고 있는 소문은 전부 부풀려졌을 뿐이잖아요. 때론 완전한 거짓도 있고요.”
셜룬 영애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그녀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도 공녀님의 소문이 거짓이라는 걸 알아요. 그러나 구태여 바로잡지 않는 것뿐이에요. 재밌으니까, 남의 일이니까. 쉽게 소비되고 쉽게 버려지는 거죠. 그런데,”
“그런데?”
나의 되물음에 셜룬 영애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녀님에 대한 관심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네요.”
몇십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공녀.
쉽게 가십을 떠들던 이들조차 그 공녀가 이토록 아름다울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뒤에선 공녀님을 깎아내릴지언정 앞에서는 잘 보이려 노력하죠. 또한 공녀님의 귀추에 주목하고, 따라 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요. 릴케는 그 시작에 불과해요.”
그녀는 이제 나를 향해 선명한 미소를 보였다.
“유행은 그렇게 시작되는 거랍니다.”
* * *
결과적으로 나는 그녀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했다.
셜룬 영애가 내건 조건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셜룬 상단의 손을 거친 물건을 공식적인 행사에 꼭 지참할 것. 릴케 및 물건 제공은 셜룬가에서.
둘째, 탄제리크와 셜룬의 조합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법한 명분을 만들 것.
대가로는 셜룬 상단을 이용할 때 어떠한 사용료도 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탄제리크의 상단과는 겹치는 품목이 아니니 문제없어.’
게다가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농후한 셜룬과의 연을 미리 만들어 두어 나쁠 건 없을 테니까.
그중 두 번째 조건에 대해서는 각 가문의 가주들과 더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겠으나, 셜룬 영애는 우선 이러한 계획을 내세웠다.
‘셜룬가에서는 곧 이국과의 교역로를 개척할 예정입니다. 계획은 완벽하지만 극비로 진행되다 보니 이행하기 위한 투자가 부족해요. 그걸 탄제리크에서 보태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셜룬 영애는 대가로 셜룬가의 교역로를 통해 벌어들인 순수익의 30%를 대가로 내세웠다.
유통부터 관리까지 전부 셜룬이 책임지는데 30%는 분명 솔깃한 제안이다.
하지만 가문과 가문이 연결되는 문제는 내가 단독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체드만이나 헤이녹스의 의견을 구하기 전까지 두 번째 조건은 일단 보류해 두기로 했다.
“생각보다 더 똑똑한 것 같아서 좋네.”
셜룬 영애는 여타의 귀족 영애들과 달리 이익을 보는 것에 대해 천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단이 잘 굴러가기 위해서 제 한 몸을 희생할 수도 있었고, 눈치가 무척이나 빨라 수완 능력도 좋았다.
‘함께 로이스터를 지지한다면 든든한 조력자가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섣불리 2황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일찍 릴케를 보내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셜룬 영애와의 만남이 있던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오늘, 저택 앞으로 도착한 릴케를 만지작거렸다.
“그 거친 광물을 이렇게 매끈하게 손보다니.”
지금 내가 만지는 가공된 릴케에서는 어떠한 흠집도 없었다.
‘셜룬 상단의 일 처리는 믿을 만하네.’
확실히 귀족들의 시선도 집중될 거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귀족들의 집중이었다. 황후파로 가득한 사교계에서 나는 나만의 편을 만들어야 했으니까.
‘그래야 추후 아버지께서 2황자를 지지할 때 도움이 되겠지.’
셜룬 영애를 만난 후에도 나는 바쁘게 움직였다.
저번 포드 남작 부인의 티파티에서 보았던 리셴 영애와 툴라젠 백작 부인 및 황후파 귀족들의 초대, 그리고 체드만의 친우 길버트의 가문인 하르펠에서의 모임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길버트의 동생 이름이 나디아 하르펠이었지.’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영애였는데, 무척이나 친절하고 다정한 성격인 듯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초대장이 안 오네.’
수도에서 얼굴을 비친 지 얼마 안 된 데다가 황후파와 티파티를 가졌다는 소문이 들어 선뜻 다른 귀족파에서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황후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귀족파의 도움은 절대적으로 필요해.’
프리실라의 죽음과 황후, 신전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증거는 없었으나, 나는 그들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거라 확신했다.
때문에 며칠 후 있을 황실 연회가 나에게는 무척 중요한 기회였다.
장례식이나 정식 기사 서임식은 누군가와 친목을 다지기엔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으므로 이번 황실 연회야말로 대화를 나눌 제대로 된 기회이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여주의 행동도 살펴야 하고.’
나는 그때 이 릴케를 어떻게 사용해야 여주에게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황후파와 귀족파의 시선까지 사로잡을 수 있을지 골똘히 고민해 보았다.
“아.”
나는 자연스럽지만 눈에 띄도록 꾸미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 한 명을 떠올렸다.
“앤.”
커튼을 치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던 앤은 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부르셨어요?”
“응. 이 보석 말이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친구분께서 보내 주셨다는 보석이요?”
앤은 창문을 마저 열어 고정시킨 뒤 내게로 다가왔다.
“보석이 분홍색인데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물인데. 엄청 귀한 건가 봐요.”
‘릴케가 흔하진 않지.’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해 준 사람이 이걸 연회에 착용하고 와 줬으면 좋겠다는데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
“장식이라면 또 제가 전문이죠.”
오랜만에 나를 꾸밀 생각에 흥분한 앤이 눈을 빛냈다.
“저만 믿으세요!”
* * *
이번 황실 연회는 황후궁에서 진행되었다. 그녀가 머무는 곳 옆에는 본궁보다는 비교적 작은 별궁이 몇 개 있었는데, 황후는 그중 하나를 아예 연회용으로 개조를 한 듯했다.
온통 생화로 연회장을 채운 데다가 바닥은 대리석, 벽 군데군데를 금으로 장식해 두었다. 심지어는 천장 곳곳에 설치된 샹들리에는 실제 크리스털로 장식되어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돈 좀 썼겠는데.”
나의 작은 중얼거림에 옆에 서 있던 체드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궁 예산만으로는 어려워 친정에서도 지원을 받았다더군.”
“아카린즈에서? 백작가도 그리 넉넉하지는 않을 텐데?”
아카린즈 백작가는 얼마 전 구텔 왕국으로 사치품을 실은 배를 여러 척 띄워 그리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아카린즈 백작은 자신 있어 보이던데. 분명 구텔의 귀족들이 제국의 물건을 좋아할 거라고 말이야.”
“얼마 전에 전쟁이 끝난 곳인데 퍽이나 좋아하겠군.”
“힘든 건 왕국민들이지 귀족이 아니잖아.”
체드만은 그렇게 말한 후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내가 작게 물었다.
“셜룬 상단에서 보낸 계약서는 확인했어?”
“아, 그 교역로 말이지? 얼마 전에 셜룬 가주와 만나 계약했어. 순수익의 37%를 받는 조건으로.”
“37%? 오빠가 제안한 거야?”
“응. 초기 개발 비용이 많이 들잖아. 탄제리크에서 그 정도 해 주면 최소한 3분의 1은 줘야지.”
“아…….”
‘그전에도 파격적인 조건이나 다름없는데.’
유통은 전부 셜룬 상단에서 책임지는 데다가 탄제리크는 그 교역로를 사용하며 통행료도 내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으니까.
그러나 굴하지 않고 그새 협상으로 받게 될 비용의 비율을 더 높인 체드만의 능력에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와 제국의 달, 황후 폐하, 그리고 제국의 작은 태양 1황자 전하와 2황자 전하 드십니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시종의 복창에 나는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
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황실 일원들이 등장할 입구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람 한 명을 발견했다.
“베베라 앤더슨…….”
원작 여주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