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아…….”
문득 나는 2황자를 앞에 두고 무례했다는 생각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확실히 흔하지 않은 일이다 보니 의아한 나머지…….”
“사과는 됐어.”
로이스터는 민망함에 살짝 고개를 숙이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공녀에게 내가 도움이 되는 것 같나?”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도를 생각하던 나는, 곧 그가 신성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음…….”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안 그래도 나오미 후궁의 장례식에서 만나 잠시 잔잔해졌던 신성력이 며칠 동안 로이스터를 보지 못하자 다시 요동을 치던 중이었다.
‘또 언제 그럴지 모르는 일이니까.’
내가 그의 제안을 수락한 이상 그에게 신성력에 대해 밝히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2황자는 이미 오러에 대해 밝히기도 했으니까.’
나 역시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좋을 거다.
나는 로이스터를 보는 순간 안정된 신성력에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확실히요.”
“그것참 다행이군.”
그는 진심이라는 듯 작게 눈웃음을 쳤다.
“공녀에게 도움이 되어서 말이야.”
“황자님은 괜찮으신가요?”
그는 내가 그의 오러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혹시 몰라 그의 낯빛을 살피자, 로이스터는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말했지 않나. 공녀는 내게 도움이 된다고. 의심할 필요 없어.”
“……그렇군요.”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더 의심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그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곳에서 만남을 지속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요.”
감시가 계속 따라붙는 이상, 외부에서 만남을 지속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반복되면 황후도 눈치를 챌 테니까.’
고민 끝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행사를 이용하지요.”
“연회 말인가?”
그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 주최 연회나 사냥,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한 환영회 말이에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텐데.”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요.”
로이스터가 공식적인 행사에 머무는 것을 반기는 이는 없을 거다. 적어도 황실의 사람 중에서는.
‘나야 오라버니들이 있으니 자리를 뜨는 게 편하겠지만.’
사교계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지는 몰랐다.
“의심하는 이가 분명 있을 거다.”
“황자님.”
나는 로이스터를 정면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겁니다. 저는 이렇게 황자님을 잠깐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든요.”
그러자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나를 마주 보던 로이스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잠깐으론 확신을 못 하겠군.”
‘오러는 신성력이랑 다른가?’
나는 로이스터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어떻게…….”
“거리가 이 정도는 돼야,”
로이스터는 어느새 내게 가까워진 채로 말을 이었다.
“알 것 같은데.”
“…….”
나는 그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얼굴을 굳혔다.
“그때도 이쯤 되었던 거 같아서.”
나오미 후궁의 장례식을 떠오르게 하는 그의 말에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물었다.
“어떠신 것 같은데요?”
그는 내 코앞까지 다가와 나의 얼굴을 살피더니,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하군.”
“그럼 제 의견에 동의하시는 겁니까?”
로이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의 말도 일리가 있어. 황궁을 몰래 빠져나오는 건 어려운 일이니 공식적인 자리를 이용하자는 거겠지.”
“네. 그리고 거리는…… 그리 가까울 필요는 없을 거 같으니 형식적인 인사를 하는 척 접촉해도 의심은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알겠다는 듯 가만히 있는 로이스터의 모습에 나는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서 데려오는 여자에 대해서는,”
어쩐지 못마땅한 표정의 로이스터에도 나는 꿋꿋이 말을 이어 갔다.
“경계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어찌 되었건 그 황후 폐하가 데려오신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확실한 정황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건 베베라는 원작 여주였고, 그런 그녀가 원작 남주인 1황자의 편일 것은 확실했다.
황후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라면 2황자와 탄제리크는 그녀를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공녀의 말이 맞아.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다행히도 로이스터는 나의 말을 이해한 듯 끄덕였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가 볼까.”
어느덧 해가 져 어두워진 밖을 보며 로이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어서 미안했네.”
“괜찮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요.”
“사정이라…….”
나의 말을 곱씹던 그는 이내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먼저 가 보겠네. 곧 얼굴을 비춰야 할 시간이라.”
‘황실 일원들의 저녁 식사 자리에도 참석하는 모양이네.’
의외인 점이 한둘이 아니다.
황후의 견제가 이리도 명확한데, 대체 아버지께선 무슨 생각이신 거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먼저 가 보세요. 저는 주인과 좀 더 이야기하다 가 보겠습니다.”
“……그래.”
로이스터는 분명히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결국 짧게 대답했다.
“연회에서 보지.”
“그때 뵙겠습니다.”
그리고 로이스터는 먼저 가게를 나섰다.
홀로 남은 나는 테이블 뒤에 있던 종을 들고 흔들었다.
그 소리에 위층에 있던 주인이 숨겨져 있던 계단을 통해 내려왔다.
“손님은 가셨습니까.”
“응, 조금 전에.”
나의 표정을 살핀 주인은 어느덧 빈 잔을 치우며 말했다.
“이야기는 잘 풀리신 건 같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얼굴이 밝으신 듯 보여서요.”
그의 말에 나는 서둘러 얼굴 위로 손을 올렸다.
입술을 만져 보아도 입꼬리는 올라가지 않은 채 그 자리였지만, 묘한 열기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음료에 알코올이 있었나.”
“무알콜입니다, 공녀님.”
단호한 주인의 말에 나는 계속해서 손바닥으로 볼의 열을 시켰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지.”
주인은 붉어진 내 얼굴을 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싶었지만, 이내 입을 다물곤 잔을 닦기 시작했다.
* * *
가게에서 나온 로이스터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황궁으로 돌아온 로이스터는 황후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도 아무런 문제 없이 식사를 마쳤다.
몇 시간 만에야 방 안으로 돌아온 그는 홀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군.”
로이스터는 자신을 끈질기게 쫓아오던 감시자들을 떠올렸다.
“이제 좀 괜찮을까 싶었건만.”
록시나의 곁에 서는 상상은 그녀를 처음 만난 후부터 줄곧 해 왔었다. 잊기에는 너무도 찬란했고, 아름다웠으니까.
‘당당히 옆을 지키고 싶었는데.’
그 거리를 좁히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고, 로이스터가 자란 만큼 록시나 역시 성장해 있었다.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몰랐는데.”
지난 몇 년간 로이스터는 록시나를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로이스터에게는 록시나가 전부였지만, 록시나에게는 로이스터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지.”
그가 겪은 그 외로움을, 지긋지긋한 경멸을 록시나가 겪었다고 생각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
“제아트릭, 네가 멍청해서 다행이야.”
로이스터는 만찬 자리에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던 1황자를 떠올렸다.
‘황후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는 빼앗기고도 남았을 텐데.’
그러나 로이스터는 자신이 갖지 못한 걸 두고 원망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당신은 여전히 자라고 있으니까.’
언젠가 록시나의 곁에 서기 위해선 끝도 없는 노력이 필요했다.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찬란하던 그 신성력으로 로이스터를 구해 준 순간 아니, 어쩌면 아펠라 궁에서 처음 그녀를 마주한 순간부터 그는 다짐했으니까.
‘절대 옆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누군가 주제 넘는다고 떠들어대도 상관없다. 결국 록시나의 옆을 차지하게 되는 건,
“나의 몫일 테니까.”
황실에서 열릴 연회가 기대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엔 그녀를 에스코트할 수 없겠지만, 일이 끝나면 반드시, 반드시 그녀의 사람이 되리라.
* * *
로이스터와의 만남을 가진 후 황실 연회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와의 만남을 위해 미뤄 두었던 셜룬 상단을 방문하기로 했다.
미리 연락을 해 둬서인지, 상단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셜룬 영애가 나와 나를 반겼다.
“공녀님, 와 주셨군요!”
“지난번엔 약속을 미뤄서 미안해요.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아니에요. 와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이지요! 어서 들어오세요.”
정신이 없어 보이는 사용인들을 지나쳐 위층으로 올라가자, 꽤나 긴 복도가 있었다.
셜룬 영애는 그 긴 복도를 지나 숨어 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은 바깥의 분주한 분위기와는 달리 모든 것이 정돈되어 깔끔했다.
“공녀님이 와 주신다고 하니 아버지께서 직접 내주신 방이에요. 원래 이곳은 중요한 계약이 있을 때만 사용하는 곳이거든요.”
“그런 곳을 내게 공개해도 되나?”
나의 물음에 셜룬 영애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공녀님은 제 모델이시니까요.”
“아직 한다고 한 적은 없는데.”
“그래도 상관없어요.”
셜룬 영애는 진심으로 걱정되지 않는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제안한 건 저고, 선택하는 것은 공녀님이지요. 저는 부탁하는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 제 성의를 보이는 것뿐입니다.”
‘확실히.’
셜룬 영애는 수완이 좋았다. 그녀는 간절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놓을 필요도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괜히 셜룬 상단의 후계자가 아니군.’
“그럼 포드 남작 부인의 티파티에서는 왜 그랬지?”
내가 티파티에서의 소심한 그녀의 모습에 대해 묻자, 잠시 멈칫하던 그녀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들은 제게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언뜻 위험하게 비칠 수도 있는 말을 셜룬 영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꺼냈다.
“지금은 사교계에 입성하기 위해 영향력이 있는 그들과 함께 있지만, 진심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토록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하는 모임이 또 없거든요.”
‘역시 의도였군.’
황후파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묘하게 풀이 죽어 보였던 그녀는, 사실 드러내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의 뛰어난 수완 능력을.
셜룬 영애는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인 것에 투자를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서 공녀님께선 제 모델이 되어 줄 생각이 있으신가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빙긋 웃어 보이는 그녀에, 나는 결국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영애에게 못 당하겠군요.”
나의 대답에 셜룬 영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재차 물었다.
“정말 수락하시는 건가요? 셜룬 상단의 모델이 되어 주신다는 거지요?”
“그래요. 자세한 건 더 들어 봐야겠지만.”
어차피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면 이 상단에 직접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셜룬 영애는 무척이나 기쁜 듯이 활짝 웃더니, 이내 소파 뒤에 있던 설렁줄을 당겼다.
“설명하기에 앞서, 공녀님께 꼭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문밖에서 노크하자, 셜룬 영애가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분명 마음에 드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