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 *
“공녀님, 이제 출발하실 건가요?”
“응.”
나는 앤이 건네는 후드를 썼다.
셜룬 영애와의 만남은 잠시 미뤄 두고 우선 나는 로이스터를 찾아가기로 했다.
곧 있을 황실 연회에 참석하기 전, 신성력을 갈무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늦게 안 와. 걱정하지 말고.”
그럼에도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의 앤이 말했다.
“저는 그냥 노파심에요. 혹여라도 황자 전하께서 마음이 바뀌셨을까 봐요.”
“그럴 일은 없어.”
물론 앤의 걱정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2황자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내게 도움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이건 일방적인 도움이 아니니까.’
나의 신성력을 억누르기 위해 로이스터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의 오러를 안정시키는 데 내가 도움이 되기도 했다. 상호의존적인 관계란 뜻이다.
‘앤한테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하지만.’
2황자와 연관된 모든 것은 이야기해 줄 수 없었다. 이건 단순히 나와 그가 아닌, 가문 전체가 걸려 있는 일이니까.
‘미안, 앤.’
나는 안심하라는 듯 작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갔다 올게. 오라버니께서도 알고 계신 일이니 별일 안 생길 거야.”
나와 로이스터가 만날 시간을 조정해 둔 체드만 역시 이 만남을 알고 있었다.
일어나지도 않겠지만, 혹여 돌발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소공작이 직접 나설 테니 큰 문제 없을 것이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중앙홀로 내려가자 이미 정문 앞에 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공녀님.”
마부의 모습으로 분장한 탄제리크가의 기사 퍼렐 경이 나를 발견하자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인사했다.
“마차는 번화가에 도착하기 전에 한 번 갈아탈 예정입니다. 마리웨셀 1번가부터는 걸어가시면 됩니다.”
“알겠네.”
나는 평소의 휘황찬란한 모습과는 달리 투박하고 장식 하나 없는 마차에 올라탔다.
최종 목적지인 마리웨셀 2번가에 도착하기 전까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단순하고 흔한 마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2황자는 어떻게 오려나.”
체드만 덕분에 로이스터와의 약속을 잡았지만, 그가 황궁에서 어떻게 나올지가 의문이었다.
“뭐, 이따 물어보면 되겠지.”
나는 마차의 창밖으로 빠르게 변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아버지의 결정을 따르는 것과 별개로 여전히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왜 위험을 안고 가면서까지 로이스터를 지지하는 걸까.’
물론 그가 오러를 발현했다는 것부터가 가능성이겠으나, 아직 소드마스터 같은 확실한 이름도 없는 그를 지지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랐다.
‘2황자를 지지하는 변변찮은 가문도 없고.’
골똘히 생각해도 뚜렷한 정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오라버니도 대답 안 해 주고.”
결국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는데, 헤이녹스는 벌써 몇 년째 전장에 있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상황이 더 급박해졌는지 편지조차 보내지 않았다.
‘언제 돌아오실까.’
나는 기사인 헤이녹스를 믿었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나의 아버지니까.
* * *
“공녀님,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퍼렐 경은 마차에서 내리는 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는 뒤에서 따라갈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퍼렐 경은 사라졌다.
아무래도 그의 덩치가 크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와 떨어져 따라오기로 했다.
“마리웨셀 1번가에서 두 블록을 가면 마리웨셀 2번가라고 했으니…….”
코너를 돌자 2번가 팻말이 걸린 골목 하나가 나왔다.
“세 번째 가게라면…… 여기네.”
나는 붉은 벽돌의 가게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오늘은 손님 안 받수다.”
문을 등진 자세로 서 컵을 닦던 주인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장사 안 할 거니 나가래도…….”
그의 말에도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없자 뒤를 돈 그는 후드를 쓴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 나가 주시오.”
“세 시쯤 이곳에서 약속을 잡았는데. 전달받지 못했나?”
그러자 주인은 눈을 들고 있던 컵을 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검은 태양이 뜨는 날 오라지 않았던가.”
후드 모자를 벗을 채 그를 향해 씨익 웃자, 주인은 군더더기 없는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나는 컵이 올려진 테이블 앞에 앉으며 말했다.
“평소에는 다른 가게처럼 장사를 하는 모양이지?”
“예. 음식점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내가 잔을 쥔 채 가볍게 흔들자, 그는 바 뒤 선반에 있던 음료병을 꺼냈다.
“무례를 끼쳐 죄송합니다.”
“후드를 쓰고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
나는 그가 따른 음료를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였다.
“아직 다른 손님은 안 왔나?”
“공녀님과 약속된 분이라면, 아직입니다.”
황궁과 마리웨셀 2번가는 거리가 꽤나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 체드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운영은 오후까지 한다고 들었네, 그럼 정보상으로서는 자정이 지나서야 활동하는 건가.”
“그렇지요. 그때쯤은 인적이 드문 편이니 눈에 띄지 않게 찾아오기 용이합니다. 하루 동안 쌓인 정보가 밀려들어 오는 시간이기도 하고요.”
로이스터가 오기 전까지 나는 체드만에게 미처 묻지 못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언제부터 활동한 거지? 아버지가 보내신 건가?”
주인은 공작가의 사람이었으나 가문 내에서가 아닌, 주로 밖에서 활동하였다.
“공작님께서 소공작이실 때는 가문 내에서 공작가를 위해 일했습니다. 외부 활동은 현 가주께서 공작 위를 받으신 뒤부터였고요.”
“외부에서 수집한 정보를 탄제리크로 넘기는 건가?”
“예. 보안도가 그리 높지 않은 정보는 일반인에게 팔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경매에 어떤 보석이 나온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지요.”
“그렇군.”
보석이라. 나는 셜룬 영애가 말한 릴케를 잠시 떠올렸다.
이후로도 한참 동안 정보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인의 말에 따르면 가장 예민하게 다루는 정보들은 전부 탄제리크의 일원에게만 향한다고 하였다.
“공녀님께서도 곧 성인이 되시니, 머지않아 이곳을 이용할 수 있게 되겠군요.”
“그건 좀 기대되는군.”
성인이 되기까진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가주나 가주 대리의 허락 없이도 정보상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풀린 분위기 속에서 문득 시계를 확인하자, 약속한 시간보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늦는데.”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주인에게 물었다.
“따로 들은 바는 없지?”
“오지 못한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아무 이유 없이 늦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중간에 그에게 급한 일이 생겼을 거라 짐작했다.
“이대로 가시렵니까?”
나는 주인의 물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후드를 쓰며 말했다.
“어쩌겠나. 다음을 기대해 봐야겠지.”
‘황실 연회를 가기 전에는 한 번 만나야 할 텐데.’
그리고 가게를 나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아, 하아.”
“누구시오, 오늘은 운영을 하지 않소만.”
주인의 냉담한 반응에 손님은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그는 땀으로 끝이 젖은 은발을 흐트러뜨렸다.
“갑작스레 일이 생겨서…….”
그러더니 시선을 돌려 붉은 눈으로 주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나는 몸을 돌려 가게 주인에게 말했다.
“자리를 피해 주게.”
“예, 공녀님.”
주인은 나와 로이스터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바 뒤에 숨겨져 있던 계단으로 올라갔다.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불편하실 것 같아서.”
그를 향해 웃어 보이자, 로이스터는 그새 숨을 고른 후 말했다.
“배려해 주어 고맙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아, 그게…….”
말을 이어 가려던 로이스터는 뒤에 있던 의자를 보며 말했다.
“우선 앉아서 이야기하지.”
그는 바 테이블 앞에 앉은 후 입을 열었다.
“궁에서 나오려는데, 감시가 붙었더군.”
“감시 말입니까? 황자님께 대체 누가…….”
모르는 척하긴 했지만 자연스레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황후.’
하지만 로이스터도, 나도 확신할 수 없었기에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감시를 따돌리느라 늦으신 거군요.”
“그래. 정말 미안하군. 이번 감시는 유독 끈질겨서.”
아무래도 이번에 로이스터가 정식 기사로 서임된 것이 황후의 마음을 급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요. 괜찮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의 침묵이 머물자 로이스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공녀는 내 제안을 생각해 봤나?”
“네.”
로이스터의 우는 모습을 보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생각했다. 과연 내가 그의 제안을 수락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분명 나에게 좋은 제안이었지만,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그를 보니 알겠다.
“전하의 제안을 수락하겠습니다.”
그의 눈은 절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성적으로 본다 하여도, 그는 절대 나를 속일 수가 없다. 계속해서 헤이녹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라면.
나의 대답에 로이스터는 안심한 듯 얼굴을 풀었다.
“다행이군. 분명 공녀에게도 좋은 선택이었을 거다.”
둥글게 휘는 로이스터의 붉은 눈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았다.
“곧 황실 연회가 있지요.”
“그래. 황후 폐하께서 신경을 많이 쓰는 모양이더군.”
“그리고 손님까지 데리고 온다더군요. 황자님께선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소문을 들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황후궁에서 수업받기에 바쁘다던데.”
“확실히 특이한 행보죠. 평소의 황후 폐하라면 하지 못할…….”
황후가 고작 평범한 평민 여자를 위해 황실의 방 하나를 내어준다는 것은 정말이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평민에 대해 소문은 무성하지만 그중 사실로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자주인공에 대한 정보는 이상할 정도로 없었다. 사교계에서 도는 소문도 전부 부풀려졌을 뿐.
‘내가 성인이었다면 정보상을 이용하는 건데.’
아직은 소공작이나 가주의 허락이 필요했다. 하지만 체드만은 나에게 전혀 이야기해 줄 생각이 없고, 헤이녹스는 전장에 있어 연락조차 닿지 않았다.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계속 이쪽을 향해 있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로이스터는 흔들림 없는 붉은 눈동자로 나의 얼굴을 지그시 뜯어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로이스터는 여전히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공녀를 보러 왔는데.”
그는 무언가 신경 쓰인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 여자 이야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