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 *
황후가 황궁으로 데려온 손님이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리셴 후작 영애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카린즈 가문 사람도 안 오고.’
황후의 최측근이라면 아카린즈 가문을 빼놓을 수가 없었다.
아카린즈는 황후의 친정 가문으로, 현재 가장 많은 이득을 보고 있는 곳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아카린즈 영애는 오지 않는 건가요?”
플레리 아카린즈라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모를 수가 없다. 친황후파들만 모여 있으니.
‘플레리 아카린즈나 아카린즈 백작 부인이라도 있을 줄 알았건만.’
나의 물음에 잠시간 침묵이 이어지더니, 포드 남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아카린즈 영애께서는 사정이 있으셔서 참석하지 못하셨답니다.”
‘사정이라니.’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플레리가 파티를 빠질 정도라면 얼마나 대단한 이유려나 생각하던 그때였다.
“공녀님. 그런데 그 이야기가 사실인가요?”
툴라젠 부인의 흥미진진하다는 듯한 표정에 나는 눈썹 하나를 들썩거렸다.
“어떤 이야기요?”
“아카린즈 영애가 차기 공작 부인으로 내정되어 있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하.’
툴라젠 부인의 말에 다른 이들도 궁금했는지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나는 밀려오는 황당함을 애써 감춘 채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건가요?”
그러자 툴라젠 부인은 눈을 깜박거리며 살짝 발을 뺐다.
“그런 소문이 있어서요. 아카린즈 영애가 차기 탄제리크 공작 부인이 될 거라는 말이요.”
‘플레리 아카린즈.’
이 이야기 역시 플레리 본인이 직접 소문낸 것이 틀림없었다.
‘차기 탄제리크 공작 부인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플레리는 현재 소공작인 체드만과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지난번에 그에게 찾아가 물었을 때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마주친 적조차 없다고 했다.
‘그런데 무슨 탄제리크 공작 부인이야. 망상도 정도껏 해야지.’
지난번에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어이가 없다는 뜻만 보여 주고 마려는데,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지?’
가볍게 넘길 만한 사안이 아닌 이야기를 떠들고 다녔을 때는 분명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겠지.
“왜 그런 소문이 난 거죠?”
나의 질문에 이내 포드 남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이해관계가 맞았다고 했지요. 탄제리크와 아카린즈의 성공적인 교류와 함께 공작님께서 아카린즈 영애를 며느릿감으로 점찍어 두셨다고요.”
‘며느릿감?’
이제는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대체 헤이녹스가 무슨 이유로 그녀를 점찍어 둔단 말인가.
‘몇 년 전 승전 기념 연회에서 아버지에게 된통 당한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렌자드의 말에 의하면 헤이녹스는 공장을 불규칙적으로 운영하며 한동안 아카린즈 가문의 숨통을 조였다고 한다.
‘그 탓에 아카린즈에서도 조용히 지냈다고 했는데.’
이런 거짓된 이야기를 진실처럼 퍼뜨리는 걸 보면 둘 중 하나였다.
간땡이가 부었거나, 믿는 구석이 있거나.
“사실인가요?”
기대가 넘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시선들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아니요. 저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야기네요.”
‘아카린즈와 탄제리크의 혼약이라니.’
그건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다. 아카린즈 가문, 특히 그곳 출신의 황후는 호시탐탐 탄제리크의 몰락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누군가 착각을 한 모양이에요. 오라버니께선 아직 약혼자도 없으신걸요.”
나의 대답에도 메이룬 백작 부인은 웃는 낯으로 재차 물었다.
“공작님께서는 지금 전장에 계시니 그 전에 이야기를 해 두었을 수도 있지요. 공녀님 모르게요.”
“글쎄요.”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버지께선 그런 걸 숨기는 분이 아닌데.”
“그러나 공작님께도 사정이라는 게 있으시겠죠. 공녀님께는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녀가 듣고 싶은 대답을 종용할수록 나는 더더욱 원하는 대답을 해 주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도 사실이 아니었고.
“오라버니조차 모르는 혼약을 진행시킬 정도로 무례한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나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채 메이룬 부인의 눈을 마주쳤다.
“아카린즈 가문과 손을 잡아야 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그야 영애께선 황후 폐하의 조카시니까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 말을 이어 가는 툴라젠 부인에 나는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탄제리크를 동네 구멍가게로 아는 건지.’
탄제리크는 황후의 입김이 작용할 것을 우려하여 피할 만큼 약하지도, 잘 보이기 위해 교류할 만큼 약한 가문도 아니었다.
비효율적이거나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버렸다. 그게 설령 아카린즈일지라도.
“저는 분명 들은 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아카린즈 영애와의 혼사는 무척이나 환영할 만한 일인걸요?”
툴라젠 부인은 마치 황홀한 무언가를 본 듯이 눈을 살짝 감았다.
“아카린즈와 탄제리크의 결합이라니. 이보다 더 견고한 동맹이 있을까요? 게다가 황후 폐하의 조카인 아카린즈 영애와 급에 맞는 이도 탄제리크 뿐일 테고요.”
‘하…….’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툴라젠 부인은 무언가 대단한 것을 본 사람처럼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아카린즈 영애와 소공작께서 혼인을 하신다면…….”
“부인.”
나는 정색을 하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만하시죠.”
“제, 제가 무엇을 어쨌다고…….”
당황스럽다는 그녀의 태도에도 나는 조금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제가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인의 생각해 주는 마음은 알겠으나 이쯤에서 그만하시지요.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이 몰려왔다. 아카린즈 따위가 탄제리크와 같은 위치에 서려 하다니.
‘단체로 머리가 빈 게 틀림없다.’
탄제리크의 안주인이었던 프리실라를 욕보이고, 나와 렌자드, 그리고 체드만과 헤이녹스의 사이를 이간질하려 들었던 주제에 어떻게 이런 헛된 꿈을 꿀 수 있단 말인가.
“저는 아니라고 하였고, 더 관련된 이야기가 들려온다면 응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툴라젠 부인은 명백히 선을 넘고 있었다. 한 번 거절한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것은 무례한 일이니까.
‘첫 티파티인 만큼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는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너그러움이 아닌, 무례에 대한 단호함이었다.
내가 더 입을 열지 않자, 탁자 위에는 잠시간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툴라젠 부인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알아챘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래요, 툴라젠 부인도 이쯤 하면 됐습니다.”
포드 남작 부인조차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자, 결국 메이룬 백작 부인이 나섰다.
“좀 과했습니다. 공녀님께 사과드리세요.”
“실례했습니다, 공녀님. 제가 너무 궁금한 나머지…….”
메이룬 부인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툴라젠 부인의 모습에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둘의 관계는 이런 건가.’
백작가의 안주인이라는 같은 직위를 가졌음에도 황후의 최측근인 메이룬 부인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여전히 불쾌함이 남아 있었으나, 더 화를 내면 나에게 불리하다는 생각에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는 어색한 대화가 이어졌다. 말을 하며 중간중간 나의 눈치를 보는 포드 남작 부인의 시선도 느껴졌으니까.
메이룬 부인은 곧 있을 황실 연회에 대해 대화를 이어 가려 했으나, 왜인지 아까부터 저기압인 리셴 후작 영애와 입을 꾹 다물어 버린 툴라젠 부인의 모습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포드 부인. 오늘 티파티는 이쯤 하는 게 어떨까요? 시간이 길어지니 좀 피곤하네요.”
“아, 그럼 오늘 티파티는 이쯤 할까요?”
포드 부인이 서둘러 제안하자, 이미 전부터 지쳐 있던 이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좀 지치네요. 저택으로 가 쉬어야겠어요.”
리셴 후작 영애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툴라젠 부인 역시 따라 일어났다.
“저도 이만 가 볼게요.”
그러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 정원을 나섰다.
“그럼 저도 가 보겠습니다. 오늘 즐거웠어요.”
나는 왜인지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셜론 영애를 힐끔 본 후 포드 부인을 향해 웃어 보였다.
“다음에도 불러 주실 거지요?”
“물론이에요. 언제든 환영이니 공녀님께서는 다음에도 참석해 주세요.”
내가 포드 부인과 메이룬 부인을 뒤로 한 채 마차로 향하는데, 작지만 확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
고개를 돌리자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 셜룬 영애였다.
“무슨 일인가요.”
“아, 저 그게…….”
그녀는 나를 부르고도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이내 용기를 내듯 눈을 마주쳤다.
“혹시 셜룬 상단에 가 보실 생각 없으신가요?”
“셜룬 상단을요?”
내가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셜룬 영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게, 아까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릴케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릴케라면,’
황실 연회에 입을 의상을 이야기할 때, 넌지시 언급했던 광물 중 하나였다. 채굴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워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무척이나 희귀한 보석 중 하나였다.
“셜룬 상단에서 릴케도 취급했던가요?”
나의 물음에 잠시 주위를 살핀 셜룬 영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비밀이지만요.”
‘비밀이라면 아직 공개하지 않았다는 건데.’
“그런데 그걸 왜 제게 말씀하시는 거죠?”
내 물음에 셜룬 영애는 작지만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녀님이 셜룬 상단의 모델이 되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모델이라…….”
그녀의 제안을 곱씹던 나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셜룬 영애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선 가 볼까요?”
* * *
“만만치 않구나.”
영애들과 부인이 떠난 이후 남은 메이룬 부인은 포드 남작 부인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일 줄 알았는데 꽤나 강단이 있어.”
“위엄이 있는 분이에요. 게다가 탄제리크를 뒷배로 두고 있고요.”
포드 부인은 불안한 듯 떨리는 눈동자로 메이룬 부인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요? 혹여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부인.”
메이룬 부인은 딱딱한 표정으로 포드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후 폐하에게 의심을 품으면 안 되지요.”
그녀는 불안해하는 포드 부인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눈을 번들거렸다.
“우리는 그저 황후 페하의 말만 따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