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 *
“아, 안녕하세요 공녀님.”
포드 남작 부인을 대신해 상석에 앉은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녀는 인사를 하는데 꽤나 용기를 낸 모양인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작게 웃어 주었다.
“반가워요, 셜룬 자작 영애.”
“……저를 아세요?”
셜룬 자작 영애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실히 셜룬가의 영애가 있다는 건 의외이긴 했지.’
그녀는 앞선 메이룬 백작 부인과 리셴 후작 영애, 툴라젠 백작 부인과는 달리 반드시 외울 필요는 없는 이였다.
셜룬 자작 영애는 외우면 좋을 목록에 속한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그녀의 얼굴 역시 초상화로 미리 외워 두었기 때문에 알아보는 데 어려움은 없었지만, 그녀가 진짜 이곳에 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셜론 자작가는 신흥 부호 가문이니까.’
최근에야 상단이 크게 성공했다지만, 셜론가를 귀족으로서의 긍지를 잃은 장사치라며 폄하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황후는 전통과 핏줄에 집착하는 이였으니,
‘친황후파 모임에 있을지는 몰랐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황후가 셜론가의 영애를 필요하다고 판단한 게 틀림없었다.
“공녀님, 저희 장례식에서 뵌 적이 있었지요.”
‘다른 귀족들은 별로 반기지 않는 것 같지만.’
셜론 영애가 나와 더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입을 열자, 메이룬 백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그 모습에 꼼짝 못 한 채 주눅 들어 있는 셜론 영애를 보아하니, 그녀는 이곳에서도 그리 섞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황후는 무슨 생각으로 부른 거지.’
셜론가 말고도 대상이 될 가문은 몇 있을 텐데 왜 황후는 하필 셜론 영애를 선택한 걸까.
머릿속으로 골똘히 생각하던 찰나, 내 오른쪽에 앉은 툴라젠 백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아, 공녀님께서도 나오미 후궁의 장례식에 오셨었죠. 저는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했지만 멀리서나마 뵀었답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장례식 당일을 떠올렸다.
‘황후가 다가왔었고, 그 곁에, 아…….’
황후 옆에 툴라젠 백작 부인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당시엔 황후와의 기 싸움 때문에 주위를 살펴볼 겨를도 없었지만.
“이렇게나마 인사드릴 기회가 있어 다행이네요.”
툴라젠 부인은 나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이후로는 여느 티파티와 다름없었다. 수도에서 가장 유행하는 디자인과 요즘 귀족 영애들에게 인기 많은 카페, 그리고 얼마 뒤에 있을 황실 연회까지.
누군가를 해하려 한다거나 망신을 주려는 기미는 없는 것 같았다.
그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 저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요.”
백작 부인이나 리셴 영애가 하는 말을 들으며 조용히 맞장구를 치던 헤디욤 영애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영애의 조부님이라면, 시종장님 말인가요?”
“네. 얼마 전에 저택으로 오셨었거든요.”
황실 시종장이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티파티에 있던 이들이 모두 귀를 기울였다.
“곧 열릴 연회에 깜짝 손님이 있을 거라던데요.”
“깜짝 손님이라고요?”
툴라젠 부인이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자, 헤디욤 영애는 여유롭게 재차 입을 열었다.
“그것도 황자 전하께서 직접 모시고 온다고요.”
“네에? 황자 전하게서 직접이요?”
그 말에 리셴 후작 영애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대체 어떤……. 아 역시 이웃 국가의 사절단을 맞이하시려는 걸까요?”
그녀의 질문에도 헤디욤 영애는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아니요, 그 손님은 황자 전하의 은인이라고 했어요. 어떤 나라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 제국민이고요.”
헤디욤 영애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메이룬 백작 부인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라면, 저도 들은 적 있어요. 황후 폐하께 직접 말이에요.”
‘황후한테 직접이라고?’
그 말에 나는 헤디욤 영애가 지칭한 그 황자가 다름 아닌 1황자임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사실 은인을 데려오는 게 로이스터였다면 이미 내가 알고도 남았겠지.’
그러고 보니 그와 만나기로 한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남에게 들키지 않은 채 그와 만날 방법을 궁리하던 찰나, 메이룬 부인이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 1황자 전하께서 시찰을 나가셨는데 그곳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고 하죠.”
“어머나!”
“괴한이라니……! 전하께선 괜찮으신 건가요?”
리셴 후작 영애가 두 손을 입에 모은 채 묻자, 메이룬 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영애의 도움으로 다행히도 무탈하시다고 합니다. 정말 다행인 일이지요.”
“잠깐만요. 영애의 도움이라고 하셨나요?”
“네. 황자 전하를 도운 이는 수도 외곽에 사는 한 평민이라고 하더군요. 여자이고요. 황후 전하께서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황실 연회에 초대한다고 하셨습니다.”
“어쩜……. 황후 폐하께선 마음이 정말 넓으시군요.”
“평민을 연회에도 초대해 주시다니, 폐하의 깊은 마음을 저는 헤아리지조차 못하겠어요.”
포드 남작 부인과 툴라젠 부인의 감동받은 듯한 목소리에도 나는 여전히 드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평민을 초대한다니. 게다가 그 황후가 직접?’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황후는 평민이라면 상종조차 하지 않는, 뼛속까지 귀족인 자였으니까.
‘그런데 아들을 구해 줬다는 이유로 황실 연회에 초대한다고?’
물론 아들을 구해 준 은인에게 뭔들 해 주지 못하겠느냐만은, 감사를 표하는 것은 사적인 자리에서도 충분했다.
황실 연회에 초대한다는 것은 그 격을 달리했다. 황실 일원이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누구든 귀족 사회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으니까.
‘평민 여자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황후가 초대를 하는 거지.’
골똘히 고민하던 나는, 문득 잊고 지냈던 원작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황후는 아들을 구한 은인을 연회에 초대하여 고마움을 표하고자 하였다.’
‘그때 그 은인의 이름이…….’
베베라 앤더슨.
그녀는 이 원작의 여자주인공이었다.
‘원작과는 달라진 게 많아 이대로 미래가 바뀌려나 싶었더니.’
원작 여주의 등장은 변함이 없었다.
‘여주가 없다면 이 소설은 흘러갈 수조차 없으니까.’
내가 악녀가 된 것도 원작의 흐름을 위해 불가피한 요소였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녀가 새롭게 등장한다고 해도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안한 건…… 저쪽인 거 같은데.’
리셴 후작 영애는 무엇 때문인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아까부터 손톱을 물어뜯고 있으니까.
“영애,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안색이…….”
셜룬 영애의 걱정스럽다는 질문에 리셴 후작 영애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일 없으니 신경 끄세요!”
그러자 셜론 영애는 민망함에 뻗었던 손을 내렸다.
누가 보아도 무시하는 게 명백한 리셴 영애의 태도에도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
나는 이제 그녀의 위치를 이해할 것 같았다.
이곳에서 셜론 영애는 그냥 섞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들러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네.’
이 공간에 있는 누구도 그녀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구슬리기 좋은 상대.’
조용히 관찰하며 그들의 먹이사슬을 파악하던 중, 나를 문득 나를 바라보고 있던 헤디욤 영애와 눈이 마주쳤다.
문제가 없다는 듯 싱긋 웃어 보이는 헤디욤 영애의 모습에 나 역시 미소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 공작님께서는 아직 출정에 나가 계시다고요. 벌써 몇 년이 지난 것 같네요.”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물어오는 포드 남작 부인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꽤 오래되었죠.”
“어쩜, 걱정이 많이 되시겠어요.”
눈썹을 늘어뜨린 채 말하는 툴라젠 부인에 나는 문제없다는 듯 무겁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딸로서는 물론 걱정이 되지요. 하지만 수많은 제국민 중 하나가 된다면 그리 불안하지도 않습니다. 쉽게 당할 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 아니겠어요. 저였다면 심장이 벌렁거려 매일 밤 잠에 들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러자 맞장구치듯 포드 남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요. 소공작께서 가문을 잘 이끌고 계시다지만, 가주가 가문을 비우는 것은 큰 부담이 되는 일이니까요.”
메이룬 백작 부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 아닙니까. 무사귀환하시길 제국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답니다.”
“힘드실 땐 얼마든 도움을 요청하셔도 괜찮답니다. 툴라젠 백작가는 언제나 공녀님을 위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그녀들의 말에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하하.”
‘한 편의 희극을 보는 것 같네.’
그들은 표면적으론 진심으로 우려된다는 모습이었지만, 묘하게 입꼬리가 말려 있었다.
‘이 중에 진심이 있기는 할까.’
아무리 소가주가 유능하더라도 가주가 죽는다면 가문이 흔들리는 건 당연했다. 당장 지지 가문들부터 흔들릴 테고, 자연히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걸 기다리는 걸 테고,’
짠 듯한 이 상황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우려하시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감히 툴라젠 따위가 도움을 준다는 말을 하다니.’
마치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선심을 쓰듯 말했지만, 이건 분명히 탄제리크 가문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일이었다.
“지금 탄제리크는 무척이나 안정적이니까요.”
나는 나의 반응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구김 하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디 탄제리크를 건드려.’
황후가 좀 어울려 주니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감히 탄제리크의 쇠퇴를 꿈꾸다니.
‘그렇게는 못 두지. 절대로.’
웃음거리로 전락할 생각, 추호도 없었다.
* * *
“평민치고 예법이 나쁘지 않다더군.”
황후는 식물을 마저 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진도를 생각보다 더 빨리 나갈 수 있을 거라던데.”
“과찬입니다.”
황후의 뒤에 서 있던 영애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폐하께 폐를 끼치지 않아 다행일 뿐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듯한 그녀의 말에 황후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그래. 나와 황자에게 폐가 되어선 안 되겠지.”
그러곤 이내 고개를 돌려 윤기 나는 갈색 머리의 영애를 바라보았다.
“누가 이곳에 데려와 줬는지 잊지 말기를 바라지.”
“……물론입니다.”
영애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보며 호박색 눈을 빛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