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나의 질문에 잠시 멈칫한 앤은, 이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공녀님을 옆에서 모시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죠. 공작님께서는 정보가 느린 사용인을 공녀님 곁에 두지 않으시니까요.”
‘아버지께서?’
앤의 말에도 신빙성은 있었다.
실제로 헤이녹스는 정보를 무엇보다 중요시 여겼으니까.
아무래도 내가 수도에서 떨어져 산 지 오래였으니, 소문이나 정보에 뒤처질까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가주의 명령이었다면 앤이 이런 정보를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 찜찜함은 뭐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어 더 물을 수도 없었다.
“……그럼 앤은 내가 이 티파티를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아가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하셔야죠. 다른 영애도 아니고 탄제리크의 공녀이신데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앤은 조심스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기회인 것 같아요. 공녀님께선 수도에서 오래 떨어져 지내셨으니 사교계에 대해 잘 모르시잖아요. 다른 귀족들에게 공녀님을 각인시키려면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앤의 말이 맞았다.
중앙의 귀족들에게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황실 주최 연회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축하연이나 다른 큰 규모의 연회는 사람이 많아 소수와 깊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다.
‘내가 수도로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정도밖에 못 하겠지.’
그러나 소규모의 티파티는 달랐다. 말 그대로 적은 인원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타 지역이나 수도의 근황을 들을 수도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기도 좋고.’
게다가 친황후파의 주최인 만큼 제국에서 굵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필히 참석할 것이다.
첫 티파티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평판이 좌지우지될 테지.
‘기를 죽이려 들겠네.’
어린 귀족 영애의 첫 티파티는 그저 가벼운 찻놀이를 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잘 모르는 영애가 함부로 행동하여 위계질서를 흔들리게 할 수는 없으니 함께하는 이들의 서열을 확실히 했고, 그건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이기도 했다.
‘그걸 버티지 못하는 영애도 많다고 했던 거 같은데.’
하지만 그 ‘신고식’을 버티지 못하면 중앙귀족들과 엮일 수 없었다.
품위가 부족하고 참을성이 없는, 귀족답지 못한 귀족이라고 평가당했으니까.
‘그러니 피할 수는 없겠지.’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고.
오랫동안 사교계에 발을 담갔던 이들이 모였으니 물론 쉬운 절차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나에겐 참석해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헤이녹스가 로이스터를 지지한다면.’
그 말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탄제리크가 차기 황위에 관여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때를 대비해 미리 인맥을 만들어 둬야 해.’
이 자리는 그 시작이 될 것이다. 반드시.
* * *
“탄제리크 공녀님!”
남작가의 정원으로 들어서자, 나를 발견한 포드 남작 부인이 찻잔을 내려놓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 걸음해 주셨군요!”
“부인께서 초대장을 보내셨잖아요.”
나는 남작 부인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친절에는 응하는 수밖에요.”
나의 말에 포드 남작 부인은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티파티는 ‘그’ 탄제리크의 공녀까지 참석했다는 소문이 돌며 위상이 높아질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뿌듯한 표정의 그녀를 앞에 두고 천천히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역시 메이룬 백작 부인이 왔네.’
“공녀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거의 이 티파티에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꼿꼿이 앉은 채 나를 반겼다.
‘하긴, 황후의 친우인 포드 남작 부인이 제 딸이니 당연한 일이려나.’
메이룬 백작가는 황후가 후원하는 남작가에 딸을 보냄으로써 황가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였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황후에 대한 충성일 테지만.
‘억지로 시킨 혼인이니 딸과 사이가 안 좋을 거라 생각했건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포드 남작 부인과 메이룬 백작 부인 간의 모녀 관계는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 옆은 리셴가의 영애인 듯하고, 툴라젠 백작 부인도 왔군.’
그들은 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볍다고 느껴지지는 않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앤이 티파티에 가기 전에 외워야 할 명단이라며 건넸던 초상화 속 얼굴들이 곳곳의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반드시 외워야 할 목록과 외우면 좋을 목록, 그리고 외우지 않아도 무방할 목록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모두 외워 버렸다.
‘그리고, 저 사람은…….’
나는 건너편 의자에 앉은 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눈을 살짝 찡그리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저 영애는 누구지?”
낮게 읊조린 말에도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여인들은 단박에 중얼거림을 알아들었다.
“아, 공녀님께서는 처음 보시겠군요.”
그에 옆에 서 있던 포드 남작 부인이 말을 이었다.
“헤디욤 자작 영애입니다. 영애의 조부께서 황실의 총괄시종장을 맡고 계시지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녀님.”
‘헤디욤이라…….’
헤디욤 자작가. 그곳의 일원을 마주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아주 예전, 황궁에 들렀을 때 마중 나왔던 시종장에게 보낸 헤이녹스의 적의가 지금까지 선명했으니까.
헤이녹스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이가 아니었다. 그 성정 탓에 답답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도 했고.
그런데도 헤디욤 시종장을 향한 헤이녹스의 적의는 선명했다. 지금껏 그를 보아왔던 나마저 당황할 정도로.
‘의외였지.’
그때의 헤이녹스와 나는 좋게 말하면 무척이나 어색한 사이였으며, 나쁜 말로는 쇼윈도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한창 헤이녹스의 눈치를 볼 때이기도 해서 함부로 입을 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어르신을 향한 동경’이라는 핑계로 그를 막아서려던 것은, 둘의 대치가 길어져선 안 된다는 이유 모를 직감 때문이었다.
‘단순히 미켄 헤디욤이 황후의 사람이라 견제했다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있어.’
무언가 더 근본적인,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듯한 질긴 적의.
감정을 드러낼수록 실이 되는 이 귀족 사회에서 헤이녹스가 여실 없이 그를 견제한 것엔 합당한 사유가 있을 터.
‘나도 조심해야 한다.’
황후의 최측근을 조부로 둔 저 영애에게, 실수하지 않도록.
자리가 정리되고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을 훑은 나는 짐짓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볍게 미소 지어 보였다.
“록시나 탄제리크예요.”
순간 나를 향해 오는 견제와 호기심, 그리고 무시를 가볍게 받아내었다.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으려던 나는, 문득 남은 좌석이 구석에 있는 것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
그들의 고개는 홀로 덩그러니 남은 의자를 향해 있었지만, 나를 탐색하는 시선은 여과 없이 느껴졌다.
‘이렇게 노골적이라니.’
내가 가만히 선 채 의자를 바라보고 있자 메이룬 백작 부인은 뒤늦게 눈치챘다는 듯 ‘아’ 하고 외쳤다.
“평소 티파티를 하면 늘 이렇게 앉았던 터라 미처 공녀님을 생각지 못했네요. 미숙함을 이해해 주시지요.”
너무도 속이 뻔히 보이는 행동에 순간 욱하고 올라오던 감정을 다스렸다.
이들은 내가 당황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원하는 걸까. 아니면 저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기를 원하는 걸까.
‘역시 둘 다려나.’
크게 심호흡하며 생각을 정리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숙함이라…….”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자리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던 나는 자리의 주최인 포드 남작 부인에게 시선을 두었다.
“아, 공녀님. 오늘은 이미 다들 착석하셨으니 이대로 앉으시는 게 어떠실까요?”
그녀의 말에 자리에 있는 모두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쉽게 되었군요.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황이라니.”
나는 안타깝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탄제리크의 유일한 공녀보다 더 높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첫날이니만큼 그들이 말하는 위계에서 내 자리를 공고히 하는 일이 필요해 보였다.
사교계에 얼굴을 비춘 적이 없는 탄제리크의 공녀.
나는 이 위치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저는 다음 기회에 함께하는 걸로 하죠. 이후 티파티는 미숙한 구석이 없길 바랍니다.”
내가 이 자리를 뜬다면 탄제리크의 공녀가 참석한 첫 티파티로 인해 그녀가 얻게 될 명성과 화젯거리가 사라지게 된다.
더불어 그들이 나를 초대할 때부터 생각해 두었던 일들도 틀어지겠지.
천천히 등을 돌려 걸음을 떼는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 황급히 나를 불렀다.
“공녀님!”
‘그럼 그렇지.’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하고 돌아보자 포드 남작 부인이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제가, 제가 자리를 바꿔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하얗게 질린 얼굴을 빤히 보던 나는 눈썹을 늘어트리고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망설였다.
“준비에 신중을 기하지 못한 것은 파티의 주최자인 제 탓입니다. 그러니 부디 자리에 함께해 주세요.”
나는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포드 남작 부인에게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이네요. 제가 맞게 찾아온 것 같아서.”
사교계를 향한 첫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 * *
“지금쯤 만났겠구나.”
황후는 화병에 꽂힌 꽃들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멋모르는 영애일까 걱정했건만.”
영리하게도, 자신의 위치를 활용할 줄 아는 모양이다.
‘귀족 영애가 홀로 사교계에 적응하긴 쉽지 않지.’
그것도 한곳에 머무르지 않아 친한 이가 없다면 더더욱.
그런 면에서 록시나는 양날의 검을 쥔 셈이었다.
그녀의 가문은 제국을 뒤흔들 재력이 있고, 거대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게임이었다.
보여지는 것을 중시하는 사교계에서 그것만으로도 화려한 시선을 받을 수 있을 테니.
‘다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지.’
유서 깊고 제국의 가장 큰 가문의 적녀라는 것은 강점이나 그만큼 많은 적을 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칼 없는 전쟁터인 사교계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많다는 건 그만큼 적의도 뚜렷하다는 뜻.
‘그러니 쉽지는 않을 겁니다, 공녀.’
아무리 그대의 가문이 뛰어나더라도 그건 한때의 후광에 불과할 뿐.
사교계에서 영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가문만 믿고 기고만장하는 것은 실로 멍청한 태도였다.
“기대가 되는군요.”
황후는 당돌하게도 자신을 마주 보던 록시나를 떠올렸다.
“그런 당당함이 언제까지 갈지.”
나 역시도 기대될 지경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