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로이스터를 만난 덕인지, 다행히도 신성력은 잠잠해졌다.
먼발치에서 대신관을 마주했음에도 그는 내 신성력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여전히 2황자는 없고.’
기도실에 모인 귀족들과 황실 일원 사이에도 로이스터는 없었다.
‘아직도 그 방에 있는 건가.’
시간이 지나면 나타나겠지 싶었지만, 그는 기도가 다 끝나도록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혹여나 대신관과 가까워질까 싶어 나오미 후궁을 향한 기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기도실을 나왔다.
“록시.”
귀족들의 발걸음이 잘 닿지 않는 곳까지 나와 겨우 숨을 돌리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승님.”
아슬론 윈터쳇은 나의 뒤에서 장난스러운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황자는 잘 만나고 왔어? 신성력이 안정된 걸 보니 그 사람이 네 개체가 맞는 모양이네.”
그의 속 좋은 말에 나는 혹여나 대신관에게 들킬까 싶어 조급했던 방금 전을 떠올렸다.
“대체 어디 계셨던 거예요! 대신관이 오기 전까지 신성력을 억누르지 못할까 봐 얼마나 불안했는지 아세요?”
“내가 그걸 가만히 두고만 봤겠어?”
아슬론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네 근처에 있었어. 대신관이 오기 전에 나타나려고 했고. 근데 네가 2황자랑 만났잖아.”
그는 팔짱을 낀 채 당당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너도 확인할 기회가 필요했던 거 아니야? 한 번쯤 2황자를 만날 생각이 있었잖아.”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 한 번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맞지만요…….”
‘내가 얼마나 긴장했다고!’
혹여 대신관에게 들킬까 몰래 저택으로 돌아가야 하나도 생각했었다고.
바닥을 보던 시선을 들어 아슬론을 향해 소리쳤다.
“말이라도 해 주셨음 좀 좋아요?! 옆에 있다고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됐잖아요.”
“그건, 미안하게 됐어.”
아슬론은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다시 나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2황자와 일은 잘 풀렸고?”
“……네. 제 매개가 맞았어요.”
“잘됐네. 그럼 앞으로 둘이 만나야 할 구실만 만들면 되는 건가?”
“아니요. 그건 이미 해결되었어요.”
나는 살짝 고개를 든 채로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미 알고 있더라고요. 제가 발현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거요.”
“……역시 2황자도 발현을 했나보네.”
“네? 스승님도 이미 알고 계셨어요?”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올려다보자, 아슬론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기사 서임식에서 느꼈지. 형용할 순 없지만 다른 기사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더라고. 기운을 숨긴 건지 뭔지 알 수 없어서 확신은 못 했지만.”
‘뭐야, 그러면…….’
아슬론도 알고 있었단 말이야? 로이스터가 오러를 발현했다는 걸?
내가 배신감 넘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아슬론은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나도 확신이 없었다고! 섣불리 얘기해 봐야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하…….”
물론 그의 말도 머리로는 이해가 됐지만,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그치만 내가 뭐라고 따지겠어.’
객관적으로 아슬론이 잘못한 거라곤, 내가 찾을 동안 보이지 않았다는 것뿐이니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죠.”
나의 대답에 아슬론은 안심한 듯 살짝 웃어 보이더니, 이내 물었다.
“그런데 해결이 되었다는 건 무슨 뜻이지? 둘이 만날 약속을 이미 잡았다는 건가?”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2황자의 후유증에 제가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2황자를 보면 통증이 나아지는 것처럼요.”
“오러를 발현한 후유증이 너를 보면 괜찮아진다고?”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오러가 신성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스승님도 잘 모르시는 건가요?”
“응.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어.”
‘아슬론도 모른다니.’
대체 오러와 신성력 사이에는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는 거지?
아니 어쩌면.
‘나와 로이스터 사이의 문제일지도.’
대체 그게 뭐길래.
나는 어째선지 보이지 않는 무언가 우리를 연결시키려 한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 * *
마차에 오른 나는 조용히 팔짱을 낀 채 생각을 정리했다.
‘오러를 발현했다니.’
그것도 스승이 헤이녹스와 렌자드라니.
‘예상치도 못했는데.’
로이스터는 원작에서 분량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기에, 그가 오러를 발현했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랑 렌자드가 도움을 주고 있었다는 것도 그렇고.’
탄제리크는 늘 중립을 유지했다.
황실이 공작가의 압도적인 영향력을 견제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정치에 참여하면 피곤한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많으니까.’
탄제리크령 뿐만 아니라 동부 전체의 치안과 경제를 신경 써야 했고, 특히나 헤이녹스는 소드마스터로서 제국의 안전에도 앞장서야 했으니까.
‘굳이 정치까지 개입해 일을 더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그런데 그런 탄제리크에서, 그것도 헤이녹스가 직접 2황자를 돕고 있었다.
‘가주가 움직였다는 것부터는 더 이상 다른 핑계를 댈 수 없어.’
이건 명백히 2황자를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나 다름없다.
“황위 계승에 개입하실 줄은 몰랐는데…….”
탄제리크의 지지는 다른 가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감을 가졌다.
‘아직 공개적으로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더 두고 보겠다는 걸 테지만.’
몇 년간 검술을 가르쳐 왔고, 오러까지 훈련시킨 걸 보면 헤이녹스는 확실히 그를 지지할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검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될 때 이야기겠지만.”
오러를 발현하여도 수련을 통해 검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과연 검기를 사용할 수 있으려나.”
그 고통스럽고도 아득한 길을, 어머니까지 잃은 로이스터가 버텨 낼 수 있을까.
나는 공작가와 가까워지는 마차 안에서,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았다.
* * *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시종장에게 체드만을 당장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 시간이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무실 문을 두드린 참이었다.
“체드만 오라버니.”
“아, 록시 왔구나.”
집무실에 들어서자, 바쁜 기색이 역력한 체드만이 안경을 벗으며 일어났다.
“바쁘면 나중에 올게.”
“아니야, 지금은 괜찮아. 어서 앉아.”
그의 말에 나는 집무실 소파로 발걸음을 옮겼다.
체드만은 뻑뻑한 눈을 두어 번 꾹꾹 누른 후 물었다.
“그래서, 어쩐 일로 왔어? 원래 식사 시간이 아니면 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잖아.”
그가 어쩐지 서운함이 담긴 듯한 농담을 던지자,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미안.”
“사과받으려 한 말은 아니었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오빠도 알고 있었지? 아버지께서 2황자를 지지한다는 걸.”
“……음.”
잠시 곤란한 듯 침묵하던 그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렌자드가 말했니?”
“아니. 2황자에게 직접 들었어.”
그러자 체드만은 아주 잠시 미간을 찌푸린 후 물었다.
“……2황자와 만났어?”
“응. 나오미 후궁의 장례식에서.”
“그랬구나.”
잠시간 생각을 정리하듯 침묵하던 체드만은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묻고 싶었던 게 뭐야?”
그의 물음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왜 2황자를 지지하시는 거야?”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어.’
일부러 황실을 멀리했던 헤이녹스는 대체 왜 2황자를 선택한 것일까.
그러자 체드만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 미소 지었다.
“글쎄.”
그는 마치 알지 못하겠다는 듯 선연한 모습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그건 아버지만이 아시지 않을까.”
* * *
“공녀님, 서신이 왔어요.”
헤이녹스의 예상치 못한 행보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을 때, 앤이 서신을 가져왔다.
“누구한테서?”
“포드 남작 부인이 보냈네요. 공녀님을 티파티에 초대한다는 것 같아요.”
“포드 남작 부인이?”
원래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초대장이었지만, 나는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에 서신을 받아 들었다.
“포드 남작 부인이라면…….”
나오미 후궁의 장례식장에서 황후와 인사했던 가문인가?
‘배는 잘 도착했냐고 물었던 거 같은데.’
내가 가만히 포드 남작가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고 있자, 옆에서 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포드 남작가라면 얼마 전에 이웃 국가로 배를 보낸 곳이에요. 남작 부인이 황후 폐하와 연이 있어서 투자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황후와 연이 있다고?”
‘그렇다기엔 신분 격차가 너무 나는 거 아닌가?’
황후는 신분에 무척이나 민감한 편이니만큼, 곁에 두는 이의 혈통도 예민하게 따지기로 유명했다.
“아 그게요, 포드 남작 부인의 친정이 메이룬 백작가예요.”
“백작 영애가 대체 왜 남작과 결혼한 거지?”
나의 의문에 앤은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포드 남작이 황후 폐하의 후원을 받았거든요. 거의 몰락에 가까웠던 가문을 구제해 준 거나 다름없죠. 그래서 한동안 ‘왜 제국의 달은 포드 남작가를 선택했는가’라는 기사로 신문 한 면이 꽉 차기도 했어요.”
“이유가 뭐였는데?”
“그건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어요. 그저 성실한 상인 가문의 몰락이 안타까웠던 황후 폐하의 착한 마음씨 정도로 마무리되었으니까요.”
“찝찝한 결말이네.”
“당시에도 그런 의견이 많았어요. 황후 폐하와 포드 남작가의 관계를 더 파고들려는 사람도 있었고요. 결국엔 다 수포로 돌아갔지만.”
앤의 말에 나는 더욱 머리가 복잡했다.
‘대체 황후가 포드 남작가를 후원한 이유가 뭘까?’
나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실마리에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그럼 메이룬 백작 영애는 황후의 지시로 포드 남작과 혼인한 건가? 메이룬 백작가는 대표적인 황후파 가문이니까.”
“글쎄요. 하지만 확실한 건, 여전히 포드 남작 부인과 황후 폐하의 사이가 좋다는 거예요.”
나는 포드 남작 부인의 혼인에 황후의 입김이 작용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자라 온 가문보다 훨씬 낮은 신분의 안주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황후와 사이가 좋다니.’
그렇다면 포드 남작 부인의 초대 역시 황후의 의견이 담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기어코…….’
탄제리크가 비밀리에 2황자를 지지한다는 걸 알게 된 지금, 하필이면 친황후파의 초대장이 오다니.
피곤한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직감에 눈을 질끈 감은 나는, 문득 떠오르는 의문에 고개를 들어 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앤은, 어떻게 알았어?”
메이룬 백작가와 포드 남작가, 그리고 황후와의 관계는 쉽게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황후가 숨기기 위해 갖은 수를 썼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내용을 어떻게.’
앤이 알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