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82)화 (82/106)

<82화>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빙긋 웃으며 로이스터를 마주 보았다.

“신성력을 다루는 건 온전히 제 소관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온전히 공녀의 소관이라…….”

그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좀 아쉽네. 공녀가 내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도움?’

나는 눈썹 한쪽을 찡그린 채 그가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 했다.

“도움이라면 어떤…….”

“내가.”

로이스터는 손 한쪽을 쥐었다 펴며 말을 이었다.

“오러를 발현했거든.”

“!”

‘오러를 발현했다고? 정식 기사 서임을 받은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어느새 오러가 발현되었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식 기사 서임을 받기 전, 누군가 검기를 발현한다면 소문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처음 발현한 사람 중에 오러를 완전히 감출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훈련받은 기사라면 아주 잠깐 마주쳤더라도 알아차렸겠지. 2황자가 발현했다는 걸.’

정식 기사 서임식에서 그의 불안정한 기운을 알아차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 그가 그전에 발현했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바로 내 눈앞에 있었음에도 로이스터에게서는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발현하셨다는 거죠? 아버지께서는 알고 계신 건가요?”

그러자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공작은 이미 알고 있어. 소드마스터이자 나의 스승이었으니 모를 리 없지. 그리고 발현은 아마도…… 5년쯤 된 듯하군, 공작이 출정을 가기 직전이었으니까.”

‘출정 가기 직전이라면, 로이스터에게 오러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 줄 시간조차 없었을 텐데.’

내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그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소드마스터가 되었다는 건 아니야. 아직은 발현을 한 것뿐이다.”

‘아.’

소드마스터가 귀한 이유는 그만큼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오러를 발현하고 나서도 수련이나 능력이 부족하면 검기를 사용할 수 없었고, 끝내 소드마스터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드마스터가 된 헤이녹스가 제국의 검이자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이스터는 오러를 발현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능성을 보인 셈이다.

“공작이 출정을 가며 새로 붙여 준 스승이 제2기사단의 부단장이고. 나보다 먼저 발현했으니 도움이 될 거라더군.”

“제2기사단의 부단장이라면…… 렌자드 오라버니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물론 렌자드가 도움이 될 거란 말은 사실일 거다. 그는 이미 몇 년 전에 오러 발현을 마치고 검기를 사용하기 위한 수련 중에 있었으니까.

‘렌자드가 아버지를 이어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되기를 온 제국이 기대 중이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제2기사단 부단장이라는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덕분이다.

그러니 렌자드에게 스승이 될 자격은 충분하다. 그런데,

‘렌자드가 2황자의 스승이라고? 저번에 로이스터가 내 매개인 것 같다고 말했을 때만 해도 아무런 언질 없었는데…….’

“아.”

그제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렌자드가 나에게 2황자에 대해 언급할 이유가 없었다는 걸.

그렇지 않아도 내가 황실과 엮이지 않길 바라는 렌자드인데, 나서서 로이스터와 나의 접점을 만들 리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2황자는 왜 나한테 발현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거지?’

로이스터가 발현을 했다는 건 그에게 주어진 강력한 무기였다. 힘을 얻었음에도 신전을 거부하는 나와는 달리, 그는 정식으로 기사의 길을 걷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기사 서임식에서도 알리지 않을 정도면 감추었다 나중에 드러내야만 할 이유가 있다는 걸 텐데,’

그럼에도 나에게 솔직히 털어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궁금하단 눈치네.”

“솔직히 말하면, 네. 제게 왜 이런 얘기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2황자는 입가에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공녀가 내게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도움이라면.”

“공녀는 오러가 발현되면 후유증이 생긴다는 걸 알고 있나?”

“어느 정도는요.”

렌자드 역시 오러를 발현한 후 한동안 심장이 조이고 손끝이 저리는 등의 후유증을 겪은 바 있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겪는 후유증은 알려진 것과 조금 달라.”

로이스터는 팔짱을 풀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발현을 하고 일주일 뒤였던가. 그때부터 단순히 후유증이라고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지. 처음은 가벼운 두통이었다가, 어느 날은 이명이 들렸고, 배가 찢어질 듯한 복통이나 급소를 맞은 듯 숨이 막혀 오기도 했어.”

그가 말하는 증상들은 확실히 일반적으로 오러 발현 뒤 겪는 후유증과는 달랐다.

‘오히려 내가 신성력을 발현했을 때와 비슷한…….’

특정 지을 수 없고, 특정한 곳에서 발생하지도 않는, 전신을 괴롭게 하는 고통.

“그런데 나를 밤낮없이 괴롭히던 그 통증이, 공녀를 보는 순간 가라앉더군. 어떤 짓을 해도 낫지 않던 게 말이야.”

그는 무언가 떠올리듯 주먹을 세게 쥐었다.

“몇 년 만에 느낀 편안함인지 모르겠어. 평생 안고 가야 할 통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니 도무지 놓칠 수가 없어서 말이야. 게다가…….”

그리고 고개를 든 그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공녀도 다름없어 보이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거지?’

그는 그냥 나를 떠보는 것이 아니었다. 로이스터에 눈에 담긴 건 분명한 확신.

“왜 그렇게 생각하신 건가요?”

나는 애써 차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로이스터는 개의치 않았다.

“종종 손에 힘을 주더군. 스치듯 가슴팍을 문지르기도 하고.”

“아.”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나 역시 같은 습관을 가지고 있으니 알아봤을 뿐이지. 다른 이들은 모를 만큼 사소한 행동이었으니까.”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행동을 로이스터는 하나하나 관찰하고 있었다.

“만나기로 한 가게에서 매주 두 번 어떤가. 그 정도라면 서로의 일에 큰 영향도 미치지 않을 테고, 그리 수상쩍게 여기는 이도 없을 거 같은데.”

그는 나를 향해 어색함 없는 완벽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공녀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 아닌가?”

* * *

“생각해 보겠다라…….”

록시나가 떠나고 홀로 남은 로이스터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중얼거렸다.

“수락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가 한 제안은 어찌 보면 거절할 수 없는 거래이기도 했다.

“그래. 공녀는 신중한 사람이니까.”

얼마든지 고민해도 상관없다. 결국 동의하게 될 테니.

로이스터가 그런 조건을 내건 것은 록시나가 절대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에서 벗어난 모습이 편해 보였으니까.’

그녀는 내색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지만, 비슷한 통증을 겪어 왔던 로이스터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록시나 탄제리크.”

처음 그녀가 탄제리크의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땐 참 멀게만 느껴졌다. 로이스터는 황실의 일원이라고는 하나 버려진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탄제리크 공작이 그의 검술 스승을 자처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헤이녹스가 처음 검술에 대해 언급한 건 록시나가 폭주했던 축제 직후였다.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 황궁에 도착할 때쯤 헤이녹스가 호위를 목적으로 함께 따라 보냈던 기사가 이런 말을 건넸다.

‘공작님께서 곧 황궁으로 찾아뵙겠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은 록시나를 위험에 빠뜨리게 한 것에 대한 문책인 줄만 알았는데, 다음날 헤이녹스가 찾아와 한 말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검을 배워 볼 생각이 없냐고 했었지.”

그의 무엇을 보고 제안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의 로이스터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걸.’

이후의 진행은 빨랐다. 헤이녹스는 상당한 행동력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제안을 수락한 즉시 수업 계획을 세웠고, 황궁 회의가 있는 날마다 은밀하게 아펠라 궁을 찾아와 훈련을 봐주었다.

“내가 황후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안다면, 당신도 날 안쓰러워할까.”

나를 구해 주었던, 나를 위해 망설임 없이 나서 주었던 유일한 존재.

“록시나…….”

로이스터는 검술 훈련이 버겁거나, 황후의 견제가 못 견디도록 괴로울 때마다 록시나를 떠올렸다.

비록 그가 록시나와 마주친 것은 찰나에 불과했고, 그녀는 기억조차 못 할지도 몰랐지만 그럼에도 로이스터는 그 희망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의 용사님.’

조금 서툴고, 둘러대는 것에 능숙지 못하나 그 어떤 것보다 찬란한.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지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로이스터는 언제나 가슴 한편에서 그녀와의 만남을 그려 오고 있었으니까.

“그게 어머니의 장례식에서일 줄은 상상조차 못 했지만.”

그는 홍차를 섞은 티스푼이 검게 변한 것을 알면서도 꿋꿋이 차를 마시던 어머니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로이스터의 어머니는 무척이나 다정했으나, 그만큼 연약했다.

“아름답고 언제든 깨질 것만 같던 어머니.”

당신은 나의 어머니였고, 나를 사랑해 주었으나 나를 보호해 주지는 못하셨습니다.

미움을 받고도 미움인지 몰랐고, 존중받지 못해도 그들을 이해하려 하셨으니.

“저는 그런 어머니가 참 미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가 미웠습니다.

왜 그 홍차에 독이 든 것을 몰랐을까. 왜 차를 마시는 어머니를 막지 못했을까.

“도대체 어머니는 왜, 그 차를 드셨습니까.”

그녀가 쓰러진 것은 정말 찰나였다.

로이스터의 어머니인 나오미는 늘 황후에게 미안해했다. 정실이 아니면서 황제와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았으니까.

그래서 황후가 그녀를 혐오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 지내기 위해 노력했다.

“제가 황후에게 미움받을까 걱정되어 그러셨단 거 압니다. 그런데…….”

그 차를 꼭 마셔야만 했던 겁니까.

그 홍차는 황후가 보낸 것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로이스터를 향한 증오를 감추지도 않았다.

그녀가 대놓고 홍차에 독성이 든 찻잎을 섞은 것은 그가 정식으로 기사에 서임된다는 소식을 듣고 조급해진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오미는 차를 마셨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황후에게 잘 보이는 것이 목숨보다 더 중요했던 것일까.

그게 정말 그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황후가 내린 선물을 한 번 거절하고 받게 될 후환이 그토록 두려우셨습니까.

“저는 어머니가 곁에 계시기만 해도 충분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셨습니까.

“당신의 선택이 죽도록 미운데, 원망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함이었음을.

“제가 어떻게 모른 체하겠습니까.”

잔인한 나의 어머니.

로이스터의 눈에서는 아까 차마 다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새어 나왔다.

“어머니…….”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벌써 이토록 그리운데,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