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아!’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린 그의 이름에, 나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
“……2황자 전하.”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뒤늦게 예를 차렸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내 실수야.’
로이스터를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은 줄곧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황자의 이름을 멋대로 부르다니.
나의 실책에 입술만 꽉 깨무는 사이, 로이스터는 소매로 눈물을 스윽 닦았다.
“2황자 전하께서 여기 계실 줄은…… 부디 너그러이 여겨 주세요.”
“……님.”
“예?”
로이스터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더 귀를 기울였다.
“전하,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시면…….”
“용사님.”
로이스터는 울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멀쩡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방금 뭐라…….”
그는 당황스러움에 움직이지 못하는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분명 축축이 젖어 있던 붉은 두 눈은 이제 나를 담고 있었다.
“나의 용사님.”
‘용사님이라니!’
아펠라 궁에서 로이스터를 처음 마주쳤을 때, 정체를 감추겠다고 급히 내뱉은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 알았더라면.
‘용사님이라는 헛소리 같은 거……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문득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눈을 질끈 감자, 무언가 근처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왜 모르는 척하지?”
“모르는 척이 아니라-”
그의 말에 항변하기 위해 눈을 뜬 찰나,
“눈을 봐야죠.”
로이스터는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탄제리크 공녀.”
나는 최대한 몸을 뒤로 물려 서랍장에 반쯤 기댄 채 그를 마주 보았다.
“공작한테 자리를 마련해 달라 부탁했거늘, 단 한 번을 들어주지 않던데.”
그의 어디에서도 아까의 약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공녀가 거절한 건가?”
‘……침착해.’
그가 갑작스레 다가온 것에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었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이건 떠보는 거야.’
나와 로이스터의 만남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그 역시도 누군가에게 약한 모습 따위 보여 줄 생각 없었을 것이다.
‘일부러 말을 돌리려는 거야.’
어릴 적 거짓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와 함께 방금 전까지 울고 있던 모습을 감추려는 의도였다.
‘아버지에게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는 건.’
나를 만나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는 말이다.
즉, 우연찮게 마련된 이 자리의 주도권을 자신에게 가져오고 싶다는 뜻이겠지.
‘그렇다고 쉽게 주도권을 내어줄 순 없지.’
헤이녹스가 후원을 해 왔다는 건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어떤 거래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그에게 굽히고 들어간다면 이후 헤이녹스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 터.
그게 무엇이든 나는 탄제리트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그를 대해야 했다.
“……황자님께서는.”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로이스터를 마주 보며 말했다.
“반가운 레이디에게 이렇게 대하시나 봅니다.”
‘어찌 되었든 로이스터 역시 나한테 함부로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여전히 버림받은 황자라는 것에서 그러했고, 그를 지지하는 유일한 가문이 탄제리크라는 것 또한 그러했다.
“저와의 자리를 마련해 달라 하셨다는 건, 나눌 이야기가 있으셨다는 건데…….”
나는 뒤로 쏠려 있는 자세 그대로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이런 모습으로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
그러자 로이스터는 몸을 뒤로 물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공녀를 만났다는 생각에 좀 과했군.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아닙니다.”
담담하게 말하며 나는 허리에 힘을 줘 자세를 바로했다.
“이런 식의 만남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크게 상관없겠지.”
걸음을 옮긴 로이스터는 팔짱을 낀 채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래서, 소공작에게까지 부탁해 공녀가 나를 보자고 한 이유는 뭐지?”
그가 한 번 이야기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었는데.”
나는 심장 부근을 괴롭히던 뻐근한 감각이 사라진 것을 느끼며 웃었다.
“이미 해결된 것 같군요.”
‘로이스터는 매개가 맞아.’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중에야 확인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길 줄은 몰랐다.
“제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 황자님께서는 왜 저를 만나고 싶다 하신 건가요?”
그가 왜 나를 만나고자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와 나의 인연은 재회를 기다릴 정도로 특별하지 않았고, 내게 바랄 것도 없을 텐데.
‘그럼에도 나를 봐야만 했던 이유가 대체 뭐지.’
나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에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한 번쯤 봐야겠다 싶었어.”
로이스터는 잠시 입을 다문 채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 번쯤 봐야 한다는 건…….”
“탄제리크 공작이 딸을 무척이나 아낀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이야. 만나게 해 달라는 부탁조차 안 들어줄 정도로.”
‘아,’
아버지…….
내가 모르는 사이 로이스터와 헤이녹스 사이에선 무슨 얘기가 오갔던 걸까.
‘제발 별말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로이스터는 웃으며 말했다.
“딸을 위해선 못 할 게 없다고 했던가.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은 공녀를 위해서라고.”
‘아, 제발.’
“황궁을 드나드는 귀족들의 말로는 딸이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든 후회하게 만들 거라던데. 감히 탄제리크의 사위가 되려고 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고.”
로이스터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정도 아니었잖아…….’
유독 내게 미안해하던 헤이녹스는 나이가 들수록 단순히 애정을 표현하는 쪽이 아니라 딸바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최근 들어 더 심해진 거 같아.’
내가 성인식을 치를 나이에 가까워질수록 그는 내게 가까워지는 이들을 드러내 놓고 경계했다.
‘렌자드도 정식 기사가 되면서 좀 더 거칠어졌지.’
그나마 다행인 건, 체드만은 소공작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정도일까.
“처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공작이 유난이라고 생각했는데.”
로이스터는 나의 얼굴 구석구석으로 시선을 움직이며 말했다.
“……오늘 공녀를 보니 공작이 과한 것도 아닌 것 같군.”
그는 나의 시선을 끈질기게 쫓아왔다.
“공녀를 만나고자 한 건 하나 궁금한 게 있어서야.”
“궁금한 것이라면…….”
“그 신성력, 어떻게 갈무리한 거지?”
“……!”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질문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게 무슨…….”
“아, 원래 만나서 할 말은 ‘상태는 좀 어때’ 였어. 11년 전, 축제에서 마주친 공녀는 나를 구하려다 폭주했었으니까.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고맙다는 말도 전하고 싶었지. 그런데.”
그는 기운을 읽듯 나의 주변을 가볍게 훑었다.
“지금 공녀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마치 발현조차 하지 못한 사람처럼.”
‘그걸 대체 어떻게…….’
내가 놀란 것은, 그가 나와의 만남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로서는 11년 전의 그 외출이 꽤나 기억에 남는 일이었을 테니. 납치가 될 뻔한 데다, 위험했던 상황을 쉽게 잊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날 일을 기억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야. 그런데.’
내 기운은 어떻게 느끼는 거지?
아까라면 매개를 찾지 못한 상태였으니 아티팩트를 사용했어도 힘이 새어 나왔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무척이나 조금이어서, 대신관이나 소드마스터 정도나 겨우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걸 로이스터가 어떻게…….’
내 얼굴 위로 떠오른 의문을 느꼈는지, 로이스터는 옅게 미소 지었다.
“기사 서임식 때 본 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지? 사실은 만남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찰나였지만.”
그는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땐 단상 아래에서도 선명히 느껴졌거든. 근처에 비현실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걸. 그런데 그 커다란 기운이, 내가 단상을 오르는 순간 사라졌어.”
‘비현실적인 힘이라는 건.’
“그때 나는 직감했지. 이게 당신의 힘이라는 걸. 내가 11년 전 보았던, 그 압도적인 신성력이라는 걸.”
나는 이제 그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예상조차 할 수 없어 조용히 로이스터를 바라만 보았다.
“하지만 돌이킬수록 이상하더군. 단상 아래라는 그 먼 거리에서도 선명히 느껴지던 힘이 도대체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그것도 순식간에.”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의 반응 하나하나를 담으며 말했다.
“그대가 의도한 건 아닌 듯했거든. 멀리서 본 공녀 역시 놀란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깊이를 알 수 없는, 투명하면서도 붉은 눈은 나를 꿰뚫어 보듯 바라보았다.
“그 신성력을 다루는 것에 누군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가 묻는 바는 명확했다.
“그게 나일 수도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