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황제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귀족들을 훑어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그대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겠다. 이리도 많은 이들이 추모해 주니, 분명 나오미도 기뻐할 테지.”
‘하.’
그녀가 살아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아펠라 궁에 방문하지 않았던 그가, 이제 와 아쉽다는 듯 말하는 것이 황당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옆에 서 있던 렌자드의 표정 역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갑작스레 떠나 제대로 된 배웅조차 하지 못하지만, 그대들의 발걸음이 이곳을 꽉 차게 해 주는 것 같아 무척이나 기쁘오.”
나는 황제가 연설을 이어 가는 중에도 티 나지 않도록 눈동자만으로 로이스터를 찾았다.
‘어디 있는 거지.’
나오미 후궁은 로이스터의 엄마이다. 그가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이기도 했고.
황궁에서 그가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가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오지 않았을 리는 없고.’
그럼에도 황실 일원들 근처에서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어딘가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애초에 저들과 같은 곳에 있는 것도 불편하겠지.’
황제와 황후, 그리고 1황자에게는 로이스터의 존재가 완벽한 무리 속에 낀 불순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
“형은.”
내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사이, 렌자드가 작게 말을 걸었다.
“어디 갔는지 알아?”
“아니, 그냥 잠깐 들를 데가 있다고 하던데.”
황궁 앞까지 와서 렌자드를 부른 그는 그대로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하고 떠난 뒤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곧 있으면 올 거야.”
“……그리하여 안타깝게도 신전이 아닌 황궁에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으나 나오미 역시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하네.”
황제는 말을 마무리 지으며 오른손을 들곤 가슴팍 위에 가볍게 올렸다.
“대 루엔트의 영광을 위하여.”
“대 루엔트의 영원을 위하여!”
그의 말에 귀족들이 화답하듯 소리친 후 황제는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황후와 1황자는 여전히 자리에 남아 귀족들을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포드 남작. 얼마 전에 떠났다던 배는 안전히 도착했답니까? 아, 메이룬 백작도 왔군요, 반가워요.”
황후는 밀려오는 사람에도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귀족들을 대했다.
사람이 붐비는 곳은 황후 주변만이 아니었다. 나와 렌자드의 곁은 조금 전의 서늘함은 잊었는지, 어떻게 해서든 공작가와 연을 잇기 위한 이들로 붐볐다.
“공자님께서는 벌써 제2기사단의 부단장까지 맡지 않으셨습니까. 역시 검술 천재라고 불릴 만합니다!”
“이리 늠름하게 자라기까지 하셨으니, 공작님께선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시겠습니다! 하하!”
귀족들의 입바른 소리에도, 렌자드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그가 전혀 감흥이 없어 보이자, 귀족 몇 명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공녀님께서는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그동안 무척 궁금했는데, 이리 아름답게 자라셨을지는 몰랐습니다!”
“정말 공작님을 꼭 빼닮으셨습니다!!”
“앞으로는 계속 수도에 머무실 건가요?”
쏟아지는 질문에도 애매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글쎄. 아직 잘 모르겠네요.”
“몸은 다 나으셨고요?”
“많이 회복되었어요.”
“그럼 앞으로 사교계 활동은 하실 건가요?”
그 질문에 내가 ‘아직은 섣부른 것 같다’라고 말하려던 순간, 누군가 끼어들며 말했다.
“완전히 생각이 없는 것 아닌 것 같았는데. 그렇죠, 공녀?”
귀족들 사이를 비집고 다가온 사람은 바로 황후였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공녀의 사교계 데뷔를 돕겠다고 말했거든요.”
“황후 폐하께서 직접 말입니까?”
주변 귀족들의 놀랍다는 반응에, 황후는 조용히 웃으며 답했다.
“탄제리크의 공녀 아닌가요. 예로부터 황실과 탄제리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친우. 제가 황실의 일원으로서 돕는 것이 맞지요.”
‘하.’
나와 렌자드는 그녀의 뻔뻔함에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황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물론 공녀가 동의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요. 저로서는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답니다.”
“폐하께서 직접 나서 주신다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분명 공녀님께서도 감사히 받아들이실 겁니다.”
“이 봐.”
원하는 대답을 유도하는 듯한 그들의 반응에 렌자드가 나서려 하자, 황후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단장은 이제 복귀해야 할 시간이 아닌가요? 곧 제2기사단의 훈련 시간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직은 괜찮습니다.”
“단장이 공자를 찾더군요.”
흐트러짐 없는 황후의 웃음에 렌자드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록시, 너는 언제 갈 거야?”
나는 턱에 힘을 주고 있는 렌자드의 등을 툭툭 치며 답했다.
“체드만 오라버니만 기다렸다 같이 가려고. 금방이니 걱정 말고 어서 가.”
내가 괜찮다며 슬며시 웃어 보이자, 결국 렌자드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자리를 떠났다.
“공자가 동생 걱정이 되는 모양이군요.”
황후의 웃음기 섞인 말에 나 역시 구김 없는 미소로 보답하였다.
“제 아들도 로이스터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너무 슬퍼 혹여 나쁜 생각이라도 할까 노심초사랍니다.”
목적이 명백한 그녀의 말에도,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반응했다.
“저런, 황후께서 걱정이 정말 많으시겠습니다.”
‘하.’
내게 이런 감정 소비적인 공간은 익숙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제국을 떠돌아 그런지, 격식을 따지거나 말을 돌려 하는 방식은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나는 피곤하다는 모습을 감추고 애써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탄제리크 공작이 다시 출정을 간 지도 6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어쩜, 걱정이 많겠어요. 공작이 많이 지쳤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진심으로 걱정이 된다는 듯 눈썹까지 늘이며 말하는 황후에, 나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러실 필요 없어요.”
황후가 뭐라고 도발하든 상관없었다. 크게 반응할 필요도 없었다. 민감하게 반응하여 일을 더 크게 만드는 것이 그녀가 원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아빠 얘기라면 좀 다르지.’
황실은 제국을 지키는 탄제리크의 공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견제했다.
자신들보다 더한 힘을 가지게 될까 봐.
그리고 특히 황후는 그런 탄제리크의 독주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특히 탄제리크가 주인공이 되는 것은 병적으로 기피했고.
그러나 나는 그녀가 헤이녹스를 언급한 이상,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께선 그리 나약하신 분이 아닙니다. 쉽게 지치는 분도 아니고요. 그 덕에 누구보다 뛰어난 기사가 되었다는 것은 황후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나요?”
나는 황후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그녀의 잘 다듬어진 얼굴이 잠시 굳는 듯하더니, 금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말했다.
“공녀의 말이 맞아요. 제가 공작이 많이 염려되는 나머지 지나친 걱정을 한 모양입니다. 어린 공녀가 이리도 의연한데. 저도 본받아야겠어요.”
그러곤 흥미를 잃었는지 펼치고 있던 부채를 접었다.
“곧 신관이 올 테니 기도할 준비를 해야겠어요. 공녀와 대화를 나누어 즐거웠습니다.”
황후가 그녀의 세력 몇몇과 함께 자리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의 시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곧 대신관께서 도착할 예정이니 모두 기도실로 이동해 주십시오!”
‘대신관.’
보통 황실의 일원이 사망하면, 대신관이 직접 넋을 기렸다.
‘그런데도 황제는 기도조차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난 거야?’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어떻게 이리 매정할 수 있을까.
아무리 황후와 그녀를 따르는 이들의 눈치가 보인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것쯤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겁쟁이.’
황제는 직면하기 두려워 도망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자꾸만 말을 거는 귀족들을 뿌리치고 홀로 두리번대며 복도를 걸었다.
‘그나저나 로이스터는 어디 있는 거야, 대체.’
같은 황궁 안이라면 대신관이 내 신성력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기에 원래라면 아슬론에게서 일시적인 조절을 받아야 했지만, 오늘은 내가 거절했다.
‘로이스터가 정말 내 매개가 맞는지 확인해야 했으니까.’
새어 나오는 신성력의 양이 많을수록 매개의 효과는 더 확실하게 인지될 것이다.
그래서 아슬론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은 거고.
당장 내 신성력이 무척이나 불안정한 이때에 로이스터가 나타난다면 너무나도 좋았겠지만, 그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곧 대신관이 도착한다는데.
초조해진 나머지 최대한 기도실에서 멀어지려 하염없이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걸음을 붙잡았다.
‘당장 어머니를 잃은 사람을, 매개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찾는 게 맞는 걸까.’
가족을 잃은 슬픔에 허덕일 사람을 두고 내게 이로운 존재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특히나 여태 모습을 비추지 않은 걸 보면.
‘많이 괴로운 거겠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아슬론 역시 이곳에 와 있으니 그의 도움을 받는 게 나을지 몰랐다.
꼭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나는 왔던 걸음을 옮겨 다시 복도를 따라 걸었다.
서서히 일렁이던 신성력이 갈수록 더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기도실에 있는 걸까. 아직 대신관이 도착하지 않아야 하는데.’
점점 걸음을 재촉하던 그때, 빠르게 지나치던 문 너머로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기 숨어 있나?’
나만큼이나 대신관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하는 아슬론이니 이곳에 있나 싶어 조심스레 문을 열었을 그때였다.
“……아.”
열린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찬란하고도 고고한 은발과 모든 걸 삼켜 버릴 것만 같은 적안.
바람과 함께 펄럭이는 커튼 옆에서,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 조용히 눈물을 떨어뜨리는 그는,
“로이스터 필리티움.”
버려진, 그리고 잊혀진 2황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