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나오미 후궁의 장례는 이틀 뒤에 치러졌다. 그저 신경과 몸의 쇠약이 원인이라고 했다.
그간 나와 렌자드는 당연히 만나지 못했고, 수도는 또 한 번 떠들썩해졌다.
“며칠 전에도 몸이 안 좋아 보이긴 했어.”
나는 체드만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레 부고 소식이 들려올 줄은 몰랐는데.”
물론 나오미 후궁이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다. 황실 일원 모두가 참석해야 하는 일에도 몸 상태 탓에 종종 빠지곤 했으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떠날 줄은…….’
“원래 황궁이 그래.”
체드만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죽을지조차 예상할 수 없지. 지금 당장 황후나 황제가 죽는대도 말이야.”
“오빠.”
내가 입을 조심하라는 의미로 가볍게 경고하자, 체드만은 그린 것처럼 미소 지었다.
“록시. 마차 안의 소리는 조금도 새어 나가지 않아.”
“밖에서도 말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지.”
“그런 실수는 안 해.”
‘하긴.’
체드만이 아무 데서나 쉽게 입을 열고 다니는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말수가 적다면 모를까.
“그래. 오빠가 알아서 하겠지.”
내가 걱정해야 할 만큼 체드만은 경거망동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 일로 황궁은 어떻게 변하려나.”
내가 창밖을 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건너편에 앉은 체드만이 말했다.
“애초에 표면적으론 2황자에게 외가의 힘은 없다시피 했으니 아무런 변화가 없겠지만, 개인적으로 본다면 심리적인 문제가 있겠지.”
“2황자 말이야?”
“그도 그렇고, 이번 기사 서임으로 잠시나마 2황자 쪽으로 눈을 돌렸던 다른 가문들의 입장도.”
“확실히.”
나오미 후궁의 죽음으로 2황자가 흔들린다면, 후계 구도가 변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고 기대하던 작은 세력들의 움직임도 얼어붙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게 있어서도 크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고.
“한동안 시끄럽겠네.”
‘2황자는 어떤 선택을 하려나.’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더 견고해질 것인가.
2황자의 미래는 온전히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 * *
‘없는 사람 취급했더라도 후궁은 후궁이라는 건가.’
그녀의 장례식이 준비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이틀이 다였지만, 나오미 후궁의 장례식은 결코 비어 보이지 않았다.
비록 그녀에게 지지하는 세력이나 힘을 보탤 수 있는 친정은 없었지만, 그 대신 황후와 1황자의 지지 가문들이 자리를 채웠다.
“가관이네.”
체드만이 자리를 비우게 되고 대신 곁으로 다가온 렌자드가 기분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1황자와 황후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기 위해 굽신거리는 귀족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은 사람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오빠.”
나는 그에게 목소리를 낮추라는 의미로 경고했지만, 사실은 그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무례해.’
어머니를 잃은 사람이 있고, 그런 그가 괴로워하고 있는데, 눈앞의 저 귀족들은 장례식을 일종의 비즈니스 장소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한마디로, 남의 고통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거지.’
내가 속으로 혀를 차던 찰나, 누군가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탄제리크의 공녀님, 맞으시죠……?”
조심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영애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어쩜, 탄제리크 가문의 영애를 뵙게 되다니……! 제가 이런 기회를 얻으려고 이곳에 왔나 봐요.”
‘이런 기회?’
장례식에서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어딘가 걸리는 영애의 말에 눈썹을 살짝 찡그렸지만, 이미 흥분한 그녀에게는 그런 일 따위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제가 공녀님을 무척이나 뵙고 싶었답니다. 아니, 실은 사교계에 모두가 공녀님을 궁금해했어요. 그런데 이렇게나 아름다우시다니……!”
그 귀족 영애는 조금은 가벼울 정도로 높은 톤으로 쉴 새 없이 말하며 나를 위아래로 열심히 훑었다.
“정말이지, 공작님과 꼭 닮으셨네요! 칠흑 같은 머리칼과 새파란 눈동자가 정말이지 아름다워요. 얼마 전까지 동부에서 요양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좀 어떠신가요?”
“괜찮아요.”
‘아, 제발 가 줬으면 좋겠다.’
이 영애는 목소리가 큰 것뿐만 아니라 손짓이나 몸짓 역시 커 주변의 이목을 끌었다.
‘장례식에서 이렇게 소란스럽게 굴다니.’
나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영애에게는 그런 걸 알아챌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주위에서 차마 다가서지는 못하고 힐끔거리기만 하던 영애 무리를 불러 모았다.
“영애들, 어서 이리로 와 보세요. 탄제리크 공녀님이 오셨어요!”
‘하…….’
나는 정말이지, 이 자리에서 휘발돼 버리고만 싶었다.
‘장례식장만 아니었으면 당장 뛰쳐나갔을 텐데.’
하지만 누군가를 추모하러 온 곳에서 요란스러운 퇴장을 하고 싶진 않았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는데, 무리 속 영애 몇 명이 옆에 서 있던 렌자드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공자님께서는, 공녀님을 에스코트하러 오신 건가요?”
“그런 셈이지.”
렌자드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하자, 그녀 옆에 있던 또 다른 영애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소공작께서는 이곳에 안 오셨나요?”
그녀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곁을 둘러싸고 있던 영애 몇 명이 크게 꺄르르거리며 웃었다.
“어머, 영애. 소공작님 좋아하는 티를 너무 내시는 거 아닌가요?”
‘체드만 오빠를 좋아하는구나.’
수도에 있진 않았지만 들려오는 이야기만으로도 체드만과 렌자드가 귀족 영애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수려한 외모와 훤칠한 키, 그리고 탄제리크라는 이름.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눈에 띄게 호감을 드러내는 영애들이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애써 누르고 있을 때 이어지는 말은 그 노력을 필요 없게 만들었다.
“조심하셔야죠. 아카린즈 영애께서 점찍어 둔 분인데.”
“……아카린즈라면, 플레리 아카린즈 영애를 말하는 건가요?”
“역시 공녀님께서도 플레리 아카린즈 영애는 알고 계시는군요! 하긴, 황후 폐하의 조카분이시니 누군들 모르겠어요.”
‘그 플레리 아카린즈?’
황실 연회에서 나한테 시비를 걸었던 플레리 아카린즈? 핑크에 집착하던 플레리 아카린즈? 나한테 엄마를 죽여 놓고 어떻게 멀쩡히 얼굴을 들고 다니냐던 플레리 아카린즈?
“그 영애가, 우리 오라버니를 점찍어 두었다고?”
“어머, 설마 공녀님 모르셨어요?”
소란스레 웃어 대던 영애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아카린즈 영애께서 파티에 갈 때마다 언급하셨어요. 자신이 탄제리크 공작 부인이 될 거라고요.”
“탄제리크 공작 부인……?”
누구 마음대로?
‘누가 탄제리크의 안주인이 된다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제정신인 건가?”
가만히 듣고 있던 렌자드 역시 공작 부인이라는 말에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지 그게?”
“아, 저는 공자님과 공녀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먼저 말을 꺼낸 영애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저희는 아카린즈 영애께서 너무 당연하게 말씀하시기에……. 이미 탄제리크 가문과도 이야기된 일인 줄 알았어요.”
“하.”
렌자드는 결국 황당함을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완전히 제멋대로군.”
“……동의해.”
어이가 없었다. 그간 아카린즈 가문과 탄제리크 사이에 교류는커녕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인연도 없었는데 갑자기 공작 부인이라니.
렌자드 역시 그 단어에 꽂힌 모양이었다.
“탄제리크에 새로운 공작 부인 따위는 필요 없는데.”
설령 그것이 헤이녹스나 프리실라와 관련된 것이 아닌, 차기 후계자인 체드만과 관련되어 있대도 마찬가지였다.
“가서 그 영애에게 똑똑히 전해.”
렌자드는 매서운 눈빛으로 영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함부로 입 놀리고 다니지 말라고.”
그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었다.
“책임질 자신 없으면.”
“아아…….”
조금 전만 해도 느슨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자 나와 렌자드 주위에 있던 영애들은 물론, 언제 말을 걸까 눈치를 보던 귀족들 역시 마른침만 삼켰다.
“가자, 록시. 여긴 저잣거리나 다름이 없어.”
렌자드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하.”
그리고 인적이 드문 구석에 도착하자, 그는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어이가 없군.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어!”
“일단 진정해, 오빠.”
“나 지금 이것도 엄청 참은 거야.”
“응, 나도 알아,”
그가 노력했다는 건 화를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쥐어 새하얘진 두 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는 뭐 하는 애야?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정말 낯선 사람을 대하는 듯한 렌자드의 태도에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빠 플레리 아카린즈 몰라?”
“알아야 해?”
설마 했지만 놀랍게도, 렌자드는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예전에 아빠가 훈장을 받았던 날 황궁에서 마주쳤잖아. 나한테 헛소리해서 오빠도 나섰으면서.”
“……음.”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아’ 하고 짧은소리를 내었다.
“너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던 걔 말하는 거야? 온통 핑크색으로 도배하고 있던?”
“응. 황후의 조카라며 콧대 높았던 걔 말이야. 설마 정말 기억을 못 한 거야?”
“그때 아버지께서 따로 해결할 테니 신경을 끄라고 하셨거든.”
“……아버지께서 직접?”
플레리 아카린즈가 함부로 떠든 것에 대해 헤이녹스가 경고를 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따로 조치를 더 취했다는 건 몰랐다.
“그 이후로는 마주쳐도 눈치를 보기에 완전 잊고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출정을 가시니 바로 들썩거리네.”
섬찟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말에 그 순간 나는 렌자드가 곧 사고를 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 마.”
“뭘?”
“뭐든 일단 하지 말라고. 나중에 하자, 나중에.”
“……그래.”
저렇게 수긍하는 걸 보니, 정말 무슨 일이든 벌일 생각이었나 보다.
‘미리 경고하길 잘했지.’
장례식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그것만큼 무례한 게 또 없었다.
“형이었으면 정말 제대로 밟았을 거야. 그 플러리인지 샐러리인지 말이야.”
“플레리 아카린즈.”
“이름이 뭐가 무슨 상관이야. 주제 파악을 못 한다는 게 중요하지.”
그러곤 팔짱을 끼는 렌자드에 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지만, 그의 말에 틀린 건 없었다.
‘체드만 오빠였으면 조용히 준비하다 정말 큰일을 냈을지도.’
그는 무례하거나 개념이 없고, 누군가에게 빌붙으려 하는 무능한 자를 혐오했으니까.
‘그걸 티도 안 내니 더 무섭고,’
체드만은 무엇이든 요란스레 처리하지 않았다. 확실해질 때까지 파다가, 때가 되면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리는 편이었다.
“……정말 그 자리에 있던 게 체드만 오빠가 아니라 다행이다.”
“그렇지? 형이라면 걔나 말을 옮기는 괘씸한 놈들이나 멀쩡히 두진 않았을 거야, 분명.”
아직도 화가 가시지 않은 듯 무리 지어 있는 귀족들을 노려보는 렌자드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애써 렌자드를 진정시키던 찰나, 거대한 문이 열리며 황실의 일원이 등장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와 제국의 달, 황후 폐하, 마지막으로 1황자 전하 드십니다.”
나는 딱 보아도 무척이나 공을 들인 듯 우아한 차림새의 그들을 두리번대다 말했다.
“……2황자는 어디 있지?”
그들이 등장하는 순간에,
2황자는 없었다. 어디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