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내가 모르는 새 이미 판은 시작되고 있었다. 이미 탄제리크는 황위 계승권에 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근차근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신중히.
“아빠가, 대체 언제부터?”
“네가 폭주한 이후부터였지. 밖에서 마주쳤다며.”
“그때부터였다고?”
그보다 더 전부터 알던 사이 같긴 했는데. 그럼 그 후로도 계속 교류가 있었다는 소린가? 왜?
오히려 그날 헤이녹스는 로이스터에게 적대적이었는데.
“그런데 2황자한테는 왜 관심을 가진 거지?”
“글쎄.”
체드만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뭔가를 느끼신 거겠지. 아버지는 의미 없이 시간을 쏟는 분이 아니니까.”
체드만의 말대로 헤이녹스는 쓸모없는 것에 시간을 쏟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오랜 시간 투자한 사람이라면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게 대체 뭘까.’
헤이녹스가 위험을 무릅쓰고 2황자를 지지해야만 하는 이유.
“……아빠한테 연락해야겠어. 지금은 어디쯤 계시려나?”
“글쎄. 아직 작전이 성공했다는 말이 없으니 대기 중인 거 아닐까. 북부의 경계에서.”
“드웬델 백작령?”
“아마도.”
나는 낯익은 지역명이 언급되자 미간을 찌푸렸다.
“드웬델 백작이라면 그 사람이잖아. 헴델 마을의 일을 헨튼 뱅쇼에게 떠넘겼던 사람.”
“떠넘겼다기엔, 나름대로 효율적인 방향을 추구했던 거 같긴 하지만. 어찌 됐든 실패였지.”
드웬델 백작과의 유착관계를 밝혀내지 못한 지금, 헤이녹스가 드웬델 백작령에 있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신호 같았다.
헨튼 자작을 반역 혐의로 넘긴 것도 헤이녹스였다.
더불어 그 일과 연관이 있을 거라 의심하고 5년 동안 수색한 인물의 영지에.
심지어 매개를 찾으러 북부에 들렀을 때 어렴풋이 듣기로는 그때의 드웬델 백작은 헨튼의 일을 자신이 알았더라면 가장 먼저 가스펠트에게 알렸을 거라고 오히려 화를 냈다고 하니까.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지.’
그렇게나 영악한 사람이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만약 드웬델 백작이 정말로 헨튼 뱅쇼와 관련되어 있었다면, 정말 적군에게 정보를 넘기고 제국군을 위험에 빠뜨릴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불안함에 자꾸만 손톱을 물어뜯자, 체드만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챘다.
“하지 마.”
“그렇지만 걱정되는데.”
“아버지께서 서운해하시겠다.”
그는 내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아버지께선 쉽게 방심하시는 분이 아니야. 드웬델 백작이 위험하다는 것쯤은 가장 잘 알고 계시겠지.”
체드만은 언뜻 태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를 믿어 봐. 결과가 증명할 테니까. 아버지께서 왜 제국의 검인지, 왜 제국의 2인자라 불리는지.”
나는 정말 걱정 따위는 필요도 없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이지…….’
“오빠는 아빠를 닮았어.”
“내가?”
체드만은 정말 처음 들어본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은 많이 들어 봤어도,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는데.”
“물론 그렇겠지. 오빠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어머니를 빼닮았으니까.”
파릇파릇한 여름의 생기를 담은 듯한 연두색 눈과 세상의 온갖 햇빛을 담은 것만 같은 짙은 금발.
그의 눈이 부시도록 다정한 외모는 프리실라를 꼭 빼닮았다고 하였다.
‘외모로만 따지면 내가 아빠와 꼭 닮았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성격 말이야.”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새삼 체드만은 헤이녹스와 빼닮아 있었다.
“그 단호함 같은 거. 결정할 때 머뭇거림이 없는 것도.”
“음. 내가 그랬던가?”
체드만은 잘 모르겠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정말 모르겠어?”
딱 자르는 단호함이. 그 결단력이. 쓸데없는데 자꾸만 몸집을 불려 가는 부정적인 생각을 대하는 태도가.
그리고 확신이라는 걸 할 수 있는 오만하면서도 당당한 태도가 나를 얼마나 안심시키는지도.
“……좋은 뜻이야?”
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나 오빠랑 아빠 좋아하는 거 몰라?”
“그러면 됐어. 아, 그래서 넌 2황자 언제쯤 만나고 싶어?”
멋쩍은 듯 애써 말을 돌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알면서도 속아 주기로 했다.
“가능한 빨리 만나고 싶어. 나는 그가 내 매개가 맞다고 확신하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그럼 내일 어때?”
“……내일?”
나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빠른 날짜에 눈만 깜박였다.
“부담스러우면 더 미뤄도 상관없어. 그런데 일찍 만나 보는 게 너도 더 마음 편하지 않을까?”
“그건 맞는데……. 잠깐. ‘너도’라고 했지 방금?”
내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묻자, 체드만이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사실 2황자가 너를 만나고 싶다고 했어.”
“……2황자가?”
‘로이스터가 나를 왜?’
“언제? 아니 왜?”
“이유는 네게 직접 말하고 싶다던데.”
“그런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2황자가 나와 만나고 싶다고 한 거 말이야.”
“그거야.”
체드만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함부로 너와 만나게 해 줄 수는 없잖아.”
‘아.’
“그리고 2황자가 그런 부탁을 했을 때는 네 매개라는 사실도 몰랐으니까. 너와 만날 만큼의 가치도 없었지.”
“하지만 아빠께서 투자한 사람이라면 그런 부탁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고작 그 정도로는 부족한 거 같은데. 아직 황태자가 된 것도, 후계로 확정된 것도 아니잖아.”
‘역시.’
“……오빤 아빠를 닮았어.”
“이번엔 좋은 뜻이 아닌 거 같은데.”
“좋고 나쁘고가 아니고 그냥.”
날 때부터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있는 듯 고고한 그 태도가, 지배자라는 말에 어울리는 모습이 둘에게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그냥 그렇다고.”
체드만에게는 로이스터가 2황자이든 뭐든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에게는 탄제리크가 우선이었고, 그 무엇도 더 소중한 건 없었다.
“어쨌건 그쪽에서도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니 다행이네. 만나는 것 자체가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나를 경계하진 않을 것 같고.”
“그럼 내일로 정할게. 시간은 언제가 좋아?”
“음, 점심쯤. 장소는 어떻게 하지?”
황궁에서 만나면 눈에 띌 거고, 귀족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탄제리크 저택도 마찬가지였다.
“마땅한 곳이 없는데.”
“없으면 만들면 돼.”
체드만은 커튼을 걷고 창문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수도의 마리웨셀 2번가 골목 보여?”
“응.”
그는 여러 갈래로 나뉜 골목을 짚어 주었다.
“저기에 내가 자주 가는 카페가 하나 있어. 남들 눈에 띄기 곤란한 약속일 때 이용하는 곳이야.”
“아.”
“저기에서 만나. 주인도 우리 가문 사람이니 말이 새어 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고.”
“응. 고마워.”
“이런 거 가지고 뭘.”
그러곤 체드만은 약간은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렌자드한테는 말하지 말고. 단둘이 만난다는 거 알면 근무지를 멋대로 이탈할지도 몰라. 나는 내 동생이 탈영으로 잡혀가는 거 싫으니까.”
‘확실히.’
체드만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나는 렌자드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빠도 말하지 말고.”
“물론.”
작게 미소 지은 체드만이 다시 커튼을 닫은 후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공녀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다급함에 곧바로 문을 열자, 방밖에 서 있던 앤이 언뜻 보아도 고급스러운 검은색 편지지를 내밀었다.
“황실에서 편지가 왔어요. 그런데…….”
내가 편지를 받고 열어 보는 동안 망설이던 앤은 바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의 부고예요.”
“……황실 일원의?”
“네.”
그녀의 말에 나는 황급히 편지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 그 속에 쓰여 있던 내용은.
“나오미 후궁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