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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77)화 (77/106)

<77화>

“판이 뒤집힌다.”

록시나는 아슬론, 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해서 그 말을 곱씹었다.

‘판이 뒤집힌다라…….’

그렇다면 현재의 판은 무엇인가.

지금의 판을 쥐고 흔드는 자는 누구인가.

‘황후와 아카린즈 가문. 그리고 황제의 실질적 후계인 1황자.’

탄제리크는 이 판에 관여하지 않았으니 논외였다.

‘스승님 말대로라면, 곧 신탁이 내려올 거라는 말인데.’

동시에 그 신탁이 이 제국 전체를 흔들 파급력을 가질 거란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신탁에 내가 관련이 있다면.”

그리고 로이스터가 관련이 있다면.

이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황실의 일에 탄제리크가 관련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줄을 타기 위해 치열하게 눈치 싸움을 시작할 게 뻔했고, 황제의 후계 자리를 두고 황궁에서는 암투가 벌어질 터였다.

그리고 이런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내가 있을 거고.

“……복잡하네.”

신탁이 떨어지고 나면 제국은 한바탕 떠들썩해질 것이다. 그맘때쯤이 되면 나의 신성력도 감출 수 없게 되겠지.

모든 것이 정신없을 거고, 나를 지키기에 급급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전에,

‘신전의 비밀을 알아내야 해.’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국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도 신전은 방문할 수 없었다. 혹여라도 나의 신성력을 알아챌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는 나를 안정시킬 수 있는 존재를 찾았기에 신전 방문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로이스터가 동의만 한다면 말이야.’

신탁이 내려오기 전에 신전의 비밀을 알아내려면 매개와의 접촉을 더는 미룰 수 없다. 가능한 빨리.

“2황자를 어떻게 만나야 하지.”

기사 서임식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더는 요양 중인 공녀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를 가장 마지막에 들른 거기도 하고.

이제부터는 내 움직임 하나하나가 정치적인 행보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만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가급적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몰래 접촉할 만한 방법이 없나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찰나,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록시, 나야.”

“아.”

나는 전보다 더 굵어진 목소리에도 문밖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체드만 오빠.”

“반가워, 록시.”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성숙해졌지만 그의 미소는 여전했다.

“보고 싶었어.”

“나도.”

헤이녹스가 출정을 하고 체드만은 다시 가주 대리직을 맡았다.

그 자리를 처음 맡았던 13살 때와는 달리 그는 아주 능숙한 모습으로 가문을 이끌고 있었다.

“수도의 중앙 귀족들과 약속이 있다더니.”

가주 대리를 맡고 나서, 체드만은 계속 수도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이는 후계 수업과 연관되어 미래 인맥과 함께 정세를 알아보기 위함인 것 같았다.

내가 도착하는 날에도 귀족들과 선약이 있어 늦을 거라는 얘기가 있었기에 오늘은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

“그렇구나.”

“수도에는 얼마나 있을 거야? 금방 또 다른 지역으로 가 봐야 하지?”

“아니.”

그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 당분간은 수도에 머물러야 할 거 같아.”

“왜? 설마, 여기에서 매개를 찾은 거야?”

그가 놀라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사 서임식에서.”

“아, 정말 다행이다.”

그는 진심으로 안심한 사람처럼 보였다.

“서임식에서 만났다니.”

“보자마자 알 수밖에 없었어. 아, 이 사람이구나.”

“매개가 사람이었구나. 그게 누군데?”

나는 체드만에게 말하기 전, 잠시 동안 고민했다.

만약 2황자가 내 매개라는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가주 대리로서 누구보다 정세 파악에 신중하고 빠른 그가, 과연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살기 위해서는 2황자와 손을 잡아야 하고, 그러려면 지금 이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아도 이것저것 신경 쓸 것이 많은 그에게 골치 아픈 고민거리를 더 주고 싶진 않았다.

“록시?”

내가 말을 하다만 게 의아했는지, 체드만이 다시 물어왔다.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

조심스럽게 말하는 그의 눈을 보고 있자니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문의 행보가 달라질지도 모르는 일을 현재 가주인 그가 몰라선 안 됐다.

입술만 깨물던 나는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매개가, 2황자야.”

“2황자? 로이스터 필리티움 말하는 거야?”

“응.”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체드만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어서.

“미안. 나도 왜 하필 2황자인지는 모르겠어. 그냥, 그냥, 나도 금방 안정되면 가문을 돕고 싶었는데. 더 곤란하게만 했네. 미안해.”

“록시.”

그러자 체드만은 움츠러든 내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뭐가 미안해?”

“……어?”

뜻밖의 대답에 눈을 뜨고 고개를 들자, 체드만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10년 넘게 찾던 매개를 만난 거야. 그러면 이제 너는 아프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그렇지만이 아니야.”

그는 흔들리는 내 동공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난 그거면 돼. 네가 괜찮은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아…….”

“기쁜 날에 왜 미안하다고 해. 나는 네가 우리랑 오래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한데.”

체드만은 진심으로 근심 따위 없는 사람처럼 활짝 웃었다.

“축하해, 록시. 고생 많았어.”

“……응.”

왜 하필 로이스터인지, 왜 그는 2황자인 건지, 도대체 왜 하필 발현된 게 나며, 나를 안정시킬 매개라는 게 사람이어야만 했는지.

그런 생각이 나를 더 외롭고, 힘겹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매개를 찾아 제국을 떠돌면서, 이것만큼 더 힘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찾기만 하면, 그게 뭐든 기쁠 거라고, 투정 같은 거 부리지 않을 거라고, 진심으로 행복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찾으니까, 마음 놓고 좋아할 수가 없어.’

자꾸만 걸려. 이건 어떻게 하지, 이건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도저히 머릿속이 잠잠해질 않아서.

사실은 누군가 괜찮다고, 그런 거 신경 쓰지 말라고, 너는 그냥 기뻐만 하라고.

말뿐이라도, 그렇게 해 주길 바랐는데.

“고마워.”

그렇게 말해 줘서. 괜찮다고, 축하한다고 이야기해 줘서.

누구도 탓하지 않아 줘서.

나는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의 옆에서 체드만은 묵묵히 기다려 주었고.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술렁이던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2황자를 만나 보려고 해.”

“그렇게 해. 제대로 확인이 필요할 테니까. 대신 조용히 만나야 하는 거고.”

‘조용히라…….’

애초에 탄제리크가 황실 일원을 만나는데 그게 가능할까?

그런 내 의문을 읽었는지, 체드만은 소리 내며 웃었다.

“록시. 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절대 무시한 건 아닌데, 쉽지는 않겠다 싶어서. 2황자도 무척이나 경계할 거고.”

“글쎄.”

체드만은 무척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이번 서임식 때 2황자도 왔지? 차기 정식 기사로서.”

“응.”

‘그러고 보니, 어릴 때도 그렇게나 견제가 심했던 황궁에서 검술은 어떻게 배운 거지?’

“2황자를 훈련시킨 게 아버지야.”

“어……?”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묻자, 체드만이 재차 말했다.

“2황자를 훈련시킨 게 아버지라고. 지금껏 몰래.”

“……왜?”

대체 2황자를 왜? 탄제리크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는 거 아니었나?

‘가만히 있으면 황후의 견제도 받지 않고, 황위 계승 문제에도 휘말리지 않을 텐데, 대체 왜…….’

“아버지께선 1황자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시거든. 아주 어릴 때부터 받아 온 수업 역시 여전히 소화해 내지 못하고, 검술 또한 재능이 없으니까.”

‘그랬던가?’

나는 1황자를 만나 본 적이 없어 잘 모르지만, 황후의 욕심만큼 해내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황위 계승자를 바꿀 생각까지 하고 계셨다니.’

“무능한 자가 왕관을 쓰면 무너질 수밖에 없어. 그리고 아버지께선.”

체드만은 나를 흔들림 없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걸 가만히 두고만 보실 분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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