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2황자? 그 후궁 소생의 로이스터 필리티움이라고?”
“응.”
렌자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하’, 하며 머리를 넘겼다.
“말도 안 돼. 네 매개가 2황자라니……. 확실해? 정말 확실한 거 맞아?”
그가 믿을 수 없는 것도, 아니 어쩌면 믿지 않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로이스터는 말 그대로 버림받은 황자니까.’
그는 완벽한 핏줄과 배경을 타고난 1황자와는 대비되는 인물이었다. 로이스터는 늘 1황자보다 부족해야 하며, 완벽한 아래여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 로이스터가 내 매개라면.’
이건 단순히 친구나 다른 친밀한 관계라고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제국의 기둥이자 2인자인 탄제리크 가문의 적녀였고, 그런 나와 그가 가까워진다는 것은 가문의 결합, 즉 그를 지지한다는 것과 같은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축하할 일은 맞는데…….”
렌자드는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한 듯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왜 하필 2황자야.”
‘그러게.’
왜 하필 2황자인 걸까.
나와 그는 어렸을 때 두어 번 만난 것 외에는 특별한 기억조차 없는데, 왜 내가 살기 위해서 로이스터라는 존재가 필요할까. 하고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머릿속이 어지러운 건 렌자드뿐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복잡한 건 마찬가지였다.
“정말 확실한 거지? 사람들이 많아서 착각했을 가능성은 정말 없는 거지?”
“그럴 리 없어.”
로이스터가 단상 위로 등장한 순간 느껴졌으니까. 나를 어지럽게 둘러싸고 있던 신성력의 흐름이 바뀌는 게.
“나도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어. 애초에 매개라는 게 어떤 기준으로 선정되는 건지도.”
‘대체 매개라는 건 어떻게 결정되는 거야.’
나와 가까운 사람도, 친밀한 사람도, 특별한 무언가를 나눈 사람도 아니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대상이 평민이나 권세 약한 귀족가도 아닌 비운의 2황자라는 것이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매개를 찾은 이상 당장에라도 곁에 둬야 하는데, 막상 그러자니 의도치 않게 너무도 정치적인 행보가 되어 버리는 상황이었다.
‘내가 탄제리크에 피해를 주면 어떡하지.’
혹여 황후와 황후 출신 가문이 탄제리크를 견제하면,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이 공작가로부터 모두 등을 돌리면.
‘그러면 정말 원작처럼…….’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공작가의 위세는 사라지고, 기울어 가고, 남는 것은 황후에게 비참하도록 비는 것뿐인데.
‘그렇게 되는 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싫어.’
탄제리크를 우습게 보이도록 둘 생각은 없었다.
이토록 좋은 사람이 많은 공작가인데, 견제한다는 이유만으로 감히 탄제리크를 함부로 깎아내리는 모습은 보기가 싫어서.
‘그런데 도움이 되진 못할망정 방해가 된다면, 차라리 내가…….’
입술을 세게 짓씹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 애써 방법을 찾고 있던 찰나, 렌자드가 가볍게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자책하지 마.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단 거 알잖아.”
“……그건 나도 알지만,”
“됐어, 그럼. 나는 우선 네가 매개를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니까.”
렌자드는 전보다 가벼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놀라서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 록시나, 방법을 찾아서 축하해. 앞으로는 우리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겠다. 그렇지?”
“……응.”
렌자드의 말대로, 매개를 찾은 것은 기쁜 일이다. 10년을 넘게 헤매다가 드디어 찾았는데 어떻게 반갑지 않을까.
그런데도 상대가 로이스터라는 사실에 속이 시끄러웠다. 왜 하필 2황자냐고. 그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지만, 왜인지 불편했다.
‘결국 잘못한 건 아무도 없었지만.’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황실과 탄제리크의 이해관계를 고려하기보단 있는 그대로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더 오랫동안 살 수 있다는 거, 폭주의 위험은 벗어났다는 거.’
복잡한 일은 조금 뒤에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오빠 말대로 당분간은 기뻐할게.”
나는 걱정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의 렌자드를 보며 애써 미소 지었다.
* * *
렌자드가 그의 기사단으로 복귀하고, 나는 앤이 기다리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공녀님.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누군가 나를 불러 잡지만 않았더라면.
‘하아…….’
그러잖아도 머리가 복잡해 얼른 저택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는데.
‘하필 오늘 부를 건 또 뭐야.’
나는 속으로 애써 깊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알겠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와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단상 위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황제와 황후를 향해 부드럽게 인사했다.
황제는 물 흐르듯 연결되는 동작을 보며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호오. 공녀는 오랫동안 동부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예, 맞습니다,”
“테리온즈 후작 부인이 뛰어난 예법 선생을 붙여 준 모양이군.”
“과찬이십니다.”
“공녀는 겸손하기까지 하구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땐 꽤 당돌한 모습도 있었던 거 같은데 말이야.”
“……저도 곧 있으면 성인이 아닙니까.”
솔직하게, 나와 만난 적이 두 번밖에 없는 황제에게 뭘 아는 척하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아 애써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공녀는 이제부터 수도로 올라올 생각인가?”
“……아직 고민 중입니다.”
‘매개가 수도에 있는 이상 멀어질 필요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수도는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기에 그만큼 많은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것이 아프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동부로 요양을 가 있던 탄제리크의 막내라면 더더욱.
‘황후가 함께 앉아 있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겠지.’
황제가 혼자 호출을 했음에도 황후가 함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일 것이다.
‘황후가 함께 만나고 싶다 한 거겠지.’
오랫동안 수도를 떠나 있었던, 대가문의 순진한 막내.
그녀에게 나는 이용하기 딱 좋은 먹잇감일 터였다.
“공녀는 사교계 데뷔 경험이 없지요?”
“예, 제 몸이 허약하여 미처 데뷔하지 못했습니다.”
“어쩜……. 이제 와서 또래 귀족 영애들과 가까워지기는 어려울 텐데요.”
예상대로, 황후는 걱정하는 것처럼 나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수도로 올라온다면, 제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황후는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겠어요, 공녀?”
* * *
“서임식은 어땠어. 불편하지는 않던가?”
아슬론의 질문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많은 데 간 게 오랜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무슨 일은 없었어?”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아슬론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요.”
“흐름이 변했는데. 네 신성력.”
“정말 흐름이 많이 바뀌었어요?”
“배치부터가 다르잖아.”
아슬론은 내 심장 근처에 있던 신성력 중 일부를 골라 내게 보여 주었다.
“여기, 보이지? 원래는 심장 근처가 엉켜 있어서 아팠던 건데, 지금은 실타래처럼 풀려 있잖아.”
“아…….”
“이렇게까지 변한 거라면 답은 하나밖에 없지.”
아슬론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너, 매개 찾았구나.”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나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스승님은 못 속이네요.”
“속일 생각을 했어?”
“음. 아주 잠깐?”
나는 내 신성력을 멈추었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했다.
“기사 서임식에서 찾았어요. 제 매개.”
“귀족 중 하나인 모양이네.”
아슬론은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수도도 와 볼 걸 그랬구나. 저번에 공작가 둘째 도련님 서임식 때 왔으면 더 빨리 찾았을 수도 있을 텐데.”
“글쎄요…….”
‘로이스터가 기사가 된 건 이번 서임식부터니까.’
물론 지난 서임식에도 황자로서 참석하긴 했겠지만, 어쩐지 그때 보았다면 내 신성력이 안정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이긴 해요. 2황자니까요.”
내 말에 아슬론이 놀란 듯 눈이 커졌다.
그리고 이내 상황을 파악한 듯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를 보며 여전히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왜 2황자일까요.”
우선 매개는 찾아서 다행이지만, 왜 로이스터여야만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그러자 아슬론은 주변의 신성력을 갈무리시키며 말했다.
“매개는 늘 신탁과 관련 있지.”
“신탁이요?”
“그래. 신의 목소리와는 다른, 절대적인 무언가라고 해야 할까.”
‘절대적인 무언가라…….’
“그런데 지금은 내려온 신탁이 없잖아요.”
“맞아. 현재는 신탁이 없지. 그런데 네가 매개를 찾았고,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2황자라면.”
그건 충분한 명분이 된다.
“판이 뒤집힐 거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