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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 신성력이라니요 (75)화 (75/106)

<75화>

“-이들은 현직 기사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실력을 가졌다. 이 사실이 입증된바, 오늘부로 정식 기사로 임명하는 바이다.”

대리인이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 루엔트 제국을 위해 싸울 용맹한 기사들이 이토록 많다니 짐 역시 벅차는군. 더구나 이들 중에는 짐의 아들인 2황자 역시 포함되어 있어 기대되는 바가 크네.”

그는 완벽한 자세로 꼿꼿하게 서 늠름함을 보이는 로이스터를 자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앞으로 그대들이 보일 기사도가 제국과 필리티움 황가를 눈부시게 빛내기를 바라겠네.”

그리고 그가 천장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

“황제 폐하 만세! 필리티움 만세!!”

“황실을 위하여, 대 루엔트 제국을 위하여!!”

임명을 마친 기사들이 검을 높게 쳐들고 황실에 대한 충성을 외치는 중에도, 로이스터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알아보기라도 한 건가.’

설마.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10년도 더 전인데.

‘아주 잠깐이었을 뿐이잖아.’

어떻게 그걸 기억하겠어.

로이스터가 나를 알아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서로를 기억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추억하기에는 그리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지금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마도 내가 수도에선 보지 못한 낯선 인물이거나, 유독 짙은 흑발에 눈길이 간 것뿐일 거다.

나와 로이스터의 만남은 아주 찰나였고, 조금 특이했지만 특별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다가가야 하지.’

그럼에도 로이스터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나를 지난 몇 년간 지겹도록 괴롭히던 뻐근함이 가시자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확인해야겠어.’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로이스터가 맞는지.

나에게는 생존이 우선이었고,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천천히 다가가야겠어.’

우선은 로이스터와 단둘이 만날 시간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 * *

“록시!”

서임식이 끝나자마자, 렌자드는 제2기사단원들을 본 기지로 복귀시킨 후 서둘러 동생을 찾으러 나왔다.

그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고고히 솟아 당연 눈에 띄는 나를 단번에 발견했다.

“정말 와 줬구나.”

“온다고 했잖아.”

“저번처럼 못 올 줄 알았어. 너는 늘 바쁘니까.”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오빠만 할까.”

실제로 렌자드는 많이 바빴다.

그는 제2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칭호를 괜히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이곳저곳에서 활약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제국에 속한 모든 기사들이 참가하는 경기에서 최종 우승을 하며 기사로서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주었고, 황실 직속 기사단인 제1기사단 대신 제국 내에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도맡아 해결하고 있기도 했다.

“편지도 못 할 만큼 바빴다며.”

“얼마 전까지는 그랬지. 그래도 네 편지 답장할 정도는 돼.”

렌자드는 전보다 더 성숙해진 록시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정말 성인이 다 됐네. 너무 빨리 자랐다.”

“새삼스레 뭘. 나는 그러는 오빠가 더 낯설다. 이렇게 키가 크고 우락부락해질 줄은 몰랐는데.”

내가 장난스레 한 말에도 렌자드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낯설어? 이 근육 때문에 그런가? 키는 어쩔 수 없지만 네가 싫다면 이런 근육 따위 당장 빼 버릴 수도 있는데.”

금방이라도 몸을 반으로 만들어 버릴 기세에 나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오빠, 진정해. 검을 드는 부단장이 이 정도 근육 하나 없어서 무슨 사람을 지킨다고 그래.”

‘하여간 극단적이라니까.’

하지만 조금 유난스러울 정도로 한결같은 그의 태도에 나는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해졌다.

“외모만 빼면 비슷한 거 같아. 오빠는.”

“좋다는 거지?”

“물론.”

나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렌자드는 안심한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했거든. 네가 나를 낯설어할까 봐. 우리 어색해지면 어떡하지, 하고.”

“오빠는? 오빠는 나 안 어색해? 우리 거의 5년 만에 보는 거잖아.”

헤이녹스가 출정을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부에서 모여 함께 그를 배웅했던 것이 렌자드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때의 나는 엄청나게 어렸던 것 같은데, 지금 보면 좀 낯설지 않아? 원래 알던 모습도 아닌 거 같고.”

“전혀.”

나의 물음에도 렌자드는 대쪽 같은 단호함으로 말했다.

“난 네가 변한 모습을 지금이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너는 너무 빨리 앞서가니까 내가 따라가기 버거울 때가 있었거든.”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야기였는데, 그는 이번만큼은 중간에 멈추지 않고, 꾸준히 말을 이어 갔다.

“게다가 막상 네 모습을 보니 예전하고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칭찬이지?”

“물론. 어렸을 때부터 너는 남들과는 다르게 좀 어른스러운 면이 있었잖아. 그래서인지 너는 오히려 지금의 모습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아.”

“그때는 싫었고?”

“그런 건 아니지만 뭐랄까, 여유가 없어 보였다고 해야 하나?”

렌자드는 과거를 떠올리듯 팔짱을 낀 채 눈동자를 굴렸다.

“늘 신경이 곤두서 있고, 불안해하는 거 같았어. 언젠가는 너한테 같이 산책이나 가자고 말을 걸려고 했는데, 네가 금방이라도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 다가가지 못한 적도 있고.”

“……내가 그랬다고?”

‘그 정도로 티를 냈다고? 렌자드도 눈치챌 만큼?’

나는 나름대로 잘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응. 그래서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것도 있지. 툭하면 사라질 거 같아서. 그런데 지금은.”

그는 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전보다 더 차분해 보여. 사실은 매개 때문이라도 지금이 더 조급해야 하는 게 맞는 건데도. 그래서 나는 지금의 네가 보기 좋다.”

“…….”

렌자드는 내 생각보다도 더 오랫동안 나를 관찰했던 모양이다.

‘맨날 놀리기만 하고 장난쳐서 몰랐는데.’

생각 외로 눈치도 빠르고.

사실 나만큼이나 많이 변한 건 그였다.

처음 봤을 때 드러낸 날것의 증오라는 감정이 아직도 선명한데, 그런 그에게서 이러한 애정과 신중함이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앞으로는 또 얼마나 변하게 될까.

나를 어떻게 부르고, 또 지금의 나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그때의 렌자드는 현재의 나를 뭐라고 정의 내릴지 궁금했다.

‘……역시 무리해서라도 로이스터를 만나야겠어.’

그가 나의 매개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만약 그가 정말 나의 매개라면,’

나의 이 지긋지긋한 통증도, 미래를 향한 막연한 불안도 전부 거둬 갈 수 있을 텐데.

“오빠.”

확실하지 않은 것은 입 밖에 내는 편이 아니었다.

언제든 일은 어그러질 수 있고, 그런 상황에서 입을 열면 누구든 상처받을 것이 당연했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입을 열었다.

“나 매개를 찾은 거 같아.”

“……뭐?”

렌자드는 나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뭘 찾았다고?”

“매개를 찾은 거 같다고. 아니, 찾았어. 확실해. 나의 모든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말도 안 돼.”

렌자드는 나보다도 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10년이 넘도록 찾지 못하던 매개를 찾았다고? 대체 어디에서?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거래?”

“숨어 있었던 거 아니야. 내가 놓친 거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까 봐 수도로의 발걸음을 끊은 게 문제였다.

지난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수도에 왔었더라면, 하다못해 황실 주최의 건국 기념일이라도 왔었더라면 이렇게 오래도록 떠도는 일은 없었을 텐데.

“대체 그게 뭔데? 너를 이렇게 오래 힘들게 한 게 뭐야? 식물? 동물? 아니면 설마, 사람이라도 돼?”

“사람이야.”

나의 대답에 렌자드는 당장이라도 그 사람을 찢어 죽일 듯한 기세로 말했다.

“그 자식 어딨어. 그동안 뭘 하고 다녔길래 너를 그토록 고생시킨 거야? 대체 누구야!”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 오빠도 잘 알잖아.”

렌자드가 저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10년이 넘도록 떨어져 지내야 했고, 나는 심장을 죄는 고통에 매일같이 진통제를 먹어야 했으며, 폭주의 기미가 보이는 순간에는 아슬론의 신성력을 주입해 강제로 기절하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런 나의 고통과, 지나온 노력, 그리고 허탈함, 괴로움.

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그였기에 렌자드의 분노에 진정하라고 말할 생각도 없었다.

‘그럼에도 엇나가지는 않게 해야지.’

혹여 그가 매개의 정체를 알고 난 뒤라도, 나 때문에 누군가에게 보복하는 일은 있어선 안 될 테니까.

“……그래. 그 사람도 몰랐겠지. 본인이 네 매개라는 사실을.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어, 미안.”

“아니야. 나도 누구인지 알고 난 후에, 무척이나 허탈했으니까.”

렌자드는 잠시 눈을 꼭 감은 채 호흡을 가다듬은 후, 이내 나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그래서, 그 매개가 누구야?”

지난 몇 년 동안 널 고생시킨 사람이, 대체 누구야.

그의 질문에 나는 기사 서임식 당시, 단상 위에 서 있던, 눈부시게 찬란하던 은발의 기사를 떠올렸다.

“로이스터 필리티움.”

버림받았으나 이제는 기사가 된, 비운의 주인공.

“필리티움 황가의 2황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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