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기사 서임식을 시작하지.”
“와아아!!”
황제의 공식적인 말과 함께 기사 서임식이 시작되었다.
“이번 서임식부터 정식 기사가 될 분을 호명하겠습니다. 미틀 남작가의 스웬 미틀, 후온 자작가의 후온 휘센…….”
황제 대리인은 기사로 서임될 이들의 이름을 작위가 낮은 순서부터 차례로 호명했다.
“무헬 자작가의 트시옴 무헬과 룸시르딘 백작가의 리셀 룸시르딘은 앞으로…….”
‘록시는 어딨지?’
5년 전, 헤이녹스가 출정한 이후 기사로 서임된 렌자드는, 이번 서임식에 제2기사단의 부단장으로서 참석했다.
‘내가 서임된 날에는 못 왔으니 오늘은 꼭 온다고 했는데.’
체드만으로부터 록시나가 참석할 수 있을 거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터라, 언제쯤 온다는 건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혹시 이번에도 못 오나?’
백작가를 지나 후작가의 기사 이름을 호명할 때까지 록시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렌자드는 어느 정도 마음을 내려놓았다.
‘많이 바쁜 모양이네.’
아직 매개를 찾지 못해 조급해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편지라도 남겨 주지.’
렌자드가 문득 드는 서운함에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거대한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입장했다.
이미 서임식이 시작된 터라 시종이 직접 이름을 부르며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등장만으로도 사람들을 이목을 집중시켰다.
“……저 여인은 누구죠?”
“……어머.”
그들은 소녀의 꼿꼿한 자세와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신비로운 미모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수도에서 보지는 못한 것 같은데…….”
“무척이나 아름답군요.”
자작가나 공작가 할 것 없이 모든 귀족이 새로이 등장한 소녀에 대해 조용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런 귀족이 있었다는 걸 왜 여태 몰랐을까요.”
“혹시 저 멀리 지방의 하급 귀족이라 못 봤을지도 모르지.”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는 외모를 가진 탓에 귀족들은 그 소녀를 두고 열심히 추측했다.
“그렇지. 수도 태생이 아니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 아니겠소.”
“확실히 잊을 수가 없는 외모이긴 하지요. 지방 출신인 점이 조금 아쉽군요.”
“아니요.”
그 소녀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 거의 기정사실화되어 가던 그때, 가만히 소녀를 바라보던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저분은 그런 낮은 신분이 아니에요.”
그가 멍한 얼굴로 소녀를 보며 중얼거리자, 소녀의 정체가 궁금해진 귀족이 그를 닦달했다.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이오?”
“뭐 엄청나게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그는 여전히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밤하늘처럼 아득한 저 머리색과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
그의 말에 곁에 있던 귀족들 역시 하나둘 눈치를 챈 듯 입을 벌렸다.
“……네 살 이후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은.”
서부의 영원한 지배자이자 제국의 검, 방패, 제국의 실질적 지도자, 전쟁의 영웅.
헤이녹스 탄제리크의 마지막 자식이자 유일한 딸.
“록시나 탄제리크.”
렌자드는 뒤늦게 등장한 소녀의 정체가 록시나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진짜 왔구나.”
약속을 지켰어.
하긴, 예전부터 록시나는 한다면 하는 성격이었다. 한 번 입 밖으로 내뱉은 건 지키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단상 위에 흐트러짐 없이 서 있던 렌자드는 록시나가 서 있는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침,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렌자드를 찾고 있던 록시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록시나와 렌자드는 서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쳤다.
‘오랜만이야.’
하나뿐인 내 동생 록시.
* * *
서임식에 오는 길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우선 나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어렸을 때 동부로 떠나고, 그 이후로는 사교계에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은 채 매개만 찾으러 다녔던 터라, 수도에는 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의상실에서 마땅한 옷을 구하는 것은 돈으로 어찌어찌 잘 해결이 되었다 해도, 입궁하는 것이 문제였다.
헤이녹스는 현재 출정 중인 터라 나의 신분을 대변해 줄 수 없었고, 렌자드는 이미 기사 서임식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다.
‘체드만 오빠는 지금 바쁠 테니 고작 입궁 문제로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게다가 대리긴 하나 탄제리크의 가주인 체드만에게 입궁을 도와 달라고 하면, 그때부터 나의 행보는 공식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더더욱 부탁할 수 없었다.
‘벌써 오빠가 연락을 해 두었을 줄은 몰랐지만.’
내 생각을 훤히 읽기라도 한 듯, 체드만은 이미 황실에 언질을 해 둔 상태였다. 물론 나에 대한 이야기는 최대한 나오지 않도록 섬세한 배려도 해 놨다.
‘집중받지 않으려고 일부러 서임식에도 늦게 도착했건만.’
이렇게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다.
‘끝나고 올 걸 그랬나.’
오랜만에 많은 인파 속에 섞여서 온갖 관심과 집중을 받자니, 급격하게 피곤해짐이 느껴졌다.
‘그냥 수도의 저택에서 봐도 됐을 텐데.’
렌자드가 굳이 서임식 장소에서 봐야 한다기에 불편함을 무릅쓰고 왔더니.
‘제복 입은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건가.’
렌자드는 가슴팍에 제2기사단을 상징하는 붉은 배지와 부단장임을 보여 주는 훈장 여러 개를 달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새삼, 많이 변했네.’
렌자드의 얼굴에는 여전히 어렸을 때의 장난기 역시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짓궂은 인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키도 많이 자랐고.’
서로를 보지 못한 지난 몇 년 사이, 렌자드의 외모는 무척이나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어린아이 같은 유약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키는 훌쩍 자라 180센티미터가 훨씬 넘었고, 꾸준히 훈련한 탓에 몸도 다부져 누가 보아도 기사라 할 만했다.
‘하긴, 성인이니까.’
그가 몇 년 전 이미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텔리던 후작가의 세스턴 이텔리던과 마지막으로…….”
황제 대리인이 마지막으로 호명될 인물을 부르는 순간, 나는 아주 잠시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필리티움 황가의 로이스터 필리티움입니다.”
‘2황자.’
로이스터가 단상 위로 등장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기함했다.
그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분위기와 그를 감싸고 넘실대는 위압감에.
어느새 훌쩍 자라 장성한 기사가 되어 버린 로이스터에게서는 감히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움이 보였다.
단상 위로 올라간 로이스터와 호명된 기사들은 서임을 위해 모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로이스터 필리티움이라니.”
“그 버림받은 2황자가 대체 언제부터 훈련했던 거죠?”
“정식 기사가 될 정도라면 실력도 꽤 좋은 모양인데요. 이렇게 되면 1황자께서도 견제를 하실 수밖에…….”
“말조심하게. 그래 봐야 정식 기사일 뿐이야. 진짜 실력은 보지 않고는 모르지. 황제 폐하께서 그래도 핏줄이라고 좀 봐준 건지 누가 아나?”
귀족들의 반응은 딱 둘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로이스터의 잠재적 가능성을 보고 그에게 투자할지 말지 간 보는 무리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래 봐야 천출에 버려진 2황자라며 무시하는 이들이었다.
‘역시 아직은 후자가 더 많네.’
로이스터의 실력이 나빴다면 제아무리 황제라도 정식 기사를 시켜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로이스터는 2황자. 든든한 뒷배를 가진 황후와 그녀의 후광을 받는 1황자에 비하기엔 부족함이 터무니없이 많았다.
‘출신이 발목을 잡을 테고.’
게다가 로이스터의 친모는 귀족도 아니었다. 떠돌이 무녀.
제대로 된 가족도, 직업도, 확실한 신분도 없는 그녀였기에 귀족들이 선뜻 로이스터를 지지하기엔 걸리는 점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후궁이 쓰러지기까지 했다고 했었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몸에는 한계가 찾아와 호흡하는 것조차 불안할 정도라고 했다.
‘지금 낯빛도 별로 좋지 않아 보이고.’
황제 옆에 앉은 나오미 후궁은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기특한 듯 미소를 짓고 있기는 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핏기가 없었다.
문득 그녀에게 안쓰러움을 느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였다.
먼 곳에서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 눈빛이 느껴졌다.
‘누가 나를 쳐다보는 거지.’
사실 이 공간에 있는 모두가 록시나에 대해 궁금해했고, 동시에 말을 걸고 싶어 했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나 열렬한 눈빛이라니.’
나는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로이스터.’
그가 이번 서임식부터 정식 기사가 될 거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놀란 것은 그가 버려진 황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경쟁자들을 꺾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미 버림받아 어디선가 방치되었다가 초라한 끝을 맞이하게 될 거라 예상했던 그가 이리 화려하게 등장해서도 아니었다.
‘……해방감.’
나는 그의 서늘함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꼈다.
아슬론이 줄곧 말했던 매개.
그리고 그 매개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안정감.
나의 심장을 짓누르며 호흡을 방해했던 고통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래서 훈련시켰던 건가. 스승님은.’
매개를 찾지도 못한 채, 돌아다니기만 해도 아까운 시간이었는데도 매일같이 신성력을 다루는 훈련을 시킨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건 귀찮기만 한 겉치레나 비효율적이고 꽉 막힌 절차가 아니었다.
나를 지켜 줄, 그리고 내가 지켜 줄 매개를 단번에 알아보기 위한 노력.
그 반복의 결실이 처음으로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찾았다.”
나의 매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