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 * *
[렌자드는 이번 서임식 때 너 볼 생각에 벌써 들떠 있더라. 그때는 올 수 있지?
너는 지금 남부에 있다고 들었어. 거기에서는 너랑 맞는 매개를 꼭 찾았으면 좋겠다. 혹시 없더라도 너무 실망하지는 말고.
곧 만나자. 안녕.]
[안녕, 오빠. 오랜만에 답장하는 거 같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어.
남부는 생각보다 더 활기차. 사람들도 많이 돌아다니고, 표정도 밝아서 어렸을 때 동부에서 갔던 시장이 생각난다. 정말 즐거웠는데.
기사 서임식은 아슬아슬하게 갈 수 있을 거 같아. 아직 매개를 찾지 못했거든.
둘 다 잘 지내고 있지? 나도 곧 있으면 같이 만나게 될 생각에 기대된다. 그때 보자. 안녕.]
나는 체드만에게 답장한 편지를 접은 뒤 봉투에 넣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남부에서 머문 지는 한 달째, 서부를 떠나 제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건 11년째였다.
“생일 지나고 얼마 안 돼서 떠났으니까…….”
“수도로 올라가는 건 이번이 세 번째인가요?”
머리를 손질하는 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은데. 황궁에 간 건 아버지께서 훈장을 받으실 때와 황실 도서관에 갔을 때뿐이니까.”
그러자 앤이 신난다는 듯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십 년 만에 수도에 가시는 거잖아요. 기대되지 않으세요? 얼마나 바뀌었을지.”
앤은 내가 아슬론과 동부를 떠나기로 한 후 헤이녹스가 부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내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도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건 앤 덕분이었지.’
내가 조금이라도 낯설어하거나 낯을 가릴 때면 앤이 나서서 많이 도와주었으니까.
신성력으로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앤은 내가 매개를 찾아 돌아다니면서도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자주 수도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 혹시 그 소식 들으셨어요?”
“어떤?”
“2황자께서 이번 기사 서임식에 참석할 거라는 이야기요.”
“황실의 일원으로서 당연한 게 아닌가?”
“아뇨, 이번엔 좀 달라요.”
앤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들떠 말했다.
“기사로서 참석한대요. 황자가 아니고요.”
“기사로서?”
“네. 이번 서임식에서 정식 기사 임명을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로이스터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 오랜만이었다. 처음 동부를 떠나고 난 후 한두 번 말고는 거의 소식이 들려온 적 없었으니까.
‘여전히 황제에게 잊혀져 있으려나 했는데.’
기사 서임식이라니.
‘그동안 검술 훈련을 열심히 한 모양이네.’
어렸을 적, 수도 한복판에서 로이스터를 마주쳤을 때만 해도 그에 대한 걱정에 나도 모르게 폭주해 버렸다지만, 10년이 더 지난 지금은 달랐다.
잘 살고 있다면 다행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안쓰러운.
딱 그 정도.
‘내 마음이 조급해서일 수도 있겠지.’
서부를 떠나 온 제국을 돌아다닌 지도 벌써 11년이었다.
그동안 매개는커녕, 나에게 맞는 환경이나 식물조차 찾지 못했다.
“하…….”
순간 드는 아득함에 푹 한숨을 내쉬자, 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매개 때문에 신경 쓰여서 그러세요?”
“음, 조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곧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훈련도 많이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동안 나는 아슬론 윈터쳇과 수없이 많은 훈련을 했다.
언제라도 나와 맞는 매개가 나타나면 바로 알아챌 수 있도록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다 소용없었지만.’
나는 조금 울적해지려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스승님은?”
“잠깐 연락할 곳이 있어서 통신석 앞에 계세요.”
“그렇구나.”
“오늘 밤에 바로 출발하실 거죠?”
“응. 간단한 짐만 챙기고 바로 가자.”
똑똑-
“록시나, 나와 봐.”
방문을 열자, 문 앞에는 연락을 마친 아슬론 윈터쳇이 서 있었다.
“준비는 다 끝냈어?”
“거의요. 가져갈 게 얼마 없어서 간단히만 챙기려고요.”
“그래. 우리는 포털을 이용할 수 없으니까 시간을 맞추려면 서둘러야 돼.”
포털은 각 지역을 연결해 주는 일종의 통로였다. 일주일이 걸릴 거리도 쉬어 가며 통과해도 이틀이면 충분했다.
그 덕에 먼 지역과의 교류 역시 활발해져 제국에 많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다만 문제점은, 포털을 사용하는 비용이 무척이나 비싸다는 것. 그래서 이용하는 사람은 대상인이나 고위 귀족이 전부였다.
물론 탄제리크가 포털 정도를 이용할 돈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포털을 이용할 때에는 누가 언제 사용했는지 기록이 남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동부에서 요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록시나는 이용을 할 수가 없었다.
“마차를 타는 게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며칠 후면 가족을 만날 테니까.”
“딱히 불편하지는 않아요. 제가 마차를 오래 타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덤덤한 나의 반응에 아슬론은 피식 웃었다.
“그래. 내가 오랜만에 수도에 간다고 걱정이 좀 됐나 보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알겠다. 너라면 뭐든 잘하겠지. 그럼 마저 준비하고 저녁에 보자.”
아슬론이 방을 떠나자, 옆에서 마저 짐을 싸던 앤이 감탄하듯 말했다.
“아슬론 님께서도 정말 많이 변하셨네요. 매일같이 틱틱대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랬던가?”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자 앤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처음에 뵀을 때 얼마나 차가운 분이라고 생각했다고요.”
앤이 아슬론을 처음 본 건 테리온즈 저택을 떠나 동부의 어느 작은 마을로 향했을 때였다.
‘그때라면, 조금 까칠했을지도.’
아슬론은 사람들에게 정을 잘 주지 않는 편이었다.
내가 아르타나 여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는 경계심이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낯선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으니까.
“앤한테도 그랬어?”
“당연하죠! 하도 냉담하게 구시기에 제가 뭘 잘못한 줄 알고 한동안 고민했었다니까요.”
“그 정도였어? 그럼 지금은?”
“음…….”
앤은 잠시 고민하듯 눈을 굴리다 이내 ‘아,’ 하며 대답했다.
“지금은 그냥 사람 취급은 해 주시는 거 같아요. 다행이죠.”
“사람 취급? 그럼 그동안은 그 정도도 못 했다는 거야?”
“워낙 무심한 분이시잖아요. 관심 없는 것에는 일체 눈길도 주시지 않아요. 그에 반해 지금은 배려도 해 주신다는 거죠.”
“그런가.”
록시나는 기억을 더듬어 11년 전, 아슬론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조금 무신경했던 것도 같다.’
나 역시 그와 처음 대면했을 때는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으니까.
‘신성력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달라 불렀더니 무턱대고 신성력을 사용해 보라 하더니, 못 하면 이것도 하지 못하냐며 신경을 긁었으니까.’
그가 나를 향한 말투가 부드러워진 건 내게 현 대신관을 능가할 정도의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였으니까.
‘지금과는 완전히 딴판이었구나.’
현재의 아슬론 윈터쳇은 은근 섬세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훈련이 잘되지 않아도 괜찮다며 격려하고, 몸 상태는 어떤지 매일 같이 꼼꼼히 확인했으니까.
“……정말 많이 변하긴 했다.”
“그럼요.”
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짐을 마저 정리한 후 마지막으로 가방의 덮개를 닫았다.
“이제 나가면 될 것 같아요.”
앤이 챙긴 짐과 함께 방을 나선 나는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에 잠시 멈칫한 후,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아버지는?”
“공작님 말씀하시는 거죠?”
“응.”
“아, 그게…….”
앤은 곤란한 듯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직 들려오는 소식이 없네요.”
“…….”
내가 아무런 말 없이 가던 길을 마저 걷자, 앤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 왜, 소식이 없는 게 오히려 낫다는 말도 있잖아요. 좋은 소식이면 좋겠지만 늘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앤의 말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을까 싶어 속이 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헤이녹스는 내가 11살이 되었을 때쯤 전장으로 떠났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전쟁터로 떠나 있다가 돌아왔기에 재출정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헤이녹스가 처음 소식을 보내온 것은 가스펠트 공작령에서였다.
‘가스펠트의 부탁으로 북부에 더 머물러야 할 거 같다고 했었지.’
북부의 경계와 맞닿은 드웬델 백작령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무래도 그 드웬델 백작이 수상한데, 증거가 없어.’
때문에 무려 5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드웬델 백작을 조사했고.
‘그러던 사이에 구텔 왕국이 선수를 쳤지.’
헤이녹스와 가스펠트 공작이 충분한 증거를 찾기도 전에, 구텔 왕국은 제국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조사도 다 못한 채 구텔 왕국으로 가셨으니까.’
그 이후 헤이녹스가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국에서 만든 무기로 제국민이 죽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마한 양의 무기는 자작 혼자서는 절대 빼돌릴 수 없는 양이라고.
그 이후로 헤이녹스는 구텔 왕국과 거리도 가까우면서 헨튼 뱅쇼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이를 유력한 공범으로 찍었고,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렇게 길어진 전쟁이 벌써 5년째였고, 헤이녹스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건 더 길었다.
“보고 싶어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