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그동안 겪을 많은 사건과 시간 속에서 서로의 끈끈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렌자드와 체드만은 노력하자고 말했다. 우리가 멀리 있어 자주 보지는 못하더라도 편지하자고, 서로를 생각하고 마음껏 그리워하자고.
그리고 나는 그가 먼저 내밀어 준 손에 정말이지,
‘울 것 같아.’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감동에 눈물이 찔끔 나오려고 할 때마다 눈에 힘을 주며 참았다.
‘오늘을 슬펐던 날로 기억하고 싶진 않아.’
눈물을 흘렸던 날로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이렇게나 생각하고 있다는 걸,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걸 들은 날이니까.
“록시, 혹시 울어……?”
렌자드가 설마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아니고든!”
‘나 안 울었거든, 진짜로!’
사실 거의 울뻔하긴 했지만 정말로 참았단 말이다.
“나 안 울어따.”
애써 단호하게 말하자, 체드만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록시는 울진 않았어.”
그러더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말했다.
“편지, 할 거지?”
어쩐지 머뭇거림이 느껴지는 질문에,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긴장한 건가?’
체드만은 언뜻 보았을 땐 평소와 다름없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의 목소리나 표정이 전보다 경직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느라 대답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체드만의 미소가 조금 더 어색해졌다.
“아,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아니, 아니야!”
체드만의 포기하는 듯한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편지하께.”
‘비록 아직 쓰는 건 서툴지만 스승님한테 물어보면서라도 할게.’
“내가 보내면, 오라버니두 답장해 줘야 대?”
내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체드만이 따라서 미소 지었다.
“응!”
“우리 생일은 꼭 챙겨 주자.”
렌자드는 무언가 다짐하듯 이야기했다.
“서로를 계속 생각하고 있다는 뜻으로 선물을 보내는 거야. 왜냐하면, 혼자 보내는 생일은 너무 슬프니까.”
‘맞아.’
혼자 보내는 생일만큼 쓸쓸한 게 없었다는 걸, 나는 이제 알았다. 정작 혼자일 때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 이제는 서운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걸.
생일이라는 게 정말 웃겼다.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일이 내게 이렇게 소중해질 줄은, 이렇게나 마음이 약해지고, 쉽게 상처받을 줄은 몰랐다.
‘태어난 날을 축하받는다는 거, 정말 기분 좋았으니까.’
나 역시도 챙겨 주고 싶었다. 비록 그들의 생일을 가까이에서 축하하거나 볼 수는 없겠지만.
“나도 예쁜 물건두 사서 보낼께.”
나 아직 기억하고 있다고, 두 사람이 내게 준 관심이나 사랑 같은 거, 아직 잊지 않았다고.
소중하게 대해 준 만큼 나도 소중하게 생각하겠다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마냥 기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슬픔에 젖어 우울하지도 않았다.
딱 그 정도가, 가장 적당했다.
* * *
“할머니, 할아부지.”
저녁 식사가 끝나고 몇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후작 부부의 방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저 록시나인데여.”
그러자 금방 방문이 활짝 열렸다.
“록시나! 네가 여긴 어쩐 일이니?”
“잠깐만 들어가두 괜찮을까여?”
“물론. 어서 들어오렴.”
그리고 후작 부부 방에 들어서자,
침대 위에 앉아 있던 후작이 놀랍다는 표정을 나를 반겼다.
“여기는 어쩐 일이냐?”
“아, 저 그게…….”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잠시 머릿속으로 정리한 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못 한 거 가타서여.”
그러고 보니, 후작 부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들이 우리를 배려해 주고 있다는 건 느끼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어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찾아왔는데도 반겨 주셔서 감사해여.”
처음 보는 손녀라 어색하거나 그리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한결같았다.
매일 인사해 주고, 같이 밥을 먹고, 나를 부를 때 꼭 ‘록시나.’ 하며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고.
‘어쩌면 나를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부담스러워 않도록 어디를 함께 가자는 말도 쉽게 하지 못한 채로, 내가 마음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걸, 이젠 알았으니까.’
얼마나 많은 배려를 받았던 것인지 알아 버렸으니까.
“보고 시플 거예여.”
그리고 그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그리울 것이다. 나는 이토록 사랑받았던 기억을 잊지 못할 거다. 아마도 평생을
내가 진심을 담아 꾸벅 인사를 한 후 고개를 들자, 후작 부인은 놀란 듯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록시나.”
그녀는 애써 괜찮은 듯 말을 시작했지만 떨리는 손은 감추어지질 않았다.
“우리는 네가 불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너만 보면 미안했지만, 동시에 사랑하고 싶었어.”
그녀는 전보다 조금 촉촉해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이야기란다. 만약 누군가 너를 미워한다면, 그건 네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서일 테고.”
그러곤 후작 부인이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자, 침대에 앉아 있던 후작이 입을 열었다.
“먼저 다가가지 못해 미안하구나, 록시나. 그리고 먼저 다가와 줘서 고맙고.”
후작은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후작은 거동이 불편해 침대에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진심만은 내게 온전히 전달되었다.
“록시나, 기억하거라.”
그는 진지한 얼굴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테리온즈는 언제나 네 편이다. 언제 와도 너를 반길 것이고, 무슨 일이 생겨도 너를 돕는 데에 앞장설 거다.”
후작이 하는 말은 나에게 하는 말 같기도, 그 스스로를 향한 다짐 같기도 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아니면 문득 생각이 나면, 동부에 와 주렴. 네가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아.’
또다.
또 입을 열 수가 없다.
아무런 이유 없이, 한 번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그게 전부인 그런 모습.
어색하지만 반가워서, 기뻐서.
밀려오는 호의에 잠겨 버릴 것만 같았다.
“꼭 또 올게여,”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뿐.
* * *
“두고 온 거 업겠지?”
나는 공작가에서 들고 온 물건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체드만이 준 책이랑, 인형 두 개랑, 또 뭐가 있었지?’
내가 기억을 되짚느라 여념이 없자, 후작 부인이 다가와 살짝 미소 지었다.
“두고 가면 또 오면 되잖니.”
“아.”
그녀의 말이 맞았다. 무언가를 두고 간다면 다시 찾으러 오면 될 일이다. 우리는 영원히 보지 않을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더 열심히 연습하고 있으께여.”
많이 연습해서, 이제는 어색하지 않을 때까지.
내가 내 힘으로 나를 지키고, 내 힘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때까지.
그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단 것쯤은 알았지만, 그럼에도 떠나겠다는 의지는 확고했다.
‘알아야 할 게 너무 많아졌어.’
프리실라의 죽음에 다다르기까지 너무도 많은 난관이 있다.
그녀가 어쩌다 희생양이 되어야 했는지, 신전과 프리실라는 어떤 관계에 있는 건지.
신전의 독실한 신자였으며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명망 있는 공작 가문의 안주인.
확실한 수가 있는 게 아니라면 감히 나설 수도 없는 상대였다. 함부로 건드렸다간 큰코다치기 쉬웠으니까.
‘헤이녹스가 알았다면 정말 난리가 났을 텐데.’
거의 제 목숨을 내놓고 한 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앞으로의 신전은 모든 걸 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체 뭘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황후와 손을 잡은 이유는 대체 뭘까. 그리고 그게 왜 황제도 아닌, 하필 황후였을까.
사실을 알아야 하고, 더 깊숙이 파헤쳐야 하는 일들이 생겼다. 더는 딴짓할 시간이 없었다. 증거를 빨리 찾지 않으면, 그쪽에서 먼저 없애 버릴 테니까.
“다음에 또 오렴.”
“언제든지 환영하고 있을 테니 주저 말고 오거라.”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들의 따뜻한 배웅에 그런 일들은 잠시 머릿속에서 비운 채,
우리는 서로를 향해 웃어 보였다.